91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8)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오랜만입니다, 라크루아 여러분.”
“지평선의 평균율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카미오노 사제님.”
“지평선의 평균율을.”
오늘도 성소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루카가 라크루아의 오누이를 맞이했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대신전에 왔다가 사교를 즐기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그편으로 쏟아졌다. 라크루아의 마차가 들어서자 혹여 궁정백 부부가 등장하면 알은체를 하려던 것이, 금세 호기심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라크루아의 자제들과 사교계에서 이름 높은 남성 중 하나인 루카미오노 모두 사교계의 이목을 끄는 조합이었으니까.
‘일부러 예배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난 때에 왔건만…….’
에티엔이 마음 놓고 대신전에 올 수 있는 날이 주일뿐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었지만, 와중에 최대한 한적한 때를 노린 거였는데.
클로에는 작은 낭패감을 느끼며 루카에게 서두르라며 성소의 입구 쪽을 턱짓했다.
“얼른 드시죠, 형제님, 자매님.”
그 분위기가 달갑잖은 것은 루카도 마찬가지였다. 답잖은 가식을 계속 떠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던 것이다.
라크루아의 오누이와 그 호위들은 루카의 안내를 받아 성소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찾는 사제가 있으시다고?”
제 응접실에 들어서고서 손님들이 제대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루카가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래도 손님 대접한답시고 미리 우려둔 찻주전자를 내오면서였으니 그나마 예의는 차린 거였을까.
데메트리안을 대할 때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는 에티엔을 한번, 밖에서 가식 떨 땐 잘 지키는 사교계 예법도 무시하고 마음껏 구는 루카를 한번 흘긴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에티엔이 사교클럽에서 마주친 사제에게 실례를 저지른 바가 있어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
얼마 전 마르코네서 사들인 다이아몬드를 정화하기 위해 루카의 도움이 필요하던 차였는데, 마침 에티엔이 루카에게 같이 가 달라기에 잘됐다 싶었던 것이었다. 엄청 생색을 내기야 했지만…….
‘그땐 에티엔이 이런 부탁 한 적 없었는데. 나 없이 루카를 만나러 올 배짱이 있진 않으니까.’
클로에는 두 사람의 껄끄러운 분위기를 살피며 제 오라비에 대해 여느 때처럼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제가 기억하는 스무 살의 6월에 에티엔과 루카를 만나러 온 적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그 언젠가의 에티엔은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의 테러 때문에든, 구휼 기금 문제가 해결돼지 않아서든 지금보다 더 바빴던 모양이었다. 매주 철의 날에 습관처럼 들르는 사교클럽에 가지 못했을 정도로.
그러니 지금 사교클럽에 더 자주 가서, 에르드의 사제에게 결례를 범하기도 했던 거겠지.
‘지금껏 에티엔이 물어 날랐던 이야기들이 꽤 도움이 됐으니, 보답한 셈으로 쳐야 할까.’
클로에가 혼자서 셈을 치르고 있을 때에 에티엔이 입을 열었다. 마치 데메트리안을 대할 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제가 일전에 사교클럽에 갔을 때 사제 한 분을 마주쳤는데 말이죠. 사교클럽에 사제분들이 드나드는 경우가 워낙에 없다 보니 저는 영락없이 사제님인 줄 알았지 뭡니까.”
“사교클럽에나 드나드는 방탕한 사제 새끼는 나밖에 없는 게 맞긴 하지.”
루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거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는 에티엔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에티엔이 당황하는 기색에 클로에는 괜히 제가 민망해졌다.
유약해 보이리만치 선한 인상의 에티엔과, 생명의 사도 피레사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의 미모 너머로 지랄 맞은 본성을 숨기고 있는 루카는 어려서부터 묘하게 삐거덕거렸다. 기실 친교를 쌓을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에티엔은 데메트리안과도 안 맞았지만 루카와는 더더욱 안 맞았다. 루카와 조금이라도 잘 어울렸다면 에티엔이 지금처럼 데메트리안을 어려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야트막한 안타까움을 담아 클로에는 핀잔하듯이 말했다.
“그래, 넌 사제 새끼고. 에티엔이 찾는 사제님이나 찾아 줘.”
“예이예이, 뭐. 어떤 분이시라고?”
반말인 듯 존대인 듯 묘한 그 말투에 버거움을 느끼며 에티엔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 한 번이다. 지금 도움받으면 또 당분간 마주칠 일 없으니까…….
그를 만나는 것이 이토록 마음 불편한 일이었기에, 벌써 한 달도 더 전의 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고 미뤘던 거였다.
“그, 보조개가 한쪽에만 있는 분이었는데…….”
거기까지 듣자마자, 클로에는 제가 얼마 전 얼굴을 확인했던 신관을 떠올렸다.
“키는? 소궁정백보다 크시나?”
“네, 저보다 조금 더 컸는데…… 사제님 정도? 조금 더 큰 듯도 하고요.”
“나보다 큰 사람은 많지 않은데…… 한쪽에만 보조개 있는 자라. 그거 아냐?”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곰곰 생각하던 루카가 갑작스레 시선을 제게 돌리며 하는 말에, 클로에는 간파된 느낌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그녀 역시, 필시 같은 이를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그, 그거라니?”
“왜, 네가 저번에 네 ‘아는’ 마법사 닮았다던 그 사람 말야.”
루카는 그때의 말소리를 따라 하듯 밉살스럽게도 ‘아는’에 기묘한 강세를 두어서 말했다. 미라벨의 목구멍에서 크흡, 웃음 삼키는 목소리가 났다.
동생도 아닌데 쥐어박고 싶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를 흘기며, 클로에는 에티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밝은 갈색머리셨어? 밀빛 정도?”
“거기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 느낌이긴 했어.”
“눈썹 연하고?”
“그랬던 것 같아.”
아니, 사람을 찾겠다면서…… 에티엔의 어정쩡한 대답에 클로에는 괜스레 짜증이 나려는 것을 꾸욱 눌렀다.
이 짜증은 에티엔 때문이 아니라, 옆에서 이기죽대는 루카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쪽에만 보조개 있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까 그거 빼고는 다 잊을 수도 있지. 에티엔도 경시청 일로 바쁘니…….’
클로에는 작은 연민을 담아 그의 낯을 살폈다. 한데 에티엔의 얼굴은 다른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는 분이야? 네가 아는 마법사를 닮았다고? 너, 아는 마법사가 있어?”
“아…… 어쩌다 보니, 뭐.”
데미가 거기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던 거구나. 데메트리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니 또 마음이 가라앉고 말아, 클로에는 대충 얼버무리며 루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맞나 봐, 그분.”
“그, 보물고 담당 신관인 안톤미오노라는 이가 있죠.”
그렇게 말한 루카미오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별 살림살이도 없는 제 너른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을 흔들었다. 그 소리가 딱히 크지도 않은데 어찌 들리는 건지, 곧 신전의 심부름꾼 아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네, 사제님.”
“소궁정백께서 안톤미오노 형제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네,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는 차기 고티유 대신전의 대신관 유력 후보이신 루카미오노 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낯을 밝힌 채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뒷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웩.”
“뭐가 웩이야?”
“진짜 가식적이다, 너…….”
조금 전 얼핏 보았던 루카의 나긋나긋한 말투와 인자한 표정 같은 것……을 떠올리며 클로에가 속이 뒤집힐 것 같다는 듯이 혀를 내밀어 보였다. 내색할 만큼 가깝지 않아서 못할 뿐, 에티엔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클로에의 표정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미라벨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근데 그 신관님을 사교클럽에서 봤다고? 그런 분도 사교클럽에 다니시는구나.”
미라벨에게도 이젠 구면의 신관님인 것이었다. 클로에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들어 알고야 있었지만, 제가 생각해도 클로에가 ‘미래’에서 봤다며 묘사한 그 행색이 썩 와닿지 않을 만큼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었는데. 대신관 감으로만 보자면 저 앞의 가식적인 루카미오노보다 그분이 더……
“뭐, 교리가 세속적인 유흥을 경계하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 비위 맞춰야 기부금도 많이 받으니 어울리는 건 권장되는 바이기도 하고.”
“그래. 그냥 술이나 먹고 놀자고 다니는 사제는 너밖에 없지만 말야.”
“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도 감정 노동 한다?”
“네가 무슨 감정 노동을 해?”
“내가, 어? 엊그저께 크레벨 소공작 술 동무를 한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
데미가 루카랑 술을? 크레벨 소공작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잃고 말았다.
그 기색에 대강 짐작하는 바가 있는 미라벨과 에티엔은 실실 웃던 것을 멈추고 클로에의 안색을 살폈다.
“진짜, 그 새끼는 갑자기 실성이라도 했는지, 며칠 전에 갑자기 술 먹자고 와 갖고…… 어휴, ××. 너 그 새끼 술 취한 거 본 적 없지?”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를 인지하지 못한 루카는, 며칠 전 데메트리안이 맛이나 알고 구한 것인지 모를 고급 위스키를 들고 와서는 뱃사람 에일 맥주 들이켜듯이 마셔댄 것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렇게 ××처럼 살다 보면 인생에 ×같을 때도 되긴 했지……?”
학을 뗐다는 듯이 윗입술을 삐죽대며 한참 나불대던 루카는, 그제야 그 분위기를 알아채었다.
평소 데메트리안의 흉을 함께 보던 클로에가 아무 말이 없어서 쳐다봤더니, 그녀의 낯이 뭔가 심상찮았던 것이었다. 이런.
“어흠, 뭐, 그냥 그랬다고.”
“…….”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루카도 데메트리안과 클로에의 그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머저리 새끼가 얘랑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구나.
저 때문에 정적이 찾아온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안고서, 루카가 과장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그런데 안톤미오노 그자가 사교클럽이라고? 그 고상하신 분께서.”
“하긴, 보물고 담당 신관이라면, 그 위치가 꽤나…….”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또 스스로도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었던 에티엔이 말을 받아 주었다.
보물고 담당 신관이면, 신관 중에서도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일 거였다. 그가 보물고를 열면서 저와 대신관의 신성력에만 반응한다고 한 것을 두고 클로에와 미라벨도 알아차린 바였다.
루카미오노가 고티유 대신전에 배속돼 오면서 차기 대신관 후보 순위에서 한 자리 밀렸을 정도로, 대신관의 자리에서 가까운 이.
‘그래서 우리가 루카와 친하다고 했을 때 동요하신 걸까?’
루카가 말을 돌리려는 게 티가 났지만, 클로에는 그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연스레 기분이 풀리고 말았다.
루카는 고맙다는 듯 에티엔 쪽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제 말을 이었다.
“요즘 좀 이상하긴 했어. 가끔 실실 웃으면서 친한 척을 하길래 돌았나 했는데. 사교클럽에서 뭐 재밌는 거라도 배워 왔나? 나 요즘 못 갔는데. 무슨 새로운 유행이 생겼나?”
“……너만큼 배웠겠니?”
똑똑.
클로에가 저 때문에 잠겨 버린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루카를 가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을 때. 안톤미오노에게 심부름을 갔던 아이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