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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90화 (90/189)

90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7)

며칠 전 아이펠의 장원에서, 데메트리안에게 무슨 계획이 있는지 답을 보채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질문은 결국 루시엔 캄포가 크레벨에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할 수 있느냐는 말과 같았고…….

클로에는 저만 아는 떳떳하지 못한 마음과, 한편으로 루시엔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가면이 있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이 흐무러진 낯이 저 야무진 공녀님께 어찌 해석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앰버는 리도테 시절이 좋으셨나요?”

“저야…… 재밌었죠.”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의 머릿속에 당시에 친하게 교류했던 멜라니 알로제 같은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이어서 더 편하게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제게도 재밌으려나요? 사실 고티유의 사교계에 데뷔할 게 아니라면 꼭 갈 필요는 없다고 해서, 기왕이면 안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사교계에 데뷔를 안 하신다고요?”

클로에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내자, 루시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음…… 사교계 활동을 앞으로도 안 할 수 있다면요. 물론 제 아버지가 평범한 분은 아니셔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크레벨의 공작부인이 어떻게 사교계 활동을 안 하나요, 클로에의 목구멍에 그 말이 반사적으로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어느 날 들었던 말소리.

‘거기에 크레벨 공작가는 별 의미가 없죠.’

그녀는 정말 크레벨과의 정혼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왜 하필 이런 때에 그 기색을 보이는 걸까.

제가 그녀의 정혼자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저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무엇도 알 리가 없을 텐데…….

매번 이리도 혼자서 찔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이젠 조금, 지겨웠다.

“아까 그, 알레지오의 영애도 사교계 활동을 안 하긴 하네요.”

그때 미라벨이 발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침울해진 클로에가 자아낼 뻔한 어색한 침묵은 덕분에 적당히 얼버무려졌다.

미라벨의 말에 루시엔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알레지오라면…… 그 마정석을 유통하는 상단 맞죠?”

“네. 좀 아세요?”

루시엔이라면 뭔가 좀 아는 게 있을까, 클로에가 반색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뷔욘의 집에서 마주친 이후로 종종 그녀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오늘 마주치기까지 한 차였던 것이다.

“저도 잘 몰라요. 아르투젠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이치고 알레지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그들이 한들룽 지구 쪽에 거래를 하지 않아서 직접 마주칠 일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없고.”

“아하…….”

클로에는 제가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고 말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루시엔은 가면 너머로 상대의 호기심을 헤아리려 애쓰며 말했다.

“하긴, 보석으로 마정석을 만들긴 하니까요.”

“아, 맞아요. 그렇죠, 뭐.”

정말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루시엔에 대강 짐작해 준 근거를 클로에는 답삭 받아 물었다. 제가 뷔욘의 집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에 알레지오 상단주의 여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시 호감을 가질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알레지오 후작가가 상단을 직접 경영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 영애가 상단의 일에 참여하는 것 같아서 궁금하더라고요. 마탑과 교류가 많은지 말레카식 의복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 말예요.”

“흐음, 마탑이 직접 운영하는 마정석 상단이 있다고 들어서 말레카에서 장사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알레지오가 대륙의 마정석 유통을 다 쥐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말레카는 특별한 곳이니까요.”

“그렇구나…….”

제가 잘 모르고 말했다는 작은 수줍음과 더불어, 알레지오의 영애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럼 리도테를 졸업하고서 단순히 유학이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알레지오와 뷔욘이 마정석으로 얽혀 있는 걸 생각하면, 그날 뷔욘과 일적으로 얽혀 있는 듯 말하던 그녀가 마정석의 유통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데…….

‘그냥 거기 옷이 취향일 수도.’

클로에가 속으로 갸웃거리며 그녀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할 무렵이었다.

“이히히히히, 만국 회담이네, 만국 회담이야.”

“뭐야?”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미라벨이 그편을 돌아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마르티노가 걸음을 내디뎌 그녀들보다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걷고 있던 길에서 들어가는 골목 어스름한 곳에 중년인 하나가 벽에 기대어 반쯤 누워 있었다. 슈바츠 거리의 흥성거리는 밝은 불빛과는 대조적으로 어둡게 그늘진 공간이었다.

“스체르바뇰에, 오리포네에, 말레카…… 떠들려면 너희 나라로 가라고! 시끄러우니까. 이히히히.”

복색이 귀족의 것은 아니었지만 재질로 보자면 퍽 값비싼 것이었다. 아마 돈깨나 있는 평민이겠지.

술에 취한 건지, 부정확한 발음으로 지껄이던 그 중년인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발끈한 미라벨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나서려고 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웬 늙탱이가 시비는 시비야?”

“참아, 참아, 라비. 가자, 먼저.”

“아, 시끄러워! 머리 울린다고. 히히히히.”

시선은 기묘하게도 그들 근처의 다른 어딘가에 붙박인 채, 중년인은 저의 무방비한 몸가짐도 잊고 주먹을 휘둘렀다. 말이 휘두른 것이지 흐느적거리는 수준이었지만…….

하지만 그때마다 따라붙는 기묘한 웃음소리가 충분히 위협적으로 들렸다.

“신경 써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요. 요즘 가끔 저런 미친 자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를 흘끗 쳐다본 루시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거리에 자주 오는 이다운 반응이었다.

한때 대축일 주간 장터거리의 잡범들을 처치한 이로서 그걸 뒤로 하고 가자니 마음이 찝찝했지만……. 정체를 숨기고 온 주제에 복잡한 일에 휘말려선 안 되었다.

클로에는 찝찝한 마음을 한구석으로 미뤄 두고서 루시엔을 따르는 편을 택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적당히 멀어졌을 때쯤 미라벨이 참았던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뭘 잘못 먹었나?”

“일종의 환각제 같은 걸 흡입한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치곤 지각은 멀쩡한 것 같긴 하죠?”

적어도 환상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루시엔의 추측에, 클로에의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는, 아차 싶어 일행들이 제 말소리에 주의하지 않도록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여송연을 어떻게 하면 다른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걸 어디서 들었더라……. 그 출처가 누구의 말소리인지 책이었는지 당장에 기억나는 바가 없어, 클로에는 잠깐 생각하고 생각 너머로 잊어 두었다.

* * *

다음날인 6월의 첫 번째 주일, 라크루아의 오누이를 실은 라크루아의 큰 마차가 고티유의 시내를 가로질러 교외의 대신전으로 향했다. 주일 예식이 끝나고도 남을 14시 즈음이었다.

“대신전 사제랑 친한 누이 덕도 보고 좋네.”

“고마우면 재밌는 얘기 좀 해 봐.”

클로에가 새침하게 말을 내뱉고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에티엔의 옆에 앉은 에티엔 전담 호위 기사인 썽의 안색을 살폈다.

붉은 기를 띤 갈색 머리칼 아래 하얀 얼굴을 한 적당한 체구의 에티엔과 대조적으로, 구릿빛 피부에 베이지색 머리칼을 갖고서 양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기사, 썽.

경호조의 기사들이 기본적으로 과묵하다지만 그가 그중 제일이어서, 늘 일자로 다물려 있는 입에서는 말소리가 나오는 법이 없었다.

‘썽 경도 알고 있을까?’

미라벨과 저야 단순한 호위 기사와 그 호위 대상 이상으로 막역한 사이이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주고받는다지만, 썽은 사정이 다를 테니까. 그럼에도 에티엔의 모든 행동을 함께하는 만큼 보이는 게 있어서 뭔가를 알 것도 같았다.

생각해 보면, 호위 기사 앞에서 비밀 챙기는 주군이 어디 있던가. 고민하던 클로에는 일부러 능글맞은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아니이, 저번에 마르코네 앞에서 만났을 때 말야.”

그러면서 쿡, 미라벨의 옆구리를 찌르니 척하면 척인 미라벨도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맞아. 탐문 수사 핑계로 데이트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 둘 다 무슨 소리야?”

그 하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에티엔이 펄쩍 뛰었다. 극적인 그 반응이 재밌어서 클로에와 미라벨은 서로를 흘기며 킬킬 웃었다.

단단한 자갈돌 같은 썽의 까만색 눈동자가 슬며시 창밖을 향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서 클로에는 제가 궁금해하던 바에 대한 답을 알 수밖에 없었다.

‘썽 경도 뭔가 알고 있구먼. 역시 그렇다면…….’

클로에는 고개를 어슷하게 틀어 놀리듯이 말을 이었다.

“고맙다며. 솔직하게 말해 보시지, 소궁정백님.”

“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

“네 귀가 왜 새빨개졌는지 말야.”

푸훗, 미라벨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터져 나왔다.

에티엔은 두 아가씨들이 뭔가를 작정한 듯 저를 놀리는 것이 얄미운 한편으로, 숨겨 둔 제 마음이 들켰다는 것이 창피하여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저만의 비밀이었는데, 이러다 말려고 다짐까지 했는데…….

에티엔은 울컥하는 마음에 건드릴 생각이 없던 바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러는 너는.”

그렇게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에티엔은 땡그래진 채 제게로 향한 클로에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내가 뭐?”

“내가 너한테 물을 게 없어서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줄 알아? 그……,”

거기까지만 말했는데 어두워지는 누이의 안색……. 아차, 순한 오라비 에티엔은 제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클로에가 승마를 하러 아이펠 장원에 다녀온 것을 두고 사용인들 사이에 크레벨 소공작이 낫네, 스칸다르의 왕자가 낫네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에티엔이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크레벨 소공작이야 그렇다 치지만, 뜬금없이 스칸다르의 왕자라니……?

더 이상한 것은 그날 이후로 클로에가 아이펠 장원에서의 일을 넌지시라도 묻지 못하게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사용인들이건, 어머니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미라벨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지.’

슬며시 옮겨붙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미라벨이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런 뜻이 담겨 있음을 평생을 같이 산 에티엔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어쨌든 그 역시, 미라벨과 같은 젖을 먹고 자란 것이었다.

아무도 물어볼 수 없는 라크루아 오누이의 연애사 덕에, 대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라크루아의 큰 마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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