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6)
그 토템은 파이겐처럼 평생을 수련한 무사의 팔뚝만큼 두꺼운 몸통 부분 양옆으로, 마치 팔처럼 직각 모양의 나뭇조각이 붙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삼지창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몸통 부분에는 눈과 입이 음각되었고 팔 부분이며 몸통이며 할 것 없이 빨간색, 검은색, 하얀색 등으로 얼룩덜룩 색칠돼 있어서, 그것은 심미적으로 아름답다기보다…… 마치 주술의 도구 같았다.
“저것도 나름 예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오늘도 미라벨이 클로에가 할 말을 대신 뱉어 주었지만, 루시엔은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빛내며 패들을 손에 쥘 뿐이었다.
“소유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 수 있다는 전설의 토템! 1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15골드.”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루시엔은 패들을 들어 보이고는 거기에 대고 제 입찰 가격을 읊조렸다. 일종의 마도구여서 무대에 있는 직원들에게로 가격이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입찰이 완료되었다는 신호인지 패들이 은은한 빛을 뿜어낸 순간, 루시엔이 말한 금액이 무대의 전광판에 바로 입력되었다.
“15골드 나왔습니다! 아, 20골드 나왔군요! 25골드 나왔습니다.”
이윽고 숫자가 30, 40, 45, 55 순으로 조금씩 올라갔다.
“70골드.”
루시엔이 다시 입찰했고, 75, 85, 90, 95……. 숫자는 깨작깨작 꾸준하게도 올라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뭐라고 다들?”
미라벨이 황당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걸 산다는 대공녀도 대공녀지만, 저 못생긴 나무 덩어리에 무슨 수요가 있어서 다들 끊임없이 입찰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조금 길어지려나 보다 싶어서 하이볼로 입을 축이러 자리로 돌아왔지만, 미라벨은 아예 난간에 걸터앉아 객석을 살폈다.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 입찰하는지 살피려는 듯한 눈길로…….
안전보다 미감에 중점을 두어 만들어진 난간에 앉은 미라벨의 모습은 일견 위태로워 보였지만 일행 중 그 누구도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2층에 가면 쓴 아저씨 하나에…… 다 박스석에 있는 사람인가? 잘 안 보이네. 아, 저기 맞은편 박스석에서 한 명 입찰했나 봐.”
시력도 남들보다 좋은 미라벨이 누가 입찰하고 있는지 중계해 주는 사이, 가격은 찔끔찔끔 올라 어느새 140골드에 이르렀다. 장난삼아 입찰하는 사람은 이제 다 떨어져 나갔는지 입찰액이 경신되는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쯤 미라벨이 갑자기 클로에를 향해 손짓하며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어, 저 빨간 머리…… 그때 그 여자 아냐?”
그 손짓을 따라가 보지 않아도 클로에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맞지? 아까 태양의 목걸이도 그 영애가 낙찰받은 것 같았어.”
“맞겠지, 저런 머리색이 어디 흔하다고. 어! 저 여자가 방금 입찰했어요!”
그러는 사이 금액이 150골드가 전광판에 등록되었다.
“그 여자가 누군데요?”
“알레지오 상단의 딸일 거예요.”
“알레지오라…….”
루시엔의 목소리가 미세한 긴장과 흥분을 담아 떨렸다.
그 상단과 상단주 가문에 대해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가면 안쪽의 까만 눈동자를 살피던 클로에의 뇌리에 문득, 스칸다르 왕실저에서 비죽 웃던 알레지오 영애의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루시엔의 손을 잡았다.
“루비.”
루시엔이 놀란 듯 고개를 돌아보자, 가면 너머로 클로에의 녹색 눈동자가 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호승심 같은 것이 어린 듯했다.
“200요.”
이유 없이 제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보다야, 그래도 호의적으로 구는 캄포 대공녀니까. ‘그’도 그들의 관계에서 빼기로 했고 말이다.
“200골드.”
갑작스레 50골드가 올라가자 청중들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배어나왔다. 그것도 잠시.
“220! 220골드 나왔습니다!”
“……270골드.”
“270골드! 더 있으십니까? 280! 280골드 나왔습니다!”
“아, 얄밉네.”
난간에 걸터앉은 채 시선을 한데 고정하고 있는 미라벨의 말소리에서, 계속해서 입찰하고 있는 상대방이 알레지오의 영애임을 알 수 있었다.
푸후, 루시엔이 비웃음처럼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로써 일종의 심기일전을 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또랑하게 울렸다.
“380골드.”
갑작스레 100골드를 올리는 것에 클로에와 미라벨이 루시엔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면 너머로 그녀의 안색을 살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400골드 나왔습니다!”
“500골드.”
“오오, 루비 대공녀님.”
미라벨이 루시엔을 띄워 주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때, 다시금 알레지오의 영애가 입찰했는지 전광판에 새로운 숫자가 올라왔다.
“510골드 나왔습니다!”
“610골드.”
오오오, 일순간 경매장을 채운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과 탄성 그 중간쯤의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클로에는 모두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저 나무 조각이 뭐라고…….’
아무리 돌이켜 봐도 그 토템에서는 어떤 상서로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630골드 나왔습니다!”
그렇게 외친 사회자가 자연스럽게 그들이 자리한 쪽을 올려다보았다. 1층과 2층에 자리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사회자의 시선을 좇아 몸을 돌렸다. 난간에 가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을 테지만.
후후, 다시금 웃음소리를 낸 루시엔은 제 입을 가리듯 패들을 입에 가까이 대고 중얼거렸다.
“800골드.”
그 숫자가 전광판에 적힘과 동시에 사람들은 경악이 섞인 환호성을 울렸고, 얼마 뒤 그 금액이 남대륙산 우르피츠크의 토템의 낙찰가로 선언되었다.
클로에는 재빨리 난간으로 튀어나가 미라벨의 시선을 좇았다. 거기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알레지오의 영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아, 재밌었다.”
미라벨이 흥분의 잔여가 여실히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매로 나오는 것들을 두고 다 바보 같다고 투덜댈 땐 언제고, 루시엔이 그 토템을 따낸 이후로 마치 경마라도 보듯이 경매를 관전한 덕분이었다.
‘아, 아깝다! 아예 50골드를 올리지!’
‘오, 처음부터 두 배라니, 기선제압 확실한데?’
‘아니! 200골드까지 갈 건 아니지 않나…….’
클로에는 이후의 경매를 구경하며 입찰가가 경신될 때마다 감정 이입하여 흥분하던 미라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다른 층의 사람들이 빠져나갔을 때쯤 나온 덕분인지 경매장 입구는 한산했다. 못생긴 나무 조각에 800골드를 투자한 인간이 누구인지 흘끗거리는 눈길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800골드는 호이제르 거리의 호화로운 타운하우스의 5년치 임대료에 맞먹는 금액인 것이었다.
“재밌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싶어서인지, 루시엔은 다시금 오리포네식 억양의 말씨를 썼다. 그 전환이 그토록 자연스러운 걸 보면 그 둘 중 어느 것이 그녀 본연의 말씨일지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다른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 토템은 어떻게 쓰실 거예요?”
“뭐…… 소원 비는 데 써야겠죠?”
“루비도 빌 소원이 있어요?”
클로에는 자못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경매에 나온 물품이 그 자체의 효력에 맞춰 쓰이기보다는 투자나 거래용으로 쓰인다던 그녀의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놀람을 알아차리지 못한 양, 루시엔은 마르티노가 들고 있는 토템이 담긴 나무 상자를 흘끗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뭔가 피로감이 배어나는 듯했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가면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경매가 종료되고서 나온 22시의 슈바츠 거리는 그 이전과 비슷하게 흥성거렸다. 유동 인구는 줄었지만, 거기에 남은 이들이 그 이상으로 취하거나 흥분하여 거리 전체를 달뜨게 만들고 있었다.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아까 데메트리안이 있었던 선술집 옆의 골목을 노려보았다. 그도, 크레벨의 기사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텅 빈 골목을 보는 제 마음이 아쉬운지 후련한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데메트리안과 마주치고서 마르티노의 뒤에 숨어들었던 그녀는, 마르티노의 체구를 가림막 삼은 그대로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제 시야 또한 가려졌기에 그의 시선이 언제까지 제 쪽에 붙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봤을 것도 아닌데.’
게다가 잘못한 건 제가 아닌데 왜 피했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저지른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잘못한 건 맞지.’
클로에는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려는 듯, 손을 꾹 말아쥐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고, 제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고, 제가 마음을 터놓고 말하자는 것을 모른 체했고, 혼자 좋을 대로 굴었고…….
결국에는 단 한 번도 저를 잡지 않았다. 그때도, 이번에도.
그렇게 그는 모든 걸 잘못했지만…… 실은, 동시에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가 저를 잡아야 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아이펠의 장원에서 만났던 때 말고는…….
제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그의 혼란스러운 낯과, 결국 멀어져 버리는 저를 참담한 얼굴로 떠나보내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번민과 별개로 미래에 함께하게 될 이의 얼굴도.
‘그때도, 지금도 부군이 내게 호의적으로 나오긴 하시니까…….’
어긋난 느낌이 들었대도 무슨 상관이랴. 제가 조금이나마 달라졌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거였다. 오히려 달라졌기에 셰비크의 생활이 즐거워질 수도…….
그래, 헛된 망상에 빠졌던 거였다. 클로에는 스스로에게 조소하며, 오래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결단코, 스체르바뇰산 위스키를 탄 하이볼을 석 잔이나 마셔서는 아니었다.
그 정혼이 제게 아무 의미 없다는 것처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말하는 그녀 또한 혹시……,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한 번쯤 묻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루비는 내후년쯤에 리도테에 들어가겠죠? 그때부터 고티유 사교계 활동도 시작하겠고요.”
“내후년요? 왜요?”
“그야……”
그녀가 그랬으니까. 2년 뒤,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떠난 뒤에 리도테에 들어갔다고 들었으니까.
제국 아카데미 생도들이 보통 15살에 입학하는 것에 맞추어 리도테에 다니려는 귀족가 자제들도 15살쯤에 입학하곤 했다. 그런데 루시엔은 이미 열다섯이거나 곧 열다섯이 될 것이니 시기를 놓친 셈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고티유 사교계에서 활동할 거였고, 그것은 실제로 2년 뒤에 일어날 일이었던 것이다.
‘왜 그때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클로에는 적당히 상식적인 내용을 제 추측에 끼워 맞췄다.
“상단 일을 당장에 놓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 그냥 추측해 봤어요. 성년 전에는 졸업하셔야 할 테니까요.”
리도테 아카데미의 졸업 연회가 귀족들의 사교계 데뷔의 관문 중 하나로 쓰였으니까. 일 때문에 리도테에 못 들어간다고 하기에는 리도테의 수업 과정이 퍽 여유로웠으나, 클로에는 그것이 적당히 그럴싸한 답으로 들리기를 바랐다.
“제가 리도테에서 공부해야 하나요?”
“아무래도 고티유 사교계에서 활동하시려면…….”
그러니까, 크레벨 공작가에 들어가시려면요. 그 말을 클로에는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