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3)
“네? 당치 않아요.”
식견이 넓다며 금칠해 주는 루시엔의 말에,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펄쩍 뛰었다.
‘내가?’
영리하다거나 기억력이 좋은 것에 대한 칭찬이야 많이 받아 왔지만, 그건 리도테의 차석으로 졸업한 정도에 그칠 뿐이었는데.
더구나 제가 루시엔의 폭넓은 관심사와 식견에 대해 감탄하고 있던 차에 그런 말을 들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맞은편의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클로에의 반응을 살피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루시엔은, 계속하여 감탄 섞인 말들을 이어나갔다.
“아뇨, 정말요. 궁정백부인의 취향이야 어른들 사이에 유명해서 막연히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대륙 북부 식문화까지…… 당연히 제도의 유행은 잘 아시겠고요. 게다가 이번에 한 무명 화가를 크레벨 공작부인께 소개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미술상들 사이에 파다한걸요? 아마 조만간 찾아오는 미술상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루시엔이 하는 말에 틀린 바는 없었다. 제이크 콜린스의 일을 갖고서 미술상들 사이에 말이 퍼진 것까지는 몰랐지만.
하지만 클로에는 그 찬사가 제 몫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특히 제이크 콜린스의 일은 제 안목과는 무관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크흠, 클로에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을 돌렸다.
“대공녀께서는 경매장에 무엇을 보려고 가시는 건가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클로에의 물음에 루시엔이 제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슥, 매만졌다. 식사 예법과는 자못 거리가 먼 손짓.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행동인 듯했다. 그리고 그런 때면……
“남대륙의 토템이 나온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사실 그걸 꼭 갖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실 것 같기도 했고.”
따로 뵙고 싶기도 해서요, 그런 말을 쑥스러운 기색으로 내뱉으며 루시엔은 고개를 모로 기울여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저와 친해지고 싶다는 거였다.
제게 호의를 보여 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루시엔을 만나기로 다짐한 이유를 생각하면…… 그 불순한 마음이 조금 찔렸다.
클로에는 무릎에 올린 손을 꾸욱 쥐었다.
‘제가 행복했건 못했건…… 그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매달 첫째 주 바람의 날에 열린다는 경매장은 프란츠 광장에서 사교클럽이 자리한 구역 바로 뒤편, 슈바츠 거리 한가운데에 자리해 있었다. 마차가 오갈 수 있을까 싶은 좁은 골목들을 굽이굽이 지나면 밤에 더욱 흥성거리는 거리들이 등장했고, 그 일대의 다양한 이름을 가진 거리들을 도합해 슈바츠 거리라고 불렀다.
적당히 남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슈바츠 거리 외곽에 마차를 대어 놓고서, 일행은 가면을 쓰고 그 중심부인 진짜 슈바츠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오래된 건물들을 피해 난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복잡한 길이었는데, 자주 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루시엔의 발걸음은 이번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 길의 풍경은 과연 루시엔이 말한 대로였다. 황제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인지 그런 사람들로 가장하고 싶은 것인지 다양한 나라의 복식을 차려입은 이들이 많았고, 가면을 쓴 이들이 있는 한편으로 제국식의 드레스나 정장을 차려입고서 맨 얼굴을 드러낸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저런 사람들이.”
“네, 아마 진짜 귀족은 아닐 거예요.”
이따금 길가나 선술집 근처에서 클로에가 아는 고티유 사교계의 인사들도 종종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모두 남성이라 놀랄 것도 없었지만. 애초에 사교클럽부터가 남성들의 전유 공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초입도 안 되는 가장자리에 위치한 물담배 바조차 클로에에게는 피해야 할 곳이었던 것이다.
“아우, 이 냄새 뭐야. 불났나?”
미라벨이 손을 들어 파닥파닥 부채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풍겨 오는 매캐한 냄새…… 클로에는 일전에 에티엔이 사교클럽에서 잔뜩 묻혀 온 냄새를 떠올렸다.
“여송연이네.”
“여송연?”
“저번에 에티엔이 꼭 이런 냄새를 묻혀 왔어. 말아서 피는 담밴데 서대륙에서 들여왔대. 보통 담배보다 냄새가 독하다더라고.”
클로에는 제가 알고 있는 여송연에 대한 정보 중 에티엔에게서 들은 것만을 잘 정제하여 말했다. 앞서 걸어가던 루시엔도 경청하려는 듯 걸음을 늦추고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침 그들이 지나치고 있던 건물에 비공인 사교클럽 하나가 있었다. 원로원에서 공인한 사교클럽을 모방하여 만든 곳으로, 지위가 한미한 이들이나 귀족들 틈에서 놀고 싶은 부유한 평민들, 또는 은밀한 작당을 하고픈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지금의 연기 또한 그쪽에서 풍겨 나오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이 독한 걸 뭐하러 피는 거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좋게 느껴지나 보지, 뭐.”
무인으로서 감각이 발달한 미라벨은 이 연기가 무척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눈물이 맺히는지 가면 밑으로 손수건을 넣어 콕콕 찍어 내기까지 했다.
‘그게 벌써 한 달 좀 넘은 일인데, 그사이 엄청 유행하고 있구나.’
사교클럽에서나 신기한 것으로 대우받는다던 것이, 길거리에까지 그 자취를 풍길 정도가 됐으니 말이었다. 과연 귀족들, 아니 귀족 남성들의 유흥가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났다.
“이렇게 풀을 찐 냄샌데 매캐한 게 여송연이라는 거군요?”
“네. 루비……도 처음 접하시나요?”
“저희 단주께서는 다른 상인들하고 어울리지 않으셔서요.”
루시엔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루시엔 대신 캄포 상단의 단주 행세를 하고 있는 그녀의 호위 기사 마르티노의 이야기였다.
지금껏 늘 얇은 갑옷 위로 로브를 입은 차림새였던 그는, 마치 제 주군의 가장무도회에 장단을 맞춰 주는 양 오리포네식 예복을 차려입고서 그녀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오리포네에는 아직 유행이 안 갔나 보죠?”
“글쎄요, 최근엔 간 일이 없어서…… 그런데 보통 서대륙 쪽에서 오는 것들은 아르투젠을 거쳐야 하니 유행이 조금 늦어요. 열대륙을 돌아서 올 수는 없으니까요. 운하는 도대체 언제나 만들는지 모르겠어요.”
“오리포네는 운하를 아직도 바라나요?”
대륙과 그 서남단에 달려 있는 열대륙과 이어지는 지협地峽에 운하를 건설하여 서해와 남해를 잇는 것은,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제후국들의 오랜 열망이었다. 특히 남대륙과 제국 연방 간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한 오리포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 목에 위치한 것이 또 다른 제후국 에티아와, 제국 연방이 아닌 군소 왕국 연합이었기에 그 열망은 수백 년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중재자가 되어야 할 아르투젠에는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까지 오리포네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뭐, 막연히 계속 바라는 거죠. 지금으로도 괜찮지만, 더 나아지면 좋겠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어요?”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이라고 적혀 있는 그 허름한 간판을 곁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리듯 답하던 루시엔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해서 오리포네 왕실이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고요.”
‘제 위치는 다른 맥락에 있어요. 아르투젠 황위 계승 서열 5위, 오리포네 쪽으로는 7위.’
클로에는 어느 날 오만한 듯도, 고압적인 듯도 보였던 루시엔의 말소리를 떠올렸다. 데메트리안과 정혼으로 얽혀 있는 캄포의 대공녀와 제게 호의를 베푸는 루시엔, 그리고 그날 보였던 그런 모습 중 어느 것이 그녀의 본모습일지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리도 모든 걸 다 잘 알고 능숙한 듯 굴던 그 역시……
‘아, 왜 또.’
생각이 그리로 흐르는 걸까. 클로에는 자괴감을 느끼며 다시 나아가기 시작한 일행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엥, 이건 조금 달달한 냄새인데.”
여송연 냄새에 코가 마비됐을 무렵, 미라벨이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 반대편에 있는 골목을 기웃대며 중얼거렸다.
미라벨이 킁킁대는 소리에 클로에도 따라 냄새를 살피며 그 골목에 시선을 던졌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 같기도 하고…… 거기에는 남대륙의 문자로 쓰여진 허름한 입간판이 하나 있었다.
“물담배……바?”
문자만 남대륙의 것이었지 제국어를 음차하여 적은 것이어서, 그 이름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슈바츠 거리’로 불리는 구역들의 흥성대는 불빛으로부터 반 블록쯤 떨어진 곳이었다.
“저긴가 봐! 네가 리도테 다닐 때 말했던.”
“그런가 보네.”
“물담배 바에 가 보셨어요?”
루시엔이 가면 너머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거기에는 성인인 저에 대한 아주 야트막한 동경심마저 담겨 있어서 클로에는 다소간의 부담을 느꼈다. 저는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 못 되니까…….
“아뇨, 전 가 보지 않았는데 리도테에 함께 다닌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어요.”
“어머, 정말요? 고티유의 영애들이요?”
루시엔의 호기심 너머에 자리한 고정관념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클로에는 속으로 작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루비도 나중에 고티유 사교계에서 활동하실 거라면 아르투젠 영애들에 대한 오해를 더는 편이 나을 거라니까요.”
“아. 역시 그럴까요.”
루시엔의 대꾸는, 지금껏 내던 또랑또랑한 목소리보다는 조금 힘을 뺀 목소리로 울렸다. 꾸며 두던 것을 조금 덜어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클로에는 제가 지금껏 루시엔을 만난 이후로, 가장 편안한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매장은 슈바츠 거리의 중심가인 진짜 슈바츠 거리에서 가장 화려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근처에는 카지노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는 펍,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비공인 사교클럽 같은 것들이 자리하여 제 나름으로 으리번쩍한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 초청장입니다.”
경매장 입구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용병들에게 양피지를 꺼내 보이며 마르티노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그의 말투에도 오리포네식 억양이 묻어나 있어서, 지금껏 그의 과묵함 덕에 알 일이 없었으나 그 역시 오리포네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님 대공녀처럼 잘 학습한 제국인인지도.’
그 양피지로 된 초대장의 진위를 가리려는지 용병들이 마도구인 듯한 납작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양피지의 앞면과 뒷면을 훑었다.
‘양피지면 제국 초기에까지나 쓰였을 건데. 향락의 왕국 시절을 모티브로 삼았나.’
어쩐지 입구도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에는 근처를 구경할 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체르바뇰식 모자를 써서 머리칼을 감춘 데다 가면을 쓴 덕에, 그 시선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의 맞은편. 클로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익숙한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무리 지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남들보다 반 뼘쯤 큰 키 덕에 어딜 가도 찾기 쉬운 그 머리통에, 그 지긋지긋한 아카데미 제복은 어디에 갔는지, 기사들과 같은 프록코트를 입고 있는 단단한 체격…….
‘엄마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클로에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마르티노의 뒤로 숨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못 알아봤겠지?’
클로에는 오늘 하루 종일, 사실은 평생 제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는 문제의 인물,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이쪽에서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