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2)
소매가 케이프처럼 내려오는 스체르바뇰식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뒤 머리칼을 말아서 그 모자 속에 넣으니, 가면을 쓰고 나면 정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듯했다.
클로에는 방에 놓인 거울에 제 옷매무새를 비춰 보며 셰비크에서 받았던 메리앤의 편지를 떠올렸다. 스체르바뇰과의 정략혼이 체결될 것 같다던 그녀의 마지막 소식…….
‘스칸다르만큼 추운 나라인데도 전통의상이 참 달라.’
스칸다르의 전통 예복을 입을 때면 클로에는 왠지 남의 옷을 입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밝은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들에게 어울리는 색조로 발달한 그 치렁치렁한 전통 복식이, 귤빛 머리칼 아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장밋빛 뺨을 자랑하는 귀비에게 어우러지기란 조금 낯선 일이었던 것이다.
“다 입으셨어요?”
그때쯤 루시엔의 유모, 키안티 백작부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짓에 두 사람의 마무리 단장을 돕던 니나와 젬마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가씨께서 매번 고티유에 오셔도 지인 한번 사귀는 법이 없으셨는데, 이렇게 두 분을 초대한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어요.”
클로에의 머리칼이 비어져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살피고 말레카식으로 땋아 내린 미라벨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는 키안티 백작부인의 손길에서, 클로에는 제 유모이자 미라벨의 어머니인 누아제트 남작부인을 떠올렸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아가씨들이 어떤 분들인지 저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저야 들려오는 소문이 있어서 대충 어떤 분들인지 추측하고 있지만요.”
“그렇다면……”
혹시 제가 누군지도 아시는 건가요, 클로에는 루시엔과 만나기로 하면서 잊기로 했던 얼굴이 반사적으로 떠올라, 스스로에게 작은 짜증마저 났다.
그녀의 낯에 떠오른 낭패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리가 없는 키안티 백작부인은 부드러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하신 분들이시라니 눈치채게 되었을 뿐이에요. 아가씨께서 본인이 고티유에 드나드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신 것처럼, 아가씨들께도 폐가 안 되길 바라시거든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대공녀께서 워낙에 야무진 분이시기도 하고, 배려심도 깊으셔서.”
“생각은 혼자서만 다 하고 계셔서 남들에겐 조금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앞으로 고티유 사교계에 적응도 하고 제국 예법도 익히셔야 할 텐데…… 유모라서 그런지 늘 걱정만 많네요.”
키안티 백작부인이 스스로 주책이라는 양,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제가 모시는 아가씨의 괴팍한 장난에 클로에와 미라벨이 놀아나는 건 아닌지 싶어서, 괜한 어른의 마음으로 한마디 보태러 온 거였다. 게다가 고티유의 사교계에서 발이 넓은 라크루아의 영애에게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려고.
그런 마음 씀씀이에서 클로에는 다시금 저를 걱정해 주는 어른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누아제트 남작부인과 마담 에투알, 심지어는 크레벨 공작부인까지…….
루시엔에 대한 키안티 백작부인의 애정에서, 클로에는 그녀들이 제게 주는 사랑과 신뢰를 떠올렸다. 거기서 느껴지는 친근함에 클로에는 저만 믿으라는 양 웃어 보이고 말았다.
“참,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식사로 스튜를 내려고 하는데. 오리포네식 생선 스튜랑 캄포식 소고기 스튜 중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식사요?”
“네, 아가씨 지인들께서 만찬에 참석하신다고 아침부터 주방이 얼마나 신났는데요.”
“네?”
“정말요?”
깜짝 놀라 되묻는 클로에의 낯을, 미라벨이 정말 그렇냐는 듯 살폈다.
그러니까 루시엔은, 애초에 만찬까지 함께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반응에서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았다는 듯, 키안티 백작부인이 어색한 미소로 마침표를 지었다.
“이렇게 저희 아가씨가 혼자 생각하신 대로 행동하시는 경우가 많답니다. 일단 식당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키안티 백작부인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 들어서자, 상석에 앉아 장부 같은 것을 뒤적이고 있던 루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이 만찬에 대해 언급을 잊은 것은 생각도 못하는지, 그 얼굴에는 일말의 민망한 기색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옷은 잘 맞으시나요?”
“루비 대공녀께서 눈썰미가 좋으신 것 같아요. 제가 여자치고는 큰 편인데 치마 길이가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요?”
미라벨이 치맛자락을 잡고서 휘휘 돌려 보이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말레카식 드레스처럼 상의와 하의가 나뉜 드레스는 활동성이 좋아 보인다며 그녀가 마담 에투알을 볼 때마다 탐내던 것이었다.
루시엔은 예의 그 영업용 미소를 지었지만, 키안티 백작부인의 말을 듣고 난 뒤여서인지 클로에는 거기에 뭔가 흡족한 기색 같은 게 비치는 것 같았다. 거기서 떠오르는 것은, 매번 입매와 표정을 새침하게 갈무리하곤 하는 저의 모습…….
그럼에도 미라벨처럼 살갑게 루비라느니 뭐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어 좀 멋쩍어진 클로에는 하릴없이 식당 곳곳에 장식된 것들에 시선을 던졌다.
식당의 넓이는 저택의 크기에 비례해 소박했지만, 그 안에 꾸려진 것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대리석으로 상판을 댄 식탁이며 벽에 장식된 것들, 마정석 촛대 같은 것들…….
그러던 클로에는, 제 자리를 찾아가는 길목에 걸린 태피스트리에 시선을 뺏겼다. 다양한 과일을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했고 그 짜임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남대륙산이에요. 몇 년 전부터 오리포네에서는 남대륙산 태피스트리가 유행이거든요. 만져 보셔도 돼요. 입체적으로 직조돼 있어서 촉각적으로도 즐길 수 있답니다.”
상석에 앉은 루시엔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제가 무엇을 궁금해할지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루시엔이 말하는 대로 조심스레 태피스트리를 쓸어 보았더니, 정말로 패션프루츠나 용과 등 더운 지방의 과일들이 그에 걸맞은 질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 이 램프는.”
“맞아요, 열熱대륙에서 온 거고요.”
“열대륙과 오리포네는 거리가 꽤 있지 않나요?”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는 아차 싶었다. 캄포 대공의 금지옥엽이며 그 영지의 상단을 운영 중인 그녀에게 구하기 어려운 게 무엇 있으랴.
다만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제가 실은 스물다섯 해를 산 것까지 치면 저보다 10년은 덜 살았을 그녀가 저보다 더 식견이 넓은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루시엔은 장부를 덮으며 빙긋이 웃었다.
“잘 몰라도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탐나기 마련이니까요.”
“아름답다고요? 열대륙 것들이?”
“뭐, 나름대로요?”
열대륙은 동해를 끼고 있는 라쥐르령 남쪽 아래에 혹처럼 달려 있는 뜨겁고 사막이 많은 큰 반도를 칭하는 말이었다. 제국 연방에 속한 에티아와 키로스, 그리고 연방 바깥의 군소 왕국 연합이 거기에 자리해 있었다. 라쥐르의 공녀였던 궁정백부인의 취향은 대부분 그곳에서 비롯했고, 덩달아 그곳의 문화를 클로에도 어느 정도 잘 알았지만…… 그것이 심미적으로 아름답냐고 묻느냐면, 클로에는 전혀 긍정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아름답다기보다, 독특한 편이지. 솔직히 기괴하고…….’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시엔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라크루아 궁정백부인께서 라쥐르 출신이셔서 열대륙 문화에 조예가 깊으시다고 들었어요.”
“……정말 정보상 운영 안 하시는 거, 맞죠?”
루시엔이 후후 웃으며 니나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저택의 규모가 하녀를 여럿 둘 것도 없이 작아, 치장 일을 돕던 그녀가 식당 일도 돕고 있었다.
“그냥, 영애께서 어떤 분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고…… 들려오는 말도 많았고요.”
클로에도 마주 웃어 보였지만…… 그 속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제가 그녀를 어렵게 여기는 이유, 그녀가 제게 흥미를 갖는 이유, 그리고 제가 결국 그녀에게 마음을 열기로 한 이유까지…… 그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아아, 싫다, 정말…….’
클로에는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조금 거친 손길로 손을 닦아 내었다. 그러는 양을 바라보는 루시엔은 여전히 낯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였다.
‘이 조각상은 열대륙 신화를 모티브로 한 거군요?’
‘그래? 맞나요, 아버지?’
‘데메트리안이 이 집에 사는 올리비에보다 더 잘 아는구나?’
‘대공자께서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저도 로이네…… 라크루아 궁정백저에서 꼭 이런 걸 본 것 같아서요.’
‘아아, 그렇지. 아녜스가 열대륙 것들에 미친 적이 있었지.’
정보상이랄 것이 뭐가 필요할까. 직접 교류한 적 없어도 한두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사이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식사까지 하면 경매에 늦는 건 아닌가요?”
식사 자리에 초대하시는 건 줄 몰랐어요, 클로에가 말을 돌리듯 재빨리 물었다. 강렬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빠져나온 루시엔이 다시금 특유의 야무진 미소를 입에 걸었다.
“본 경매는 20시에 시작돼요. 말씀드린 19시에 시작하는 건 사전 경매라고, 몸풀기 같은 거거든요.”
정말로, 처음부터 여기로 오라고 하지…… 알 만하다가도 모르겠는 아가씨였다.
“입맛에 맞으세요?”
“네, 그럼요. 캄포식 소고기 스튜는 처음인데……”
제가 메인디시로 주문한 캄포식 소고기 스튜를 접한 클로에는 꽤나 놀랐다. 수프가 자작하다는 점만 달랐을 뿐, 거기에 들어간 식재료며 그 풍미가 스칸다르에서 먹던 것과 흡사했던 것이었다. 국물을 더 조린 만큼 캄포의 것이 간이 세기는 했지만.
‘소고기 스튜 하니까 셰비크에서 먹던 게 떠올라서 별생각 없이 달라고 해 본 건데, 이렇게 비슷할 줄이야?’
고티유와 라쥐르에서 풍부한 식재료를 즐기며 살아가던 클로에에게 자급 식량이 부족한 스칸다르의 식문화는 일종의 재앙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추운 겨울에 먹던 소고기 스튜 같은 것들은 일종의 향수를 자아냈던 것이다.
그 감동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친근하게 말을 내뱉었다.
“캄포에도 소고기 스튜가 있는 줄 몰랐어요.”
“또 어디에서 소고기 스튜를 먹나요?”
“스칸다르에도 소고기 스튜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클로에가 예의 바른 미소를 덧붙인 그 말소리를 들으며 미라벨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 그럴 만도 하죠. 스칸다르랑 캄포가 붙어 있으니.”
“역시 그렇죠?”
칭제 이전의 왕국 시절부터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칸다르와 캄포는 참으로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스칸다르는 제국에 복속되고도 캄포에게 축복을 내린 주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고. 바로 붙어 있는 캄포와 교류를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제국과의 연도 희박해졌다.
‘그럼에도 생활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건가?’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상함을 사지 않을 선에서 제 궁금증을 입에 올렸다.
“그럼 혹시, 캄포도 감자를 많이 먹나요?”
“감자요?”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스칸다르가 고산지대에 있다 보니 야채가 많이 나지 않아서 감자를 많이 먹는다고 들어서요.”
“아, 아마 접경지대라면 그럴 거예요. 하지만 캄포는 아무래도 천혜의 캄포니까…… 감자가 아니어도 먹을 게 많죠.”
그러고 보면 제국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영토였으니 스칸다르와는 자못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클로에는 쉽게 납득했지만, 질문받을 일이 없었던 영역에 대해 새삼 고민하기 시작한 루시엔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곰베르 산맥 근처는 식문화가 비슷할 것 같네요. 그쪽은 사냥도 여의치 않아서 고기 스튜를 끓여도 스칸다르처럼 국물을 많이 내서 만든다고 들었어요.”
“곰베르 산맥에는 야생동물이 많지 않나요? 식용으로 해체할 수 있는 몬스터도……”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는, 제가 그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을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거기 야생동물은 대부분 모피 산업에 이용되죠.”
그러면서 클로에는 습관처럼 스튜에 담긴 고기 조각을 포크로 높이 들어 올렸다. 국물이 많이 들어간 스칸다르식 소고기 스튜를 먹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런 클로에의 양을 살펴보던 루시엔은, 오물대던 입을 멈추고 넌지시 말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영애께선 정말 식견이 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