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1)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죠?”
예의 그 육중하고 새까만 마차 문이 열리자, 지금껏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차려입은 루시엔이 방긋 웃고 있었다.
아이펠 장원에서 돌아온 그날 밤 클로에는 곧바로 루시엔에게 답신을 썼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바로 만나자는 서신이 전해져 온 것이었다.
「이번 주 바람의 날이 마침 정기 경매일이네요. 19시에 시작이니 제가 17시쯤에 댁으로 모시러 갈게요. 다들 화려하게 차려입고 오는 곳이니 드레스를 입고 오시면 되겠어요.」
클로에는 마차 안에 들어앉아 있는 루시엔의 모습을 살폈다. 지금껏 봐 온 모습은 늘 제 호위 기사의 종자인 척하느라 바지에 로브를 입고 머리칼을 후드 속으로 숨긴 모습이었는데……
“어머, 대공녀님. 이건 오리포네식 드레스인가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
“누아제트 남작가의 미라벨이에요.”
“네. 루시엔이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는데…….”
“전 철의 날에 태어났어요.”
“그럼 페리라고 부를까요?”
클로에가 루시엔과 상징석을 활용한 별명이랄지 애칭이랄지 뭐 그런 비슷한 것을 암호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서 하는 말에, 루시엔이 퍽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철의 날에 태어난 미라벨의 수호 사도 리도테의 상징석이 페리도트였던 것이다.
이제껏 루시엔과 마주칠 때면 통성명은커녕 클로에의 뒤에서 인상만 쓰고 있던 미라벨은 전에 없이 살갑게 루시엔을 대했다.
클로에가 아직 명확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데미 공자랑 뭔가 안 좋게 틀어졌고, 그 반대급부로 루시엔과 친교를 맺어 보기로 결심한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는 판을 깔아 줘도……’
미라벨은 아이펠의 마장에 갔을 때 저 혼자 위태로우리만치 거칠게 말을 몰아 돌아온 클로에를 떠올렸다. 무슨 사달이 났었는지 승마 모자도 잊고 온 탓에, 그 머리칼이 그녀가 가른 바람에 흩날려 부스스해져 있었다.
이미 눈물이 다 날아가 마른 상태였지만 새빨개진 흰자위에서 미라벨은 클로에가 울었음을 알았다.
‘솔직하게만 말하면 되는 걸, 도대체 무슨 삽질을 했길래.’
그 바보 같은 데미 공자와의 관계가 어찌 됐건, 미라벨은 클로에가 루시엔과 친해지는 것에 대찬성이었다. 맹랑한 눈빛의 대공녀에게는 클로에가 주저하는 부분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저 호위도 셀 것 같고 말야.’
마부 겸 호위 기사로서, 지금 마차 밖에서 말을 몰고 있는 마르티노를 떠올리며 미라벨은 속으로 히힛 웃었다.
“흥미로운 일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매번 혼자 가서 심심했거든요. 부디 재미있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리 입고 가셔도 괜찮은가요?”
클로에가 루시엔의 옷차림을 훑으며 물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거기에 쓰인 원단이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고급스러워서, 오리포네의 복식에 무지한 제국인이라도 그녀의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을 듯했다.
활동성을 강조한 것인지 소매 통도 넓고 가슴 바로 아래에서 한번 리본 끈으로 묶인 채 보정속옷 없이 자연스레 떨어지는 그 드레스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상업에 종사하고 배를 탄다는 오리포네의 실용적이고도 자유로운 문화가 배어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늘 로브 속에 넣거나 틀어 묶어서 후드로 가렸던 청남색의 머리칼이 향유를 머금고서 밤바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캄포의 대공녀께는 지금 아르투젠 제국 연방에서 가장 고귀한 아가씨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루시엔은 클로에가 건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듣고는 후후 웃었다.
“우리, 돈 쓰러 가는 거잖아요.”
루시엔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의자 밑에서 나무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러는 양을 보는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얼마 전 선물 받을 뻔했던 그 마차를 떠올리고 말았다. 수납공간이 참 잘 갖춰져 있던 바로 그 마차.
[크레벨 소공작께서 영애님께 선물하시려고 마차 하나를 제작하셨어요. 사무실 건물 뒤 공지에 간이 마구간을 설치해 두셨더라고요. 타고 오신 마차를 여기에 보관하고 말만 옮겨 매시게끔요. 그 마차가 사실은 제 야심 기술을 활용해서……]
제가 그와 함께 호숫가에 버려두고 떠나 온 그 마차의 행방에 대해서는, 그날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 조금 들뜬 라구의 목소리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벌써 며칠은 된 일이었고, 그사이 라이언을 통해 라구에게 작업할 보석을 전달할 일도 있었지만 클로에 자신은 그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잊어 두면 되겠지.
하지만 이따금 지금처럼, 의도하지 않았던 틈에서 그때의 기억과 감정과 그의 얼굴 같은 것들이…… 마치 밤의 방파제를 흘끔대는 파도처럼 엄습하곤 했다.
‘뭘 바랐던 건지. 바보같이…….’
울적해지는 마음을 건져 올리려, 클로에는 작게 도리질하며 상자를 여는 루시엔의 손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쪽 벨벳이 덧대어진 상자에서 나온 것은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가면들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가면 쓰면 다 똑같은걸요.”
그 말에 동조하듯, 상자 안에서 등장한 네 개의 가면은 모두 같은 무늬에 색깔만 변주된 것이었다.
“가면을 쓰고 입장해야 하나요?”
“규칙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래야 해요. 경매장은 합법이지만 경매에 부칠 만한 물품들은 대부분 탈법적인 것들이어서요.”
“경매장에 드나드는 게 밝혀지면 안 좋은 일인가요?”
루시엔의 말에 미라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귀족 영애의 소양에 언급되지 않은 돈벌이를 시작이야 하셨다만, 제 젖자매의 보수적인 성향이 어디 안 갈 것이 자명해서였다.
그 말을 듣는 루시엔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누구를 향한 것일지 모를 그 표정은…… 마치 고티유에 오지만 황궁에는 들르지 않는다고 말할 때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랑이겠죠. 경매장에서 쓸 재력이나 거기 입장권을 구해 주는 인맥이 인생의 자랑인 자들 말이에요. 하지만 우린…… 잃을 게 많잖아요?”
생긋, 루시엔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르투젠의 풍속이란 모두 고루한 것인 듯 굴던 그녀에게도 비슷한 종류의 고민이 유효했던 것일까. 클로에는 마음의 거리가 조금 좁혀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귀족이 아닌데도 귀족인 것처럼 꾸려 입은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들 덕분에 아마 저희도 언뜻 보면 평민 부호 정도로 보일 수 있고요.”
“아, 그래서 드레스를 챙겨 입고 오라고 하셨군요. 그런데 대공녀께서는……”
“제국식 드레스가 없는 건 아니에요. 다만 다다음주 탄신연 때문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만큼, 녹아들기 편하겠다 싶기도 해서요. 아르투젠 여인이 가면을 쓰고 있으면 누굴까 살피겠지만, 아예 다른 나라 사람이면 외국인이구나 하고 마니까요.”
루시엔이 다시금 생긋 웃었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의 시선이 절로 제 옷차림으로 향했다. 드레스를 입고 오라는 말에, 봄이 오기 전에 맞춰 놓은 것 중 아무거나 골라잡아 입고 온 것이었는데…… 진짜 스무 살이었던 클로에가 지금의 유행에 맞춰서 지어 놓았지만, 지금의 클로에는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선보일 일이 없던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만으로 나를 알아볼 수야 없겠지만…… 가면을 쓴대도 안드레아의 드레스를 알아볼 사람도 있을 테고, 내 머리칼도 티 날 수 있고……’
저를 보자마자 안드레아 이름을 주워섬겼던 라이언과의 날카로운 추억이 뇌리에 스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눈썰미를 가졌을 정도로 사교계의 패션에 관심 많은 사람이 경매장에 나타날 확률은 극히 낮겠지만…….
그런 걱정에 클로에의 낯이 조금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그녀의 안색을 기민하게 살피던 루시엔이 속살거리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두 분도 아예 다른 옷을 입으시면 마음이 편하실까 싶어, 다른 옷을 좀 준비하긴 했는데…… 필요하시다면 제 거처로 모셔도 괜찮을까요?”
루시엔이 인도한 곳은 다행히 캄포 대공가의 타운하우스가 아니라, 혼자 왔을 때 머무르곤 한다는 그녀 소유의 저택이었다. 스칸다르의 왕실저가 있는 호이제르 거리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그 저택은 스칸다르 왕실저처럼 담장이 높았지만, 정원이며 뒷마당도 그 건물의 용적에 어울릴 규모로 마련돼 있었고 그 외관도 주변의 여느 저택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는 호화로웠다.
사저의 정원에 내려선 클로에는…… 발을 뺄 수도 없이 루시엔과 가까워져 버리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아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스무 살로 돌아왔더니 상상도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아가씨, 오셨어요? 아가씨들께서 그……”
“응, 맞아. 그분들이셔.”
갈색 머리칼을 높게 틀어서 묶은 30대 후반 정도의 여인이 그녀들을 맞이했다. 제국식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 말씨에서 오리포네 억양이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리포네의 키안티 백작을 남편으로 둔 아가씨의 유모 로사라고 합니다. 아가씨가 지인분들을 데려오시는 건 처음이라 제가 다 설레네요.”
“유모도, 참. 주책 떨지 말고 아가씨들 안내나 해 드려.”
“후후, 따라오세요.”
키안티 백작부인이 클로에와 미라벨에게 너스레를 떨자, 늘 잘 꾸며 둔 표정만 내보이던 루시엔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클로에는 그걸 보면서 다시금, 그녀가 제 동생인 아쉴의 또래임을 떠올렸다.
“니나, 젬마, 아가씨 손님들 오셨단다. 준비해 놓은 것들 기억하지?”
“네, 부인.”
“어서 오세요.”
클로에와 미라벨이 안내된 곳은 2층에 있는 손님방에 딸린 드레스룸이었다. 아무리 봐도 손님이 드나들 저택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 안에는 그녀들을 위해 갖다 놓았을 것이 자명한 몇 가지 다양한 양식의 드레스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께는 이 스체르바뇰식 드레스를 드리라고 하셨어요. 꼭 모자를 써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머리 색만으로도 아가씨를 알아볼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고요.”
니나라는 하녀가 스체르바뇰식의 모자가 담긴 상자를 열어 보였다. 먼 북방의 스체르바뇰에서는 추위를 덜기 위해 모자와 함께 천으로 뒤통수를 감싸던 것이 그 고유의 양식이 되어서, 챙 없는 모자 뒤에 달린 흐늘흐늘한 천 속에 머리칼을 말아 넣어 묶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준비를 다 해 놓은 거면 애초에 저택으로 초대를 하지…… 참 주도면밀도 했다.
‘그랬다면 내가 꺼렸을 걸 안 거겠지.’
그녀의 배려랄지, 치밀함이랄지. 클로에는 니나의 손길에 몸을 내맡겨 드레스에 몸을 꿰면서, 루시엔의 저택에 당도했을 때에 느낀 그 아찔함에 다시금 몸을 내맡기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