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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83화 (83/189)

83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8)

“나는…… 스칸다르의 왕자와 결혼했었어. 그렇지?”

여지껏 제 손의 열기를 피하던 그녀의 손이 제 손을 얽어맸다는 설렘도 잠시, 데메트리안은 그저 그렇게 붙박여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상상도 못한 것처럼, 그는 간신히 말 비슷한 것을 입 밖으로 흘려내었다.

“뭐……라고?”

“내후년에 말야.”

제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얼어붙는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클로에는 예기치 못했던 불안을 느끼며 입안에서 작은 말들을 세심히 골랐다.

미라벨에게는 쉬웠던 것이 어째서 이리도 조심스러운 걸까.

미라벨은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고, ‘그때’에나 지금에나 변함없는 이였으니까. 그때건 지금이건 스물한 살의 미라벨은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반면 데메트리안은, 그는…… 저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와 다른 선택을 했고, 그때와 다른 방식으로 저를 대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반응에, 클로에는 쥐어짰던 용기가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아닌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클로에는 절박한 마음으로 제가 잡은 그의 손을 꾸욱 눌렀다. 제가 오래간 그리워해 온 데메트리안의 모습, 그리고 그로부터 너무나도 달라진 지금의 그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아니지 않다. 맞는 일이었다.

“너도 알잖아, 그렇지……?”

데메트리안의 눈빛에 끝없는 혼란이 맺혔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피어나는 불안감…… 답을 채근하듯 클로에가 그의 깍지 낀 손을 흔들었다.

“데미, 응?”

마치 도망치듯,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는 양에 그녀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클로에의 눈이 그날처럼 빛났다.

‘숨겨 둔 정인이 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인데……’

데메트리안은 그 눈빛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를 잃었다는 것을 새로이 깨우치던 그 모든 순간, 제 마음은 기억 속 그 눈빛에 난도질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마다 그는 저 스스로를 비난했고, 그래서 데메트리안은 지금도 클로에의 눈빛에 어떤 힐난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나를 안 잡지 않았느냐고. 너는 지금도 이렇다 할 대책이 없지 않느냐고.

그것은 기실 데메트리안이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캄포와의 정혼이 ‘맹세’인 것을 잊었었음을 깨달은 그날부터……

그녀를 잃는 것보다 그것들을 잃는 편이 더 낫다. 그렇게 데메트리안은 다짐했었다.

하지만 거기에 이런 계산은 없었다.

클로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계산.

저의 무력함을, 저의 무능함을, 저의 무책임함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계산……

스물셋, 아니,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데메트리안은 이토록 제가 한심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 자괴감을 담아 그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탁자 모서리 끝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말소리.

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시선과, 제가 지켜보고 있던 그의 낯에 스쳐 간 수많은 미세한 감정들에서 클로에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 제가 지금껏 외면했듯 그도 그럴 수 있지. 작은 실망이 드는 것을 뒤로하고 클로에는 채근하듯 다시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왜, 대축일 주간 무도회 다음날, 네가 새벽같이 왔던 그날.”

“…….”

“네가 그런 시간에 나를 만나러 올 리가 없잖아. 대축일에도, 대축연 날에도……”

그가 달라진 것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었지만…… 무엇이 어땠고 무엇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이제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오기가 생긴 클로에는 그가 달라졌음을 확신했던 순간들을 하나둘씩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가지, 한 가지를 꼽을 때마다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번번이 더 깊은 고통이 흘렀다. 잡아떼자니 말이 안 되었고, 인정하자니 비참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의 살을 슬며시 씹던 데메트리안은 자복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스스로에게 화난 그의 말소리는 예기치 못하게 날카로이 울렸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뭐?”

클로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데메트리안이 제게 줄곧 다정히 굴었고, 그의 다정함을 이제 좀 받아들여 볼까 싶었고, 그래서 그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가 이토록 날카롭게 나오는 것은 클로에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의 표정은, 말투는, 그래, 미세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건 화내는 법이 없었고, 실망하는 일도 짜증 내는 일도 없었다. 그에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는 이가 없었으니까.

클로에에게만은 소년처럼 웃기도 했고, 개구쟁이처럼 농지거리를 하기도 했고, 이따금 빈정대거나 깐족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녀조차, 그가 이리도 서늘히 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왜……?

“왜 이제야 말하냐니.”

“계속 알고…… 있었던 거야?”

“확신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네가 너무 달라졌잖아.”

클로에는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의 손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그럼 너는 그걸 다 기억하고도……”

그러고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 왕자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던 거니.

목 끝까지 올라왔던 그 창피한 말을 데메트리안은 꾹 눌러 담았다. 실패를 떠안고 있는 제게 그런 모자란 마음마저 있음을 들킬 순 없어서.

“그랬다면 말했어야지.”

“……그걸 내가 어떻게 말해?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클로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뭔가가 달라질 거란 기대를 품고 고민 끝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는 늘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분명 어떤 생각이 있을 것 같아서. 뭔가 계산이 섰기에 이런 기행도 벌이는 것이 분명해서.

그래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며 계획이란 것이 궁금했다. 그는 늘 제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땐 그 신념이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기에 제 절박한 눈빛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이제는 어떤 확신이 들었기에 저와, 제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쓰고 유무형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저와 마주한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뭔가 음습한 취미를 들킨 사람처럼 굴 뿐.

‘그럼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그랬던 거야? 내가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 남은 2년 대충 즐기려고?’

설마…… 아주 작게 일었던 희망 뒷면에는 훨씬 큰 실망이 비쳤다. 그 무게추가 심해로 떠내려가는 것을 부여잡는 심정으로 클로에는 간신히 말을 짜냈다.

“무슨 생각이 있었던 거지, 데미?”

“그건……”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클로에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그 너머 어딘가를 불안하게 헤맸다.

클로에는 제가 살면서 그의 낯에서 이런 자신감 없는 기색을 읽을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 능숙했고, 모든 것을 잘 알았고, 그 모든 이유로 인해 여유로웠으니까.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치는 제가 얼마나 무능해 보일지가 두려웠기에……

저는 어쨌건, 그녀를 잃고 말았던 자니까.

제 인생의 가장 큰 허물을 제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이에게 들켜 버린 느낌이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얼굴 근처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 모든 기색에서 클로에는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가 피하고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정수리에 피가 확, 몰렸다. 창피해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클로에는 이미 그의 손에서 떨어졌던 제 손을 거두며 벌떡 일어났다. 주저하며 들어 올린 데메트리안의 시선 끝에는 그 모든 감정을 담아 붉어져 있는 클로에의 눈시울이 들어왔다.

“……비겁하게.”

이를 갈듯이 내뱉는 그 말에, 데메트리안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마주했던 미라벨의 노란 눈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거기에, 수만 가지 감정이 담긴 낯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클로에의 울먹임까지……

‘그날’ 이후로, 몇 번이고 봤던, 볼 때마다 가슴 철렁이던 그 기색. 데메트리안은 그제야 제가 뭐에 홀린 듯 부적절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이, 그게 아니라.”

“넌 항상 그런 식이지.”

퍽, 그를 씩씩대며 한참 동안 노려보고만 있던 클로에가 손을 휘둘러 문에 달린 버튼을 쳤다. 라구가 마도구에 기계공학을 접목하여 고안한 자동문이 야속하리만치 태연한 속도로 열렸다. 그 가느다란 주먹이, 화가 난 마음이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어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참담해졌다.

“그러니까…….”

무너져내리는 듯한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노려보고서, 거기에 동정심 비슷한 것이 생기기 전에 클로에는 훌쩍 나가 버렸다. 그의 도움도, 문이 열리며 함께 나온 발 받침대도 필요하지 않았다.

“로이, 잠깐만. 내가 미안.”

데메트리안이 급히 따라 나오며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화난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뎌 이미 마차 앞으로 간 뒤였다.

그녀의 거침없는 손길이 제가 타고 왔던 갈색 말에 매였던 것을 엉망으로 풀어헤쳤다. 묶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리고 제대로 푸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저 벗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렇지 않았다.

푸르륵, 놀란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에 따라 나온 데메트리안은 또 가슴이 철렁이는 것 같았다.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아니 그에게 뭐라도 쏘아붙이고 싶었던 것처럼 클로에는 말 너머에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한창 차올랐던 눈물이 끝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어느 날처럼.

투둑, 마구에 걸어 두었던 죔쇠가 클로에의 손에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것이 클로에가 제게 걸었던 마지막 기대…… 같은 거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말 너머에서 데메트리안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실망과 비참함 등등이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혼자 생각해 놓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야 움직이는 거.”

“로이. 내 말 좀 들어 봐.”

“지금까지 너한테 절박한 건 하나도 없었지?”

“…….”

그러는 사이, 마부석에 두었던 안장이 어느새 말의 등허리에 매여 있었다. 무엇을 쉽게 익히는 것은, 데메트리안만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진짜 싫다…… 데메트리안 크레벨.”

한참 노려보고 있던 그의 낯에서 시선을 거두고, 클로에는 훌쩍 말에 올라타 순식간에 떠나가 버렸다. 데메트리안은 망연히 그 뒷모습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방울져 내리던 눈물이 가슴 아팠고, 저리도 매섭게 말을 몰다가 다칠까 걱정스러웠고, 또 이리 망치고 말아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데메트리안은 실망했다.

그는 클로에의 뒷모습이 사라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게 절박한 게 하나도 없었다니. 제가 얼마나…… 얼마나 큰 후회를 통해 이 기회를 얻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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