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82화 (82/189)

82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7)

사과주를 한 병 다 비울 때까지 두 사람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탄신연에 입고 갈 드레스를 맞춘 이야기, 크레벨 공작저에도 재단사들이 다녀갔다는 이야기, 이번 50세연을 위해 특별히 제작될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 슬슬 속속 도착할 각 나라의 사신들에 관한 이야기…….

그들의 달라진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은 미래에도 별 중요치 않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데메트리안이 가져왔다는 마차의 정체는, 해가 기울어 풍경이 금빛으로 물들 때쯤에야 알 수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가 보니 그가 말을 묶어 두고 왔다는 곳에 크레벨의 마차처럼 딱딱한 모양새지만 아무 문장도 달려 있지 않은 마차가 서 있었던 것이었다. 웬 영문인가 싶어 살폈더니, 그 앞에 묶여 있는 것이 그들이 여기까지 타고 온 말들이었다.

“아아, 여기에 갖다 뒀었구나. 마부는 어딨고? 네가 몰게?”

“으음, 뭐어.”

데메트리안이 어색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사실 그 답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데메트리안은 무엇이든 잘했고, 손수 말을 마차에 매어 놓았듯 마차도 잘 몰 거였다.

하지만 다시금 멋쩍어진 데메트리안은 이마를 슬쩍 긁더니, 결의에 찬 발걸음을 내디뎌 마차의 문 앞에 섰다.

“한번 볼래?”

“그러고 보니 새것 같다? 새로 맞췄어?”

데메트리안은 별 대꾸하지 않고 손잡이 부분에 달린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그러고서는 재빨리, 클로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초에 차체가 그리 높지 않은 마차였다. 게다가 무슨 원리인지 문이 열리는 것에 맞추어 발 받침대가 나왔기에 그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았고.

하지만 이건 그에게 일종의 의식이었고…… 그런 열망이, 자잘한 습기가 맺힌 그의 손바닥에 배어나는 것 같아 클로에는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른 척하고 쏠랑 올라탈 수도, 그의 손을 무작정 잡을 수도 없었다.

“한번 안에 들어가 봐.”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재촉하듯, 데메트리안의 손이 한번 까딱였다.

그래, 별것 아닌 일이었다. 마차에 타거나 거기서 내리기 위해 그의 손에 의지한 것은 살면서, 스무 살로 돌아오기 전과 후를 다 합쳐 수십, 수백 번은 더 한 일이니까.

클로에는 그의 손에 슬며시 제 손을 얹은 채 발 받침대를 한번 딛고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갓 제작된 것인지, 마차 안에서는 새 가죽 냄새가 났다. 클로에가 평소에 타고 다니는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보다 넓어서, 장정들만 탄대도 네 사람은 너끈히 탈 수 있는 크기였다. 루시엔의 마차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마차의 내부 구조에 관심이 생긴 클로에는 꼼꼼하게 이곳저곳을 살폈다.

“앉아 봐.”

그의 손짓에 따라 클로에가 뒤쪽에 앉자, 데메트리안이 앞쪽의 의자를 열었다. 좌석이 가운데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양옆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한쪽에는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태가 미려한 다구가 들어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텅 비어 있었다. 데메트리안이 피크닉 바구니를 그곳에 넣자 제자리인 듯 꽉 들어찼다.

“왜 두 군데로 나뉘어 있어? 흔들리지 말라고?”

“저쪽엔 보온 기능이 있고, 이쪽엔 보냉 기능이 있어. 오며 가며 요깃거리도 보관할 수 있도록.”

“어머.”

깜짝 놀란 클로에가 손을 뻗어 그 안에 손을 넣어 보았다. 그의 말대로 한쪽에선 온기가, 다른 한쪽에선 냉기가 느껴졌다.

“이런 기능도 되는구나.”

루시엔의 마차에서도 느꼈지만, 일하는 이들을 위해 마차의 구조도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 모양이었다. 부러움을 담아 클로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데메트리안은, 의자를 닫고 그쪽에 들어앉은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거 봐 봐.”

클로에의 발치에 있는 페달을 밟자, 차창 아래에 붙어 있던 상판이 올라와 탁자가 되었다. 루시엔의 마차에서처럼 양옆에서 상판이 올라와 맞물리며 마차를 가득 채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 쓰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여기를 누르면.”

데메트리안은 창틀 아래쪽으로 쪼로록 붙은 나무 단추 같은 것들을 하나씩 눌러 보였다. 하나는 내부 전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은은한 조명을 만들어냈고, 다른 하나는 책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좁은 범위의 조명을 켰다. 상판 하부와 마부 쪽 쪽창 옆에 달린 비밀 서랍 공간을 여는 것도 있었다.

“와, 신기하네.”

어느 서랍 안에는 만년필이 들어가 있었고, 어느 공간에는 장부 같은 것들이, 또 어느 서랍 안에는 페이퍼 나이프와 같은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이야아.”

데메트리안이 보여주는 하나하나에 경탄하던 클로에의 머릿속에 문득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자랑하는 건가……?’

그렇게, 클로에가 조금씩 건성으로 대꾸할 무렵이었다.

“선물이야.”

“좋네. ……뭐?”

저도 모르게 집중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던 클로에가, 화들짝 놀랐다.

“이 마차.”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있던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제 맞은편의 데메트리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간이 탁자 위로 양손을 깍지 껴 올려 둔 그는,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

“네 종자인 그 소년이 네게 필요할 거라고 하더라고. 거기서 알게 된 상인의 마차에 꽤 기능이 많다면서.”

“아, 그 마차……”

대번에 떠오르고 만 루시엔의 얼굴. 저와 친분을 갖길 원하는 캄포의 대공녀, 크레벨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캄포의 대공녀.

‘데미는 행복했었을까.’

몇 주를 묵힌 그 질문이 다시금 클로에의 목구멍에서 간질거렸다.

꿀꺽, 클로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그렇지, 왜 이런 걸……”

“그냥. 네 성년식 때에 별달리 해 준 것도 없고 말야.”

“그건……”

우리가 서로 뭘 해 줄 사이가 아니니까.

클로에는 테이블 아래로 맞잡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스무 살의 생일, 제 기억으로는 6년 전의 생일. 지금으로 따지면 반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여느 생일 때처럼 고티유에 남아 있는 사교계의 지인들을 불러 만찬회로 꾸린 그 자리에서, 크레벨 소공작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자리에 앉아 특별할 것 없는 선물을 주었다.

거기에는 크레벨 온실의 꽃도 없었고, 큰 의미도 없었다. 클로에의 수호 사도, 베람의 상징석인 앰버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물론 데메트리안 크레벨과 친밀한 영애는 클로에가 유일했으니 그가 여성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부터가 특별하긴 했지만.

“네가 흥미를 갖고 바깥일을 하는 게 처음이잖아. 나야 아버지가 하시는 일 배우는 거지만, 너는 네가 직접 하나씩 헤쳐나가는 거고. 훨씬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기왕이면 더 즐겁고 편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지금 하려는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클로에가 흐름에 순응하기보다 어떻게든 이 도시에 남아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물론 그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그녀가 무언가를 선택할 일도 없을 거였다.

라이언으로부터 클로에가 지인의 마차를 부러워하는 것 같더라는 말을 듣자마자, 데메트리안은 만사 제쳐 두고 마차 장인을 찾았다. 라이언은 물론이요 출장비까지 지급해 라구를 대동하고서.

뭐가 됐든, 그 지인의 것보다는 더 좋아야 했다. 라이언에게는 주워들은 것에 대해 낱낱이 알려 달라고 했고, 라구에게는 최대한 많은 기능을 구현할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길드의 일이 아니라도 통신구 같은 것을 뚝딱대는 라구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고……

덕분에 자동으로 발 받침이 나오고, 보냉 칸, 보온 칸이 있고, 다양한 비밀 수납공간이 튀어나오는 이 마차가 완성된 것이었다.

클로에의 ‘일’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그가 바란 모든 소망을 담아, 데메트리안의 눈이 너른 바다처럼 빛났다.

지금껏 건성으로 봤던 마차 내부의 곳곳을 둘러보는 클로에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만큼 떨리는 목소리를 클로에는 간신히 내뱉었다.

“이건 너무…… 과분한데. 내가 그걸 하면 얼마나 할 거라고.”

클로에의 시선은 마차의 곳곳을 살피고도, 데메트리안의 얼굴로 향하지 못했다. 그 눈빛은 구석 아래쪽 어딘가에서 이지러졌다.

“오래 해야지.”

“…….”

“너라면 그럴 수 있는걸.”

데메트리안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울컥, 제 목구멍에 차오르는 것이 울음인지, 설렘인지, 원망인지 클로에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잖아. 너도 알잖아. 2년 뒤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는지.

클로에는 맞잡은 제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면서.

“있지, 데미. 다 고마워. 라구 경에게 그런 걸 베풀어 준 것도 정말…….”

“뭘. 내게로부터 네게 가는 것 중 지나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데메트리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그에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금액으로 쳐도, 노력으로 쳐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가 못했던 일에 비하면야……

그의 입 끝에 걸린 어스름한 미소에, 클로에는 제 마음의 한 조각을 걸어 보기로 했다.

“있지, 데미.”

“응.”

“나…… 비밀이 하나 있어.”

클로에는 제 무릎 위에서 꼼지락대던 손을, 슬그머니 간이 탁자 위로 올렸다. 그 손은 조금 대담하게 움직여 깍지를 끼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손 근처에서 어정거렸다.

“허황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클로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데메트리안의 손등에 툭 불거진 부분을 쓸었다. 우연을 가장하지 않고는, 크레벨 정원의 미로를 헤매던 그 시절 이후로 처음 가닿은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의 몸이 긴장한 듯 바싹 굳었다.

“……너라면 꿈 깨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

무얼 이리 뜸을 들여,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제가 스무 살로 돌아온 이후, 데메트리안이 제 말을 끊는 법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그의 눈빛이 심해처럼 빛났다.

그럼에도 클로에는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이 문장을, 저 문장을 고쳐 물 때마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데메트리안의 손을 더듬어 이윽고 그의 손을 폭 감쌌다.

“나는 말야.”

그녀가 제 손을 쥐어 오는 것에 설레면서도,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에 데메트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클로에는 슬며시 눈동자를 들어 그의 긴장한 낯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칸다르의 왕자와 결혼했었어.”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렇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