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6)
차근차근, 모든 것을 계획대로 이루고서…… 그런 것을 생각했지만, 그녀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라면 그는 단 한 순간도 침착할 수 없었다.
늘 초조했고, 늘 서툴게 굴었으며, 늘 마음만 앞섰다.
그러니까, 그녀를 잃는다는 일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되었던 그날부터 말이다.
얼른 가닿고 싶다.
데메트리안은 입가에 저도 모르는 미소가 걸린 것을 상상도 못 한 채, 발을 굴러 말을 재촉했다.
아이펠 장원의 남서쪽에는 그들이 어릴 때부터 가끔 물장구를 치곤 하던 작은 호수가 있었다. 말이 목을 축일 수도 있고 근처에 나무 그늘도 적당히 있어서, 같이 물에 들어가는 것이 수줍은 나이가 된 이후에도 함께 승마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찾는 곳이었다. 호숫가 반대편은 고티유의 성곽에 인접해 있어서 마차를 타고 피크닉 오기에도 좋았다.
그러니까, 6년 만이었다. 오후의 햇볕을 받아 사금처럼 반짝이는 물결도, 싱그런 초록과 아래의 더 짙은 녹음도, 나뭇가지 이편과 저편을 오가며 쪼롱쪼롱 우는 새들의 소리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에 청량감을 더해주는 미풍도, 그 모든 것들이……
이 호수에 찾을 때면 늘 앉곤 하던 나무 그늘에 앉아, 클로에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그 정경을 눈에 담았다. 벌써 15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태양절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정오처럼 사위가 하얗게 밝았다.
‘그러고 보면 돌아오고서 처음이네.’
스무 살로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었음에도,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를 벗어난 것도, 여유로이 자연을 즐기는 것도 처음이었다.
진귀한 품종의 나무들로 꾸며 놓은 셰비크의 정원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처럼 탁 트인 야생의 자연은 또 다른 아름다움과 감격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하아, 클로에는 말을 탈 때부터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데메트리안이 꼼꼼하게 매듭지어 준 리본을 풀지 않은 채 모자를 벗어 뒤로 넘기니, 초여름의 바람이 머리칼의 열기를 앗아가며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목마르지?”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 말을 매어 두러 갔던 데메트리안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햇볕을 등진 채 허리를 숙인 그는 손에 든 수통을 내밀었다.
‘이런 건 언제 다 준비했담.’
새초롬한 마음과는 달리 클로에가 밝은 낯을 감추지 못한 채 수통을 받아 들었다. 승마로 인해 벅차올랐던 마음은 그 무엇도 갈무리하지 못했으니까. 햇볕을 등져 확인할 수 없었던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마정석으로 보냉 기능을 첨가한 것인지, 레몬 조각이 담겨 상큼한 맛을 더한 그 물은 아침에 담아 나온 것일 텐데도 퍽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에 대한 만족감이 클로에의 얼굴에 번지는 양을, 데메트리안은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이어 그는 자리를 펴고 그 위에 피크닉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그 안에서는 도수 낮은 사과주와 멜론, 수박, 체리 등의 여름 과일들, 그리고 오이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 나왔다.
정작 집에 있다 나온 저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클로에는 괜히 멋쩍어져, 또 한편으로는 마레와 라쥐르에서 데이트 운운하던 그의 낯이 떠올라 조금 마음이 불편해지고 말았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나오는 툴툴대는 목소리.
“입궁했다 오는 거라 바빴을 텐데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준비는 내가 하나, 사용인들이 해 주는 거지.”
클로에가 자잘한 체크무늬의 천으로 만들어진 그 자리 위에 엉덩이를 옮겨 앉자, 데메트리안이 그녀 가까운 곳에 무릎을 내리고 몸을 낮추며 훌쩍 다가왔다.
“땀 식으면 선선해질 거야.”
퍽 가까워진 거리, 마치 승마 처음 나온 아이를 어르듯이 나지막하게 뱉어 오는 말.
검을 잡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손끝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목 뒤로 늘어진 승마 모자 때문에 목이 죌까 싶어 그 끈을 풀려는 손길…… 매듭을 풀지 않고서 끈만 늘인 바람에 꽉 묶였던 것이 그의 손끝에서 슬금슬금 풀어졌다.
숨결까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는, 마치 탐구라도 하는 듯 집중하여 숨마저도 고요히 참고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고개를 돌려 가며 집중하고 있는 그의 진중한 얼굴, 슬그머니 벌어진 입술……. 그 푸른 눈동자가 진득하니 제 목에 붙박여 있는 것이,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져 목을 모로 젖혀 시선을 돌렸다. 네가 풀기 쉽게 도와준다는 양.
‘이렇게 가까우면 반칙 아닌가…….’
얼굴의 홧홧한 감각은, 분명 초여름의 운동으로 인해 달아올랐기 때문일 거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서, 또는 그가 저를 이리 챙기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 것들이 쑥스러워서가 아니어야 했다.
그 매듭이 꼬불꼬불한 두 개의 끈이 되어 클로에의 목에서 달아났을 때,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살면서 성취감을 느낀 순간은 수많았지만…… 그 어느 때에도 그가 감격을 얼굴에 비추는 것은 너무도 어색한 일이었다.
그 기색을 감지한 것이 쑥스러워 클로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용인들 일만 더 많게 만들어?”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스무 살로 돌아온 뒤로 몇 번을 생각하는 말이었을까.
제가 기억하는 데메트리안이라면 분명…… 그들은 급료를 받고 일하며, 이것은 근무 시간 내에 근무 장소 안에서 이뤄진 정당한 지시이며, 사실은 품이 드는 일도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했을 것인데.
실제로 크레벨 주방의 하녀들은 피크닉 도시락은 오랜만이라며 되레 설레하는 듯도 했으나……
“그런가? 귀택하면 보너스라도 줘야겠군.”
가볍게 수긍하는 데메트리안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귓가가 새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언제부턴가 데메트리안은 제 막무가내도 다 옳은 소리라는 듯이 받드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이런 소소한 투정에 그는 더 이상 그 지고한 이성이며 합리의 잣대를 갖다 대지 않을 거였다.
그게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그는 뭔가 달라져 버린 사람처럼 굴었고, 그것은 분명히 제가 스무 살로 돌아온 그날 새벽의 라크루아 타운하우스 소응접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다정해졌고, 늘 감격한 듯 제 안색을 살폈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사람처럼 굴었고……
그러니까, 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건 제가 기억하는 제국력 913년의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아니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건네주는 유리잔을 받아들었다. 보글보글, 병에서 갓 따라져 나온 사과주에서는 탄산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심란한 표정에도, 길어지는 침묵에도 어떤 연유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아 제 잔에 든 사과주를 한 모금 들이킬 뿐이었다.
“이 호수는 역시 이 계절이 제일 보기 좋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내어 분위기를 북돋는 것까지……
그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들은, 자꾸만 클로에에게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유리잔에 입을 묻고서 그의 낯을 흘끔 보았다. 제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호수 먼 곳을 보는 그의 얼굴에, 클로에는 노엘 웬즐리를 바라보던 에티엔의 낯을 겹쳐 보았다.
……그가 변한 걸 굳이 확인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나자고 연락할 때까지만 해도 당장 모든 것을 털어놓고 모든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햇살 아래서는, 무엇도 명백히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햇살 아래에 비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세월이 그만큼 길었으니까.
이따금 사과주를 홀짝이고, 오이 샌드위치를 조금 씹고, 바람을 쐬고…… 한참 동안 무릎을 껴안고서 호수만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결국 화제는, 두 사람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구휼 기금 문제는 잘 풀려 가고 있어?”
“응, 두 번째로 올라온 상단들은 무사히 다 왔어. 포털을 이용하지 않은 영지에 과오가 있기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그들의 손해를 메워 주려고 용의자들을 수사하고는 있는데, 영 실마리가 없네.”
제가 기억하는 미래에서는 그 절도 방식조차 미제에 그쳤던 이 사건. 클로에는 더 이상 도울 수 있는 말이 없어 고개만 슬며시 끄덕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는 에티엔을 통해서도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너도 수사에 참여한다고 에티엔이 그러던데.”
“원로원 예산을 투입하는 바람에 깊게 발을 들여 버렸지. 수사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원로원 어르신들께서도 덜 불쾌해하실 테고.”
큰 기대가 없어도 일단 모양새의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논리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누군가의 감상을 배려해서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가끔은 제가 그 예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명백히 낯선 일.
그것을 지적할 자신이 없어 클로에는 가만히 사과주만 홀짝였다.
“과일도 좀 먹어. 보냉 상자에 담아 와서 시원할 거야.”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은 과일이 담긴 접시를 클로에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의 말대로 크레벨의 주방에서 모양 좋게 잘라서 넣어 놓은 멜론이며 수박 모두 입안을 시원하게 물들여 주었다.
“넌 안 먹어?”
체리 씨앗을 뱉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입술을 오물거리던 클로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에 걸린 것은, 손으로 뒤편을 짚고 길게 기댄 채 저만 바라보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얼굴이었다. 그 낯에 걸린 것은 온 얼굴로 자아낸 미소…….
이렇게, 제가 뭘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듯 행동하는 것 역시……
그 표정을, 자꾸 보면 익숙해질 것 같아서 클로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근데 정말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짐 같은 거 안 가져온 줄 알았는데.”
“아, 그게……”
데메트리안은 머쓱한 마음에 손톱으로 제 콧잔등을 긁었다. 하려는 말이 다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아직 입에 올릴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차를 가져왔어.”
“마차?”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체를 이리저리 기울여 저들이 등지고 있는 나무숲 건너편을 살피려 애썼다. 다른 말의 울음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 얼굴에 호기심과 의아함이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