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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80화 (80/189)

80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5)

‘데미가 라이언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었다면, 그건 내 일을 돕는 애라서……’

정말 그것 하나뿐일 거였다.

‘주인님께서 하시는 일에 개인적으로 도울 아이디어가 있으면 귀띔해 달라고도 하셨어요.’

그런 것들을 주워섬기는 라이언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클로에는 거기에 어떤 기대가 담겨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 눈빛은 제가 메리앤과 타국의 왕자들에 대해 열을 올릴 때에 메리앤의 눈에 떠오르던 것과도 같은 빛이었고, 동시에 셰비크 별궁의 주인이던 제가 하룻밤 새에 5년을 거슬렀다는 기묘한 체험을 고백했을 때에 미라벨이 보이던 눈빛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 왕자님과는 행복했냐고 물을 때의 그 눈빛.

클로에는 침대를 한 바퀴 굴러, 협탁 서랍에서 나무로 된 상자를 꺼냈다. 지난주 전령이 데메트리안에게서 받았다며 전해 준 상자였다.

그 상자는 투박했지만, 옻칠된 것이며 주석으로 된 잠금쇠 같은 것들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정말 데미답게도 말야.’

클로에는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는, 세심하지 못했다. 제 무엇을 꾸며낼 줄도 몰랐다. 정직했고, 그것은 그리하여도 손해 보지 않는 그의 든든한 배경에서 기인한 거였다. 제게도 늘 그는 무뚝뚝했고, 무엇 하나 배려하거나 봐주지 않았다.

아니,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그는 저를 늘 대등한 존재로, 유일하게 속내를 터놓는 대화 상대로 여겼으니까.

저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빼면……

달칵, 클로에는 작은 손놀림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장미들은 이미 창가의 화병으로 이사 간 지 오래였다.

「경애하는 로이에게.

네 덕에 모든 게 잘 풀렸어. 당분간 한숨 돌렸으니 오랜만에 교외로 나들이라도 가고 싶은데.

라구 경과 연락할 때 썼던 게 유용해서 따로 주문해서 만들었어.

마음이 풀리면 연락 줘. 기다릴게.

너의 데미가.」

긴 손가락만큼이나 세심하고 그 빡빡한 성정만큼이나 완벽주의적인 미감을 자랑하는 필치로 이뤄진 글씨.

그땐 너무나도 놀라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름만 보고, 아니 그의 글씨만 보고 닫아 버려서 제대로 읽지 않았던 편지가 나왔다.

클로에는 그 상자를, 그의 편지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통신구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미 마음을 정하고서 꺼낸 것이었는데, 다시금 생각이 깊어졌다.

오늘 라구를 만난 이후로, 클로에는 모든 생각의 틈에서 레몬 빛의 토끼털 케이프를 떠올렸다.

‘그 예쁜 왕자님께 네가 이런 토끼 같은 이미지인가 봐.’

‘토끼?’

‘귀엽잖아, 레몬 빛 토끼. 일단 토끼가 귀엽고 레몬 빛도 귀엽지. 네 머리칼이랑도 어울리고. 케이프도 귀엽다.’

그에 대해 제가 느꼈던 복잡한 심사는, 그 결을 올올이 헤쳐 보자면 그 너머에 분명한 실망이 깃들어 있었다. 기대감을 충족했으나, 고마웠으나, 황송했으나, 어쨌든 얼마간 실망스러웠다.

저와 그 어떤 의무나 책임도 나누지 않았던 부군은 저를 은애할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똑같은 호의를 베푼 셈이니까.

그러니까 그건, 저를 귀애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심리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라구가 가르쳐 준 대로 버튼을 눌렀다.

“있지, 라구 경한테 얘기 다 들었어.”

고마워, 또는 잘 받았어, 또는 왜 이런 걸 했어, 또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클로에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가자, 나들이. 물의 날 괜찮은 것 같아.”

그러고서 버튼을 꾹 눌렀다. 클로에는…… 그가 저를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낼 것을 알았다. 그것은 구휼 기금 문제가 대충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상자에 모든 것을 다시 넣고서 서랍에 집어넣고는, 반대로 한 바퀴 굴러 다시 침대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시야에 에르드의 여덟 사도가 그려진 천장화가 눈에 담겼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 나서,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아직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확인해 주는  것만 같던 풍경……

클로에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포시 말아 쥐는 손끝에, 그리하면 어떤 진실이 포획될 수 있다는 것처럼.

그 가느다란 주먹 너머에는 규율과 희망의 사도, 피즈가 아기 사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바람의 날에 태어난 데메트리안의 수호 사도였다.

* * *

이틀 뒤인 물의 날,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는 제도의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아이펠 장원으로 향했다. 크레벨 공작령의 경계에 있는 그 장원에는 황실과 크레벨 공작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말 사육장이 있어서, 클로에가 어려서부터 승마를 배우며 놀던 곳이었다.

물론 데메트리안과 말이다.

마차가 사육장의 코티지 하우스에 다다랐을 때, 어김없이 데메트리안이 거기에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의 이 만남을 위해 그가 어찌나 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왔는지는 파이겐도 몰랐다.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데메트리안은 작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경악도 아니었고 실망도 아니었는데, 다만……

“혼자 내릴 수 있어.”

그가 내미는 손을 슬며시 노려본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준비해 두었던 말을 새침하게 내뱉고는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일까, 정말로 혼자 내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서일까……

손을 거절당하고서 아무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던 데메트리안을 대신해 파이겐이 살갑게 말을 붙여 주었다.

“레이디용 승마 바지가 출시되었군요? 잘 어울리시네요.”

“출시된 건 아니고 한번 맞춰 봤어. 라비 맞춰 줬더니 편하다고 하도 자랑을 해서 말이지.”

데메트리안과 오랜만에 승마하러 가기로 이야기하고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미라벨의 바지였다. 한들룽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이야 평민들의 치마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승마에는 정말로, 그것이 더 편리해 보였던 것이다.

클로에는 다행히도 몇 대에 걸쳐 내려오는 정장집 재단사를 수하로 두고 있었으며, 그는 제 충성심을 증명하듯 반나절 만에 꼭 맞는 바지를 갖다 바친 것이었다. 거기에 그의 동네 인맥을 이용해 급히 맞춘 부츠까지.

아직 길들지 않은 가죽이 불편해 발목을 이리저리 꺾어 보이는 클로에의 모습을,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잘 어울리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제 눈에 없었지만…… 뭔가, 그녀의 생각이 제가 모르는 방향으로 튄다는 것은 또 얼마큼 슬픈 일이었고, 그러나 이 모습을 처음으로 눈에 담는 이가 저라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안도했다.

“제가 경에게 밀리던 유일한 약점이 치마였는데, 이젠 정말 알 수 없게 돼 버렸죠?”

“그거 참 기대되네요. 차라리 두 분만 승마하시라고 하고, 우리는 대련이나 할까요?”

파이겐이 슬쩍, 제 주군의 눈치를 보았다.

데메트리안이 그에게 클로에와의 관계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는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데메트리안과 모든 걸음을 함께하는 호위 기사였고…… 무엇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던 것이다. 데메트리안의 그림자로 사느라 연애 사업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눈치는 꽤 좋았다.

오늘이 두 분 사이에 뭔가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게 어느 방향인지는 몰라도, 요 얼마간 제 도련님이 벌였던 일들을 생각하면…… 뭔가 전환점이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크루아의 아가씨가 만나 주시지 않으셨으리라.

“……그럴까요, 그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 좋겠지만, 관계는 제가 대신 쌓아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로이도, 데미 공자도 말이다. 미라벨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살피며, 여느 때처럼 파이겐에게 얄밉게 말했다.

“오늘은 다섯 판쯤 해 볼까요? 저는 4선승 하면 이기는 걸로.”

“아, 그럼 저는 전승으로 할까요?”

“저번에 두 판 내리 지신 분이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저는 모르겠네요?”

“여기는 라크루아 연무장보다 넓고, 저는 이제 영애의 패턴을 좀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만히 있었으려고요?”

두 호위가 부러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울며 도망친 것이어서 클로에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쑥스러웠다. 필요할 때에 눈 돌릴 곳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미라벨이 파이겐과만 어울리는 것에, 클로에가 괜스레 부츠 코를 땅에 콩, 박아 볼 무렵이었다.

데메트리안의 손이 클로에의 턱 밑으로 향했다. 딱히 고칠 것은 아니었지만, 턱 밑에 달린 승마 모자의 끈을 괜히 한 번 더 꼬옥 조여 주었다.

“호수까지 달려 볼까? 날씨가 좋네.”

“……그래.”

거기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데메트리안과 클로에는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하는 승마였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데메트리안과 아이펠로 놀러와 조랑말을 타고 뛰놀기는 했지만, 데메트리안이 소년 병사단에 들어가면서, 또 리도테에 청강을 다니게 되면서 조금씩 드물어졌던 일이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절마다 한두 번씩은 나왔었고,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각자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인데……

마지막으로 함께 승마를 나왔던 것이 데메트리안이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계산해 보면 1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사실은 6년은 더 된 일이었고, 그 이후로 클로에는……

‘그러고 보니 스칸다르의 설원을 한 번쯤 달려 보고 싶기는 했는데.’

아이펠까지 나오지 않고서야 말을 달릴 일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가까이에 있는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고, 일종의 스포츠이자 야외에서의 놀이였던 승마는 데메트리안과 평생 함께 해 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스칸다르의 엄숙한 왕실 문화에선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라 이랴, 다리를 굴러 말을 달렸다.

갑자기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데메트리안은 조심하라고 외칠 뻔했지만 이내 모든 말을 잃고 말았다.

제 앞에서 흩날리는 귤빛 머리칼…… 그 머리칼 올올이, 정점에서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한 유월 오후의 눈부신 햇살에 녹아들어 너울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햇살에 이지러지는 듯한 그녀의 머리칼이 잠깐, 눈부시다고 생각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데메트리안은 조금, 숨이 막힐 듯 설레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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