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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79화 (79/189)

79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4)

라이언이 3층에서 마정석 램프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레지오가 아닌 곳에서 만나려다 보니 라구의 길드 일이 끝나고서 만나야 했기에, 어느새 실내에선 불을 밝혀야만 하는 저녁 어스름이 된 것이었다.

건물 내부는 평범한 외관과 달리 굉장히 깔끔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이 일대의 여느 건물들처럼 적당히 허름하다는 뜻인데, 그와 달리 내부의 복도며 계단은 갓 공사를 마친 것만 같이 생활감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심지어는 보통 서민들의 건물에 쓰이는 목재가 아니라 잘 연마된 석재로 짜인 것이어서, 거기엔 일말의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하나 평민들의 건물이 익숙지 않은 클로에가 그런 것을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미라벨 역시 뭔가 어색한데 원인은 모르겠다고 생각할 뿐.

‘세입자들을 새로 받느라고 이 건물이 이렇게 비어 있나?’

클로에는 그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고는 라이언을 따라 3층에 다다랐다.

똑똑.

“마법사님, 저희 왔어요!”

라이언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양 문이 열렸다. 마법을 써서 연 것인지, 라구는 한가운데 놓인 소파 앞에 일어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

“마법사님, 오리포네 출신이시라더니, 거상의 아드님이시기라도 하셨나 봐요?”

미라벨이 방 안을 둘러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장난스레 말했지만…… 미라벨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농담으로 언급한 라구의 재력이 이 정도라면 말씨를 고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방 구석구석이 여느 귀족들의 심미안에도 아쉽지 않을 만큼 꾸며져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왼쪽에는 여느 집무실 같은 곳에 있을 것 같은 육중한 책상이 자리해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응접탁자와 소파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한 세트인지 같은 재질과 빛깔의 나무들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아닌 척 투박해도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던 데다가, 소파에 쓰인 가죽이 매끈한 것이 정말 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밑에 깔린 카펫은 또 어떻고……

이 방의 풍경이 마르코네를 제외하면 평민 지구의 건물에 가 본 적 없는 제 눈에도 어색함이 없어, 클로에 또한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마법사 길드 월급이 그렇게 좋아요? 로이가 지급한 돈 다 모아 봐야 이게 안 될 텐데…… 아니, 책장도 원목으로 짜려면 이게 얼마야…… 세상에, 커튼도.”

정말로 얼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클로에와 달리 다양한 계층의 집에 다닐 일이 많았던 미라벨은 이것이 클로에와 같은 고위 귀족들의 안목에 맞춰진 것임을 대번에 알았다. 그렇지 않은 척하듯 디자인은 하나같이 단조로웠는데, 재질부터가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클로에는 제 안색을 살피는 라구의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미라벨의 말소리를 따라 방을 살피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우선 앉으시죠.”

그대로 놔두었다간 이 구석이며 저 구석이며 한참을 구경할 기세라, 라구가 두 영애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 모든 것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 라이언은 혼자 빙글빙글 웃으며 소파의 가장 끝자리에 따라 앉았다.

처음 라구와 함께 이 사무실에 왔을 때만 해도 소파와 탁자만 있던 황량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그때 필요한 것을 물어보던 크레벨 소공작은 영양가 있는 답을 얻어내지 못하자, 결국 제가 원하는 대로 돈을 쓴 모양이었다.

라이언은 라구와 따로 연락할 방도가 없어서 클로에가 맡기는 일이 없을 때에도 매주 라구를 만나러 왔는데, 그때마다 이것이, 저것이 새로워지곤 했던 것이었다.

처음엔 벽지가 발리고 두꺼운 커튼이 걸렸다. 다음번에는 책상과 책장이 들어왔고, 또 창문에 방범 창살이 달렸다. 그러는 사이 삐거덕대던 복도와 계단은 순식간에 석재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 보니 비품들도 꾸려진 것인지 응접탁자 위에는 전에는 없던 다기 세트가 놓여 있었다. 라크루아에서 본 것과 달리 무늬는 없었지만 그 만듦새가 유려한 찻주전자 옆으로는, 시내에서 유명한 제과점 데쎄르의 비스킷 통이 놓여 있었다.

라이언이 제국 연방에서 확신하고 있는 사람 손에 꼽을 크레벨 소공작 나리의 순정을 곱씹던 때였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니면 혹시, 카지노에서 이 건물 문서라도 따셨어요?”

그녀들이 당황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앞에 두고서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라구는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여느 때고 늘 하고 싶은 말을 잘도 나불대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기이했다.

“아니면…… 복권 당첨? 광산 투자?”

미라벨이 온갖 종류의 불로소득을 갖다 대고 있을 때였다. 고민하던 기색을 지워낸 라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느 때보다 더 나직한 그 목소리는 마치 어떤 선언을 하는 듯했다.

“크레벨 소공작께서 영애님을 위해 마련해 주셨습니다.”

“뭐, 누구?”

클로에는 지금껏 라구에게 경이라 칭하며 격식을 갖춰 말하던 것도 잊고 깜짝 놀랐다.

놀라기는 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나?’

어쨌건 소공작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출처를 대길 원했던 것 같았으니까. 라구에게 답례로 내줬다거나, 라구가 어쩌다 구했다거나, 어쨌든 조금 에두른 명목의 선물이기를 바랐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리 그래도 클로에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아아, 역시. 미라벨이 알 만하다는 듯 말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클로에는 눈에 힘을 주고서 라구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크레벨 소공작께서요. 영애님께서 저와 어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시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는 데메트리안의 인간 분류에서 굉장히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거였다. 그런 것을, 이 영애님께서도 알고 계실까.

그녀답지 않게 복잡한 심사를 얼굴에 선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라구는 그녀도 상황을 얼추 짐작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크레벨 소공작이 저를 일종의 남성 지인으로서 경계한 것까지는 모르셨겠지만……

‘아셨다면 그리도 무심하게 소개하진 않으셨겠지.’

클로에는 제가 일종의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니와, 그것이 스칸다르에서의 경험을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데메트리안에게는 더더욱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 같은 거였으니까. 마치 두 사람이 캄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 대해 둘이 약속할 일은 없었지만, 그도 어쩌면…… 모든 걸 알고 있을 거였으니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로이와 데미는 분명 어느 때까지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이야기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나, 캄포와의 정혼 같은 것 빼고는.

“경, 그때 내가 분명히.”

“네, 말씀하신 대로 에둘러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크레벨 소공작께서 저를 순진한 영애님께 꼬인 사기꾼으로 보시는 것 같았는걸요.”

그런 언어적인 메시지가 오간 건 아니었지만, 분명 데메트리안의 심사가 그랬으리라고 라구는 확신했다. 물론 클로에와 앞으로 부대낄 제 안위만을 따졌다면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 편이 그에게도 두 남녀에게도 쓸데없는 심력 소모를 줄이는 길이리라.

어쨌든 라구에겐 저 마음 편한 것이 제일 중요하기도 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일단 고개를 숙여 보이니 클로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라구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데메트리안에게 라구를 소개해 줄 때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 아닐 뿐, 언젠가 데메트리안에게 이런 일에 대해 은근히 이야기할 날이 올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만 그것이 애먼 사람들을 괴롭힐 그의 질투심 때문이리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라구의 선택이 거기에 기인해 있음을 몰랐지만.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데메트리안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공작께서 걱정이 많으시더라고요. 영애님에 대해.”

“…….”

그래, 늘 문제는, 데메트리안 크레벨이었다.

그는 왜 자꾸만 그답잖은 일을 벌이는 걸까. 왜 자꾸 다정하게 굴고, 저를 살피고, 뭐라도 더 해 주려 하는 걸까.

그래서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아니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클로에는 라구를 노려보던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방향 어딘가에는 원로원이 있을 거였다.

‘소공작께서는 이전 일에 대한 답례차 제게 내준 것으로 꾸미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분명 영애를 걱정하셔서 하신 일인데 제가 공범이 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날 밤, 방에 들어와 제 침대에 드러누운 클로에의 머릿속에 라구가 일러준 말들이 우후죽순으로 떠돌았다.

데메트리안이 라구를 경계했다는 것, 클로에가 자기 일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서 굉장히 기꺼워 보였다는 것, 그래서 라구와 라이언에게 굉장히 호의적으로 나왔다는 것, 굳이 클로에를 빼놓고서라도 두 사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했다는 것.

‘맞아요, 사실 예전에 예가체프 앞에서 마주쳤던 것 때문에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점잖으시고, 저 같은 녀석한테도 자애롭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거기에 덧붙은 라이언의 추임새는, 제가 다른 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질 지경이었다. 라이언이 예가체프 앞에서 데메트리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면 정말로 생김새를 하나하나 꼽으며 비교해 봐야겠다 싶었을 정도로……

데메트리안은, 사용인이나 평민에게 무서운 분도 자애로운 분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익명의 타인에 대한 관심 자체가 희박했으니까.

그런 그가 라이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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