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2)
실은 클로에도 공간을 임대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런 것쯤은 미라벨의 명의를 빌려도 되고, 라이언이나 라구의 명의를 빌려도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2년 뒤면 그만둘 일에 그렇게까지 큰 품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뿐인데.
따로 어디인지 언급이 없었던 걸 보면 라이언은 이미 아는 이야기일 터였다. 제가 잠깐 쉬는 사이 두 사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클로에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고 말았다.
‘맡긴 앰버는 바로 작업해서 앤지네에 줬겠고…… 앤지네에 추가로 보내 줄 보석들 구하러 좀 다녀 봐야 할 텐데.’
그 디자인에 어울리게 하자면 적어도 성인의 엄지 한 마디는 되는 크기여야 하니 부지런히 물색해야 했다.
‘이번 헤드밴드의 핵심은 스칸다르산 모피니까 보석에 굳이 힘줄 필요는 없지만…… 마법을 부여하니 진짜 상징석을 쓸 필요도 없고 말야. 그냥 비슷한 색 유리로 해도 되긴 할 텐데.’
그날 클로에는 라구에게 라이언을 보낼 때에 예전에 사 두었던 앰버를 보내며, 머리칼에 진주 가루를 뿌린 것 같은 효과를 주는 마법을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 했었다. 분리 독립파가 마도구상으로 위장한 채로 팔았던 상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귀족 영애들이 좋아할 만한 미용 관련 마법을 걸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었다.
대축일 주간 장터거리에서 뫼니엘 방식으로 세공한 액세서리가 팔렸으니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평민들의 관심이나 좀 끌다 말았을 테니 사교계에선 분명 신선하게 느껴질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루비나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 같은 고가의 상징석들이 오염된 것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색만 같은 저가의 보석이나 유리 조각을 사도 되는 것 아닐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른 클로에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기왕이면 상징석을 써야 귀족 영애들이 고급스럽게 여기면서 더 선망하겠지. 평민들은 그다음이야.’
그러니 우선은, 오염된 보석들을 최대한 찾아보기 위해 한들룽 지구에 가야만 했는데……
클로에는 제가 아직 답신을 보내지 않은 ‘루비’의 편지를 떠올렸다.
경매장이 있다는 슈바츠 거리는, 프란츠 광장 근처 사교클럽 뒤편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낮보다 밤에 더 활기를 띠는 그곳에는 다양한 주점과 카지노들이 밀집해 있었다. 자연히, 귀족 영애들이 가기엔 터부시되는 곳이었다.
리도테의 동기들이 가 보자고 했던 물담배 바 역시 그 초입에 있었다. 그런 데를 열다섯 살 소녀가 종종 간다니…… 캄포 대공녀가 정말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제안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경매장이라면 처음 듣는데, 일정이 정해져 있는 거겠죠?」
「기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매달 첫째 주 바람의 날에 열립니다. 그런데 다음 달에는 폐하의 탄신연이 있어서 타국의 사신들이 몰려들다 보니, 매주 열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부러 바로 가부를 언급하지 않고 날짜를 물었던 것이었는데. 그 날짜에 제게 일이 있기를 바라거나, 없는 일이라도 만들거나, 혹은 그러는 사이에 날짜가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클로에에게 칼자루를 되돌려주듯이, 루시엔은 이 중에 하나쯤은 얻어걸릴 만한 선택지들을 보여 주었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도……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질지 말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편지가 더 이상 오고 가지 않았다. 스칸다르 왕실저에 다녀온다, 앤지네에 다녀온다 등의 핑계로 아직 답신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상태로 루시엔과 마주치게 된다면 필시 곤란할 테니 한들룽 지구는 되도록 가지 않아야 할 터였다. 물론, 그 영리한 소녀는 이 답신의 공백에서 제게 어떤 번민이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을 거였고, 그마저도 큰마음 쓰듯이 이해할 거였으나…… 그건 왠지 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라비, 오랜만에 마르코네에 가자.”
“마르코네?”
미라벨의 노란 눈이 땡그랗게 뜨였다.
“오랜만에 가면 또 살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응,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가 먼저 가자고 하니까 신기해서.”
“아무래도 그런가?”
클로에가 멋쩍음을 감추려는 듯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마르코네는 미라벨이 돌아오는 길에 들르자고 조르는 곳이었지, 클로에가 주 목적지로 선택하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소소한 변화가 기꺼워서, 미라벨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어쨌든 클로에가 ‘꿈’에 대해 이야기한 이래로, 그녀들은 더 가까워질 것도 없는 사이에서 더더욱 끈끈해진 것이었다.
근 한 달 만에 들른 마르코네에서는 적당한 소득이 있었다. 그 사이 급히 돈이 필요한 용병들이 몇 다녀갔는지, 페리도트로 된 펜던트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알 굵은 반지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다이아몬드의 경우 알의 크기로만 보면 이런 데에 있을 게 아니었는데, 무슨 일을 겪었는지 거의 불투명에 가까워졌을 정도로 깊이 오염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루카에게 한번 보여야겠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기다 보니, 보석의 상태만 봐도 앞으로 어찌 작업해야 할지 클로에의 눈에도 적당히 짐작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이아몬드가 다른 보석들에 비해서 값이 꽤 나가니까, 애초에 유통되는 게 적어서 알이 굵은 걸 구하기도 어렵겠지.’
반지에 쓰인 것치고 알이 굵다곤 했으나 앤지네의 디자인에 쓰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구색을 맞추자고 상징석을 갖가지 구비해 놨는데 팔리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손해일 텐데. 그러고 보면 디자인이 같은데 상징석 하나 달라진다고 차별화가 되지는 못할 수도 있으려나.’
제가 고른 것들을 미라벨이 단도들과 함께 셈을 치를 때부터 마르코네에서 나올 때까지, 클로에는 앤지네와 개발 중인 상품들에 골몰해 있었다. 나온 김에 앤지네 들를까…… 그리 생각할 때였다.
“저거, 에티엔 아냐?”
클로에의 귓전에 미라벨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에티엔!”
그제서야 정신이 든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미라벨은 이미 마르코네 건물 저편에 있는 인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전에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가 있던 그쪽이었다.
주말임에도 쉬지 못하는 경시청 관료로서 오늘도 출근했던 에티엔이, 탐문 수사라도 나왔는지 제복을 입은 채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밖에서 보니까 정말 관료 같네?”
미라벨이 장난스럽게 걸어오는 말에, 어느새 생각에서 빠져나온 클로에도 작게 키득댔다. 제게는 평생 집에만 있는 맹한 오라비였는데, 밖에서 어엿한 관료 행세를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낯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저들을 발견한 에티엔은 뭔가 당황한 낯을 지었다.
“뭐야, 땡땡이라도 쳤어?”
별 생각 없이 반가운 마음에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왠지 모르게 에티엔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도 했고……
“라비, 네가 보기에도 쟤 얼굴 빨개?”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클로에는 미라벨과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가 서 있는 건물 끝 모퉁이 쪽으로 다가갔다. 일전에 제가 난생처음 표창으로 사람을 맞히는 데에 성공한 그 방의 아래쪽이었다. 그사이 수리가 다 끝났는지, 벽면은 언제 그런 수난을 당했냐는 양 말끔히 정비돼 있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왜 당황해?”
“아, 아니, 당황은 무슨.”
“에엥?”
말까지 또 더듬는다? 클로에가 제 오라비에 대한 불신을 담아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아, 안녕하세요, 영애?”
쩔쩔매는 에티엔의 몸에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의 신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몸짓에 찰랑거린 은회색의 단발머리…… 노엘 웬즐리였다.
“앗, 노엘 경. 같이 계셨군요.”
“네, 같이 수사 나왔거든요.”
에티엔이 버벅거리며 하지 못한 답이 거기서 나왔다. 클로에와 미라벨의 얼굴에서 의문이 가시는 걸 느꼈는지, 노엘 웬즐리가 입술 양 끝을 끌어올리며 빠르게 말했다.
“일전에 체포했던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의 일 때문에 좀 찾아볼 일이 있어서 말이죠.”
짐짓 나직해지는 그녀의 목소리. 지나가던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말라고 그러는 거였는데…… 그러고 보면,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에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에티엔과 대화를 나눈 적이 아직 없었더랬다.
‘노엘 경이랑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다고 했으니 알고 있을 텐데, 이제껏 서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네.’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겠거니 했지만 내어놓고 이야기한 적 없는 일이 화제가 되니 괜히 머쓱해지는 마음…… 괜스레 에티엔의 얼굴을 올려봤을 때였다.
‘어라?’
클로에는 제 것보다 조금 푸른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제가 지금껏 안 적이 없는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은 제 맞은편의 영애, 곧 그의 동료인 노엘 웬즐리에 붙박여 있었다.
“아아, 여기가 그들의 아지트였으니까요.”
낯선 에티엔의 기색에 정신이 팔린 클로에는 하나 마나 한 대꾸를 했다.
“네. 그러고 얼마 뒤에 스칸다르 왕실에서 보석금을 내 와서 용의자들을 석방했거든요.”
“아, 역시 그랬군요.”
그때에는 분리 독립파의 테러가 거행되고 말았기에 스칸다르의 거창한 배상이 사교계의 화젯거리였지만, 이번에는 테러도 미수, 그 사실도 미공개여서 두 나라 간의 거래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진즉에 그들을 풀어줬는데…… 이번에 알아볼 일이 생겨 그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전에 없이 노엘의 말소리가 살가웠다. 어쩌면 지난번에 제가 대책 없이 친근하게 굴어 버렸기 때문인 듯도 했고…… 경시청의 두 관료가 스칸다르인들의 행방을 좇고 있는 사연이 무얼지, 고개를 갸웃하던 찰나. 또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에티엔의 얼굴이 시선에 걸렸다.
거기서 클로에는 에티엔의 기색이 마음에 걸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눈빛은 어쩌면 제 기억 속의, 이따금 어떤 빛을 담은 듯 번득이던 부군의 눈빛과도 같았고, 또 한 편으로는 요즘 자꾸만 저를 곤란하게 하는 데메트리안의 것과도 닮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표정은…… 제가 애써 외면하던 데메트리안의 표정을 빼닮아 있었다.
대니얼과의 만찬에서 제가 황자궁 주방의 솜씨를 평가했을 때, 또는 대축일 예식 때에 크레벨 공작부인과 제가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
그런 때의, 그의 표정.
“에티엔이 저 경을 좋아하나 보지?”
에티엔과 헤어지고서 마차로 가는 길에 미라벨이 소곤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말야. 클로에는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