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76화 (76/189)

76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1)

‘으, 으아, 귀부인…….’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런 것만 보면 제 주인님과는 색채가 조금 다르셨지만,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나 오밀조밀한 코와 입술 같은 것들이 한 눈에도 주인님의 어머니셨다.

“아, 저, 귀부인, 처음 뵙습니다, 저는……”

“떨 것 없단다. 그냥 네가 재밌는 아이라기에 어떤 앤가 궁금해서 말야. 앉으렴.”

“아, 네, 아…….”

재미라니…… 제가 수선 들어왔던 아카데미의 제복을 훔쳐 입고서 대축연 주간 장터거리에서 장난질을 친 건 확실히 귀부인 보시기에 재미있는 일일 거였다. 그거 말고는 제 말솜씨건 무엇이건 재미와는 무관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라이언은 명치가 쑤셔 오는 것 같았다. 이게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위장병이라는 건가……

라이언의 그러는 양을, 궁정백부인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로이가 보수는 후하게 주니?”

로이, 그 애칭에서 라이언은 그 음절을 꼭꼭 씹어 말하던 크레벨 소공작 나리를 떠올렸다. 두 분의 세월이 참 깊으시구나.

“네? 보수요? 그게…… 네. 제가 감히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노동의 가치에 감히 많이 받는 건 없단다. 로이에겐 그만큼 네가 필요한 거야.”

“네, 그러시다면 다행이기야 한데요…….”

클로에야 그래도 나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아서 친근하게 여겨지는 구석도 있었다지만, 제 어머니보다 더 높은 연배의 귀부인을 보는 라이언의 마음은 정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차라리 이곳이 라크루아의 소응접실이 아니라 어디 정원이나 길바닥이기라도 했다면 마음 놓고 넙죽넙죽 허리를 숙였을 텐데…… 제가 이렇게 같은 높이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 진땀이 뻘뻘 날 무렵이었다.

“여성복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데. 의상실에서 옷을 배우고 싶다고.”

“아, 네, 맞습니다. 그게……”

어쩐지, 오늘따라 사용인들이 저를 관찰하는 기색이 없더라니. 어느새 저에 관한 이야기가 이 저택의 분들께 다 퍼진 모양이었다. 그럼 주인님의 비밀일 것도 아닌가, 이제는……

“드레스만 봐도 어떤 의상실에서 맞춘 건지 다 알아본다고?”

“다는 아니지만…… 같은 유행을 따라도 제도에서 내로라하는 의상실 디자이너들의 습관 같은 것이 있어서, 그걸 알아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네.”

라이언은 예가체프에서 처음 만난 날, 다짜고짜 본인이 입은 옷을 평가하라던 주인님이 떠올라 눈동자를 슬그머니 굴렸다. 귀족 나리들께는 이런 재주가 재미있게 여겨지시나 보지…….

라이언이 어슴푸레한 호선을 그리는 궁정백부인의 눈매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무렵이었다.

“어머니, 아니 왜 여기는……”

꼭 닫히지 않았던 문 사이로 나타난 주인님의 모습에, 라이언은 마치 구원자를 만난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가죽으로 된 부피가 큰 가방이 들려 있었다. 거기에는 아마 일전에 중고품 시장에서 구한 다양한 빛깔의 스칸다르산 모피들이 들어 있을 거였다.

“네가 잘못한 일이 있을까 걱정이라길래. 혹시 네가 네 신분을 믿고 애먼 아이를 착취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궁정백부인의 너스레에 클로에가 웃어 버리려던 찰나, 라이언이 펄쩍 뛰었다. 제 주인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경비대에 잡혀가지 않게끔 새 삶을 주셨고, 매번 궁정백저와 예가체프의 호화로운 베이커리를 맛보게 해 주셨으며, 무엇보다 제게 순수익의 20퍼센트나 떼어 주시고……

그러는 라이언의 양에, 그를 처음 끌어내기 위해 조금 고압적인 내용의 편지를 썼던 것이 떠올라 클로에는 머쓱해졌다.

“우리가 다음 주에 안드레아에 한번 가 봐야 하잖겠니?”

안드레아, 라는 말에 라이언의 귀가 쫑긋했다. 다음 달에 있을 황제의 탄신연에 입고 갈 옷을 맞출 때가 된 거였다.

“여름휴가도 있고 하니 이번에 간 김에 여름옷들을 여럿 지을까 하는데…… 아무래도 손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날 이 아이를 데려가면 어떻겠니?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저택 사람들 쓰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패션에 큰 공을 들이지 않는 라크루아의 모녀가 특별히 오랜 시간을 안드레아에서 머물 것은 아니었지만…… 클로에는 제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든, 라이언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음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거람.’

누아제트 자작부인의 화려한 과거는 알아도 다른 방향으로 화려한 현재는 모르는 클로에는, 별도리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 이 헤드밴드 반응이 괜찮으면, 보석 정화해서 바로 팔지 말고 상징석으로 마정석을 만들어서 장신구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어. 이게 잘 되면 내가 나중에 스칸다르에 가서 뫼니엘 지방의 교역을 주도할 수도 있고……’

요즘의 제 번민이야 어쨌든, 저는 2년 뒤 스칸다르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라이언을 보내고 난 클로에가 제 방 침대에 누워 오늘의 일을 이렇게 저렇게 돌이키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오전에 메리앤에게 보냈던 전령이 들어왔다.

“그래, 잘 다녀왔어?”

“네, 아가씨.”

전령은 제 품에서 메리앤의 답신을 건넸다.

“고마워, 나가 봐.”

“그리고, 저……”

왠지 조심스러운 마음에, 몇 번 머뭇거리던 전령의 손이 품에서 또 다른 것을 꺼냈다. 옻칠이 고급스럽게 돼 있을 뿐, 별다른 장식 없이 나무로 된 투박한 상자였다.

“이게 뭐니?”

메리앤이 뭘 보냈나? 저번에 선물을 준 데 대한 답례일까?

전령에게서 뭔가 어려운 듯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크게 괘념치 않고서, 클로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상자를 열어 보았다. 달칵, 미려한 장식이 없어서 오히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잠금쇠가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의 필체로 쓰인 편지였다.

「……언제든 네가 원할 때 연락 줘. 기다릴게. 너의 데미가.」

‘……!’

클로에는 얼핏 보인 것에 깜짝 놀라, 그 상자를 곧바로 다시 덮고 말았다. 상상도 못한 글씨.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정만큼 강박적으로 유려한 필기체.

벌써 2주였다. 그날 데메트리안과의 자리를 그리 떠나고서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것은.

요즘 들어 어떻게든 저와 만나려 애썼던 그에게도 그때의 일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얼마간 소식이 없었건만.

생각해 보면 제가 기억하는 이 시절에 그와는 그런 사이였더랬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남을 약속하는 사이. 그도 초대받았을 정찬회나 연회에 너도 오라고 조르지 않고서야 밖에서 만날 일이 없는 사이.

이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도 있던 차였는데.

클로에는 급히 물었다.

“데미를 만났어?”

“그, 황궁에서 일하시는 분 아닙니까.”

전령이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꾸했다. 그가 당황하는 양에, 클로에는 제가 애먼 사람에게 날카롭게 군다 싶어 순간 멋쩍어졌다. 본디 그와 같은 전령들이 심부름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할 이유는 없는 거였으니까.

속 넓은 주인의 심사야 그러했지만,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의 편지를 저 대신 전달해 준다는 것을 비밀에 부쳐야 하는 전령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무슨 금전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어쨌든 제 소임을 남에게 미룬 거였고……

하지만 두 분이 그리 친하신데 이게 경을 칠 일일까? 뻔뻔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쩔쩔매는 전령의 기색이 그저 날이 더워져서인 줄로만 생각한 클로에는 별 뜻 없이 납득하고는 그를 나가보게 했다.

“알겠어, 일단.”

“예, 예에, 아가씨.”

탁, 방에서 잽싸게 나간 전령이 조심스레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클로에는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그 상자를, 마치 손에 대면 안 될 것을 다루듯이 티테이블에 슬그머니 올려 두었다. 마치 화학물의 폭발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또 꽃이 있었지.’

뚜껑을 순식간에 닫는 바람에 스쳐 지나가고 말았던 그 상자 안의 풍경. 그 안에는, 또 크레벨의 온실에서 얻어 왔을까 싶은 작은 장미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스무 살로 돌아온 이후 마주치는 데메트리안은, 저답잖게 그런 낭만적인 짓을 벌이곤 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말야.’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듯이…… 그 말을 곱씹던 클로에는 왠지 서글퍼졌다.

사람은, 그렇다면 바뀔 수 있다. 제가 그러하듯이. 저 때문에 달라진 이들이 그러하듯이.

데메트리안의 연락이 없던 지난 며칠간은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래, 애초에 이리 되었어야 했을 뿐이다.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면, 그 온화한 입매를 보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면…… 뭔가 제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그것은 분명 착각에 불과했다.

아니 착각이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 이게 맞는 일이었다. 기왕이면 더 연락이 없기를 바랐으나, 그는 그들의 사이를 이대로 흘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클로에는 다시 작게 한숨을 쉬며 그 상자에 눈길을 던졌다. 그저 투박한,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 그 상자.

뷔욘이 토끼털 케이프를 선물하며 함께 보낸 그 호화로운 상자를 떠올리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보낸 상자를 열어 볼 수 없었다.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을 짐작함에도 그러했다. 그 안에 꽃 말고도 뭐가 더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울음에 씻겨 내려갔는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번민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어떤 감정에 휩쓸리게 될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 * *

[사무실로 쓸 만한 방을 구했습니다. 다음번 라이언을 보내실 때에 영애님께서도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울린 라구의 통신구가 내뱉은 말이었다.

제이크 콜린스를 대신전에서 마주친 이후로 처음 라구와 주고받는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라이언을 보냈더니, 그날 저녁에 바로 통신을 보내 온 것이었다.

한 번에 30초 정도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괜스레 길게 말하던 것과 달리 짤막한 메시지가 의아했지만, 클로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쓸 방이라니?’

클로에는 라이언과 라구를 만나게 할 장소를 물색할 때에 저만의 공간이 없어 곤란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야 했지만……

‘라구 경도 어차피 3년 뒤면 고티유를 떠나는데, 무슨 그런 본격적인 일을 했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