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0)
“아니, 왜 자꾸 경이 와?”
“전령들이 공녀님 앞에서 예의 차리기가 힘든가 보지. 부탁하는 걸 어떡해?”
데메트리안이 저답잖게 능글대는 것에 메리앤이 눈을 흘겼다.
“매수한 거 아니지? 자꾸 이러면 언니한테 이르는 수가 있어.”
“매수는.”
데메트리안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기실 저 스스로에 대한 조소였고…… 무엇도 지급하지 않았으니 매수는 분명 아니었다. 그의 마음 졸임을 빌미로 무언가 거래한 모양새긴 했지만 아무튼, 아니었다.
메리앤은 이번에도 편지 내용을 들키지 않겠다는 듯이,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흘끔대는 기색을 띠지 못하도록 주시하면서 페이퍼나이프를 그었다.
“어디 보자, 언니가 나한테 뭐라고 썼나아.”
보지 않아도 봉랍된 것을 제가 제대로 뜯었음을 알고 있는 메리앤은,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내며 편지를 펼쳤다. 라크루아에서 쓰는 편지지가 그리 얇을 리도 없었건만, 손바닥으로 뒷면을 가리면서.
“아하, 아하, 이런 일이 있었군?”
“됐어, 안 봐.”
지금까진 어떻게든 봤었지만…… 클로에와의 관계를 제대로 할 때까지 그런 편법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일부러 한 걸음 물러나며 시선을 돌렸다.
물 한 잔 대접하지 않는 야박한 공녀의 뒤편 유리창으로 황자궁의 후원이 펼쳐졌다. 말도 제대로 못할 때에 엄마도, 아빠도, 제 양부모인 외조부모도 없는 황궁에 떨어진 공녀님에게 주어진 황자궁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 그 응접실에서는 황자궁의 후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경치가 좋기도 하여 클로에가 메리앤을 더 자주 만나러 오는 것을 데메트리안도 알고 있었다.
“아, 혹시 말레카의 왕녀랑 교분이 있어?”
“그냥 마음속으로만 응원하는 더부살이 신세 동료지. 그분이 누구랑 교류나 한다고. 갑자기 왜?”
“혹시 알레지오 후작가 알아?”
“알레지오…… 글쎄, 들어 본 적은 없는데.”
메리앤 본인부터가 대륙 최고의 신붓감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으면서 정작 사교계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답이었다. 알레지오 후작가 역시 사교계와 거리가 멀었으니 흘러들어올 소문도 없었고, 황궁서만 지내는 메리앤이 그 상단을 알 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오는 길에 손님을 봤는데, 왕녀를 만나러 가는 것 같더라고.”
“그게 알레지오 후작가의 사람이고?”
“그래 보였어. 확신은 없지만……”
황궁에 드나들 만한 신분의 이들 중에 달리 떠오르는 다홍빛 머리칼의 인사가 없었으니까.
“혹시 주홍빛 머리?”
“맞아. 알아?”
“나야 여기서 하는 일이 정원 구경밖에 더 있나. 요즘 들어 왕녀님이 한두 번 만나는 것 같았어. 머리 색 때문에 기억에 남았지.”
그러고 보니 황자궁의 후원이 별궁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황실 직계들과 타국의 손님들 간의 로맨스가 펼쳐지곤 한다던 이야기가 있었다.
무언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한 데메트리안의 낯에 메리앤이 내뱉듯 물었다.
“왜, 이상한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 알레지오란 이름은 정말 처음 듣는데…… 아무리 그래도 후작가라며.”
“사교계 활동을 안 하는 가문이거든. 상단을 꾸려서.”
“아하.”
상단을 꾸려서,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사교계 활동은 안 해도 그 분위기가 어떤지는 다 알았던 것이다.
‘말레카의 왕녀랑 알레지오의 영애라.’
일견, 일리가 있는 조합이었다. 마탑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도공학이 발달한 말레카와, 대륙의 마정석 유통을 꽉 쥐고 있는 알레지오 후작가였으니.
‘고티유에 오고서도 불러들일 정도면 꽤나 친분이 있는 걸 텐데. 그러고 보니 알레지오 영애가 입었던 드레스가 말레카 식인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아르투젠에서 황후로서 살아가야 할 그녀에게 지인이 있는 건 나쁘지 않을 거였다. 누가 황태자가 되더라도 그와 혼인하여 황태자비로서 고티유, 나아가 아르투젠의 사교계를 이끌어야 하니까.
알레지오의 영애가 사교계에서의 일에 도움을 주지야 못할 거였지만……
‘적어도, 외롭지 않은 게 좋지.’
데메트리안은 춥고 어두운 겨울 궁정에서 혼자 외로웠을 제 아가씨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늘였다.
* * *
“일단 견본은 이렇게 두 가지로 만들어 봤어요.”
근 2주 만에 방문한 앤지네. 앤지와 한스 부부는 클로에가 맡기고 간 은회색 담비털과, 활용할 수 있으면 활용하라고 함께 건넸던 보석들을 갖고 두 가지 양식의 머리 장식을 만들어 두었다. 한 가지는 헤드밴드에 모피를 폭넓게 댄 뒤 한쪽 끝에 알이 큰 보석을 중심으로 장식한 거였고, 다른 한 가지는 헤드밴드의 대를 따라 작은 알의 보석들을 쪼로록 장식하고서 모피로 리본 코사주를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모피가 부피감이 있어서 조금 둔해 보이는 감이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아예 부피감을 과시하고 거기에 비율이 맞게끔 화려한 장식을 달아 버렸고, 이쪽은 모피가 차지하는 비율을 적게 가져가되 리본으로 만들어 질감을 살려 봤어요. 대신 보석 장식을 오밀조밀하게 해서 리듬감을 줬고요.”
클로에가 맡긴 모피와 보석뿐 아니라 앤지네 특유의 정교하고도 세밀한 금속 장식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덧붙어 있어서, 앤지와 한스가 꽤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더 나은 것 같아?”
어느 쪽이 되었건 흡족했지만, 클로에는 그 기색을 잘 감춰 두고서 미라벨과 라이언에게 물었다. 미라벨은 그저 털이 복슬복슬해 보인다……라는 생각만 났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고, 라이언은 어느새 눈을 빛내며 허리를 숙여 이렇게, 저렇게 두 가지 견본품을 살폈다.
“아가씨께서는 어쩌다가 라이언 녀석을 돌보시게 되었대요?”
그러는 양을 살펴보던 앤지가 고놈 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라이언의 정장집이 아티장 지구에서 몇 대에 걸쳐 운영되어 온지라, 아티장 지구의 토박이인 앤지네와도 역시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대축일 주간 장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눈썰미가 대단하여 눈여겨보게 되었지.”
“그래요? 매튜, 아 그러니까 이 녀석의 아비가 일찍 일을 배우게 시킨 보람이 있군요?”
“재능이 보여서 일찍부터 익히게 한 것 아니었을까? 여성복 유행이나 직물에도 꽤나 박식하니 말일세.”
“오호라, 그랬군요.”
앤지는 마치 저를 놓고 입방아를 찧어 대는 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생각에 빠져 있는 라이언을 흐뭇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주인님, 황제 폐하 탄신연 때 하고 가실 거라고 하셨죠?”
“맞아.”
“그럼 전 아무래도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라이언이 가리킨 것은 모피가 길게 재단되어 통째로 대를 덮고 있는 헤드밴드였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크기의 자수정을 중심으로 조잘조잘하게 세공한 나뭇잎 모양의 금속 장식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 자수정은 한들룽 지구에서 특이한 빛깔의 조약돌을 모아 놓은 곳에 섞여 있던 것을 찾아 정화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이번 여름 드레스 유행이 프릴이나 레이스 장식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드레스의 장식을 최대한 줄이고 재질로 승부하신 뒤 거기에 이 헤드밴드로 대담하게 포인트를 주는 게 어떨까 싶었어요. 프릴이 과하게 쓰인 드레스가 유행이었다면 이쪽이 더 나았겠지만요.”
그의 추측에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기억하는 이 당시에, 소맷부리에 몇 겹이고 레이스를 덧대던 유행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축일 예식이랑 대축연 때 맞췄던 드레스들이 내 눈에 촌스럽게 보였으니까.’
클로에 또한 라이언이 선택한 것과 같은 것에 한 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달랐지만.
“아가씨께서는요?”
“나도 마찬가지야. 어쨌든 처음에는 과감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까.”
어차피 스스로 광고판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유행에 맞지 않더라도, 뭐가 됐건 과감한 것을 골랐을 거였다.
“그러면 우선 이런 형식으로 된 제품들을 더 만들어 놔야겠네요.”
“그래, 이 정도 길이로 재단할 만한 다른 빛깔 모피들이 더 있으니 다음에 라이언을 시켜서 보내도록 하겠네. 그리고 여기 보석은……”
귀쪽에 오도록 되어 있는 자수정 장식을 클로에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다른 보석을 가져와도 되겠는가?”
“비슷하게 좀 큰 알이라면 조절해 볼 수 있죠. 은빛이니 보석이 무슨 색이어도 어울리겠고요.”
“내가 비슷한 크기의 앰버를 보내겠네. 내 수호 사도가 베람이거든.”
“아, 그러면 수호 사도 상징석을 맞춰 보시게요?”
“아무래도 아르투젠에서 보석은 상징석이 최고 아니겠나. 말고도 비슷한 크기의 상징석들을 찾게 되면 함께 보내겠네.”
“……그러게요. 아가씨, 장사꾼 다 되셨어요.”
그리 말해놓고 영애께 무슨 망언인지 싶어 스스로 주책이라며 웃는 앤지의 말에, 클로에는 조금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라이언은 간만에 맛보는 라크루아의 티푸드를 한 입 한 입 꼭꼭 씹어 먹었다.
‘조만간에 라구 경께서 주인님께 그 사무실에 대해 이야기하시면 못 오게 될 거니까…….’
예가체프에서 먹은 달달한 디저트들도 맛있었지만, 제 혀를 고급지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은 라크루아의 티푸드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런 때면 라이언은, 시작은 불미스러웠을지언정 주인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복하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 주시는 것들 갖고 라구 경께 갔다가, 작업 마치고서 앤지네 다시 들르고 집에 가면 저녁때에 얼추 맞을 테니 이거 다 먹고 가도 되겠지. 걷기도 많이 걸을 거니까 든든히 먹어 둬야 할 거야.’
한창 자라는 청소년 라이언이 제 소화 능력을 맹신하며 오늘의 남은 일정을 타진할 때였다.
끼익.
별말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 주인님이나 그 친우분일 줄 알았던 라이언은 꿀꺽 삼켜 넘기려던 마들렌이 목에 걸리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