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9)
저들의 궁금증이 대강 충족된 폼폼과 쥘은, 우리 아가씨가 스칸다르의 왕비가 되실지도 모른다고 신나서는 평소보다 더 정성들여 클로에를 씻고 마사지해 주었다.
오늘 뷔욘에게서 느낀 어색함, 스칸다르로 가는 것이 정해졌을 때에 가라앉고 만 라크루아들의 분위기, 셰비크 궁정 생활의 냉막함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그녀들의 귀여운 망상이 아주 기꺼울 수만은 없었지만……
‘차라리 지금 내가 왕자님과 서로 연모하는 사이기라도 하다면 나중에 아버지께서 마음을 한결 놓으실 수도 있는데 말야.’
클로에는 그렇게 보다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다시금 미라벨과 제 방에서 만났다. 미라벨이 클로에의 파우더룸에서 문제의 케이프를 갖고 온 채였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그 왕자에게 네가 부탁했을 때 이런 걸 바라지 않은 건 내가 확실히 알겠어.”
“내 말이.”
미라벨이 장난스럽게 말해 오는 터에, 클로에가 과장스레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미라벨이 까르륵 웃었다.
“예쁘긴 정말 예쁜데. 신년 하례 때에나 입을 수 있겠어. 그런데 이런 걸 입고 가도 되려나?”
“그러니까. 너무 튈 거야. 황후 폐하께서 따로 부르셔서 물어보실 테고……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사시사철 온난한 고티유에서 겨울에 치장하고 갈 만한 행사라면 신년 하례식이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그곳은 매해 아르투젠의 봉신들이 황실에 충성을 과시하는 자리, 그런 화려한 복색을 하고 갈 수야 없는 법이었다.
“아하하, 겨울에 라크루아령에서 온천 파티라도 해야 되는 거야, 뭐야? 안 입기엔 아까운데.”
그래, 제 모든 고민들을 떼어놓고 봤을 때, 케이프에 사용된 모피는 그 자체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기본적으로 유백색인 그 털은 빛을 비추는 각도에 따라 레몬 빛으로 보이기도, 은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겨울의 파르란 햇볕이 떠오르기도 하는 그런 빛깔이랄까. 동시에 여름의 소품에 사용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어 보였고.
“……입으면 안 되지, 입으려고 구한 건 아니니까.”
“안 입는다고? 아깝지 않겠어?”
“네 말마따나 이걸 입을 곳이 어디 있어? 고티유에서도 라크루아에서도 이런 걸 입으면 광대 짓일걸.”
“말이야 맞는 말인데…….”
그건 그랬지만, 보는 눈 없는 제가 보기에도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절로 아까워지는 미라벨이었다. 원래 목적은, 그래, 모피를 재단해 장신구에 쓰는 거였지.
‘그러려면 해체해야 하는데.’
지금 앤지네와 만들고 있는 시제품은 다음달 황제 폐하의 탄신연 때 착용할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사교계 모임들에 참석하면서 선보이려 하고 있었고. 확신은 없었지만 대공녀의 판단이 그렇다면 한번 믿어 볼 법도 했다. 앤지네의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었고.
무엇이 만들어지건, 뷔욘이 선물해 준 토끼털 케이프의 빛깔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워 보일 것이기에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이게 성공한다면, 나중에 내가 스칸다르에 넘어갔을 때 제국과 새로운 교역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 독립했어도 상거래야 계속 이어갔으니까.’
왕궁 살림조차 할 수 없었던 마당에 무슨 무역 사업을 진행할지는 알 수 없겠으나…… 스칸다르에 대해 더 잘 알고 가면 이번의 셰비크 생활은 보다 낫지 않을까.
클로에는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탄신연 때까지는 전하가 여기 계실 거니까, 조만간 스칸다르로 돌아가시고 나서…… 그때 이걸 해체해서 앤지네랑 얘기해 봐야지.’
제 번민과 별개로, 선물해 준 사람에 대한 예의와 사업 계획은 적당히 안배해야 하는 것이었다.
* * *
똑똑.
“들어오게.”
집무실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이런저런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데메트리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라크루아의 전령이었다. 두 번째 온다고 익숙한 것인지, 처음의 어리바리한 기색 없이 곧장 데메트리안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 자네인가?”
“네, 나리. 아가씨께서 공녀님께 서신을 보내셔서……”
“아, 그렇군.”
그의 낯에 반사적으로 낯을 밝혀 보였던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 말고 몸을 멈추었다. 집무실을 나눠 쓰는 퓌잘리 누스가 안경을 추켰다.
‘라크루아 영애만 얽히면 정말 사람이 이상해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녀는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오직 연애 감정 하나에만 미욱한 저 동료가 해낸 일이 성과를 보여, 추가로 들어온 지방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원로원의 예산을 채워 넣는 숫자와의 싸움이 며칠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전령은 품에서 라크루아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꺼내 데메트리안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 소공작께서 대신 그 어려운 내궁 검문도 대신 통과해 주시고 또 그 어려운 황자궁 방문도 대신해 주시니 오늘도 황궁에 오는 그의 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지난번과 달리 선뜻 편지에 손을 내뻗지 않는 그의 머뭇거리는 낌새…… 전령의 마음속에는 자그마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그 크레벨 소공작이어도, 귀족 나리들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는 인류인 걸까.
그의 초조한 시선에 걸린 데메트리안은, 또 그 나름대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메리앤을 만나러 오는 날을 알아 두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지속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을 생각하면, 제가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다시 마주치고, 적당히 사이를 푸는 것이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별일 없었던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이번만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
얼핏 들어 올린 시선에, 전령의 낯이 걸렸다. 갓 성인이 됐을까 싶은 그 사내의 낯에는 소공작의 입에서 떨어질 말에 대한 불안함이 진득하게 배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사용인들의 낌새를 지각할 생각도 못 했겠지만……
“자네, 마침 내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대신 좀 해 줄 수 있겠는가?”
“예, 예에, 무슨……?”
“시내의 화원에 좀 다녀오는 일인데.”
불안해하던 전령의 낯이 밝아졌다.
‘어차피 오늘 대니얼을 만나러 가야 하긴 했으니까.’
라크루아의 전령에게 제 심부름을 보내 놓고,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편지를 들고 황자궁으로 향했다.
황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을 파견한 상단들 중 가장 먼 곳에서 오는 두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별 탈 없이 제도로 도착했다. 포털을 통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은 곳들이야 진즉에 기부금을 납부하였고.
‘그때’보다야, 상황이 훨씬 나았다.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기부금을 두 번 내게 된 곳들이 먼젓번과 동일한 금액을 내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 끌어다 쓴 원로원 예산에 손해를 입었고, 또 그런 영지들에게 세금 혜택을 주려다 보니 프레더릭이 이끄는 내무부도 살림살이가 빠듯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놈들인진 모르지만 꼬리를 잡기가 좀 까다롭게 됐네.’
그들이 재차 같은 일을 벌였더라면, 단단히 방비 중인 마법사들 중 하나라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영락없이 증발한 금액과, 거기에 마법사가 개입돼 있을 거라는 막연한 증거만으로 그 의문의 범죄 집단을 쫓아야 하게 생겼다.
심증이 가는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구휼 기금의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던 그때의 일들을 돌이키며, 데메트리안이 내궁을 통과해 황자궁으로 이어지는 정원을 걷고 있을 때였다.
황실 직계나 그들의 손님들만 다닐 수 있었기에 인적도 드물고, 그만큼 중정보다 길이 좁아 고즈넉한 느낌을 풍기는 공간이었다. 그 녹음 사이로, 채도 높은 다홍빛이 비쳤다.
데메트리안은 제가 무언가를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 머리칼의 인물을 볼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드물었지만, 있기는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본 다홍빛 머리칼의 여인이라면……
‘알레지오의 영애였었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리도테에 청강생으로 드나들며 원로 학자들이나 관료가 될 생각이 없는 명문가들의 후계자들과 안면을 익히던 시절. 제가 성취해야 할 대상에만 관심을 갖던 소년 데메트리안에게도 늘 어느 구석에서 외따로 다니던 상급생의 영애는 인상적이었다. 최선을 다해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그녀의 머리칼. 이를 감추려는 듯 늘 머리칼을 틀어 묶고 모자를 썼지만, 그렇대서 그 선명한 빛이 눈에 띄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게다가 알레지오 후작가는 상단을 직접 경영하니, 리도테 사람들에게 평판도 좋지 못해서 더 움츠리고 다니는 듯했는데.’
그런 때가 언제였냐는 양, 보닛을 쓰기야 했으나 그 아래로 제 붉은 머리칼을 굽이굽이 펼쳐낸 그녀의 뒷모습……
마른 체구는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였으나, 왠지 주눅 든 느낌을 주던 동그랗게 말린 어깨는 곧게 펴져 있었다. 이 정원을 걷는 것이 하루이틀이 아닌 것처럼 굉장히 여유로운 걸음걸이.
‘사교계 활동도 안 한다는 저 영애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외궁이나, 하다못해 황제의 직속기관이 모여 있는 내궁이라면 이해가 갔다. 관료가 아니라도 민원인들이 종종 드나드는 곳이니까. 하지만 내궁보다 더 안쪽에 자리한 황자궁은, 황실 직계에게 용건이 있을 때에나 드나들 곳이 아닌가. 제가 지금 메리앤과 대니얼을 만나러 가듯이.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와 가는 방향이 같기는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맞닥뜨리지 않도록 거리를 적당히 두고서 그녀를 천천히 좇고 있을 때, 황자궁 입구로 이어지는 그 길목에서 그녀는 다른 길을 택했다.
황자궁에서 서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그 길은 다른 나라 왕실의 손님에게 내어주는 공간이었고, 그러니까 지금 그곳에는……
‘말레카의 왕녀와 안면이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