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8)
편찮으셔서 오실 수 있으실지 걱정이라는 솔직한 답까지는 아니어도, 하다못해 막연히 오시지 않을까 하는 대꾸를 기대한 것이었는데…… 뷔욘의 반응은 명백히,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와 호형호제하시는 사이시니…… 저야 아직 들은 바는 없습니다만. 그러시는 영애께서는 여름휴가 계획이 있으신지요. 듣기로는 외가가.”
“아, 네. 제 외가가 라쥐르령을 이끌고 있습니다.”
말을 돌리고 만 것에 클로에는 두 가지로 놀랐다. 부왕을 언급했을 때의 낯선 그 표정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내 외가가 라쥐르인 것을 알고는 계셨구나.’
그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다는 라쥐르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셔서 모르시는 줄 알았건만.
라쥐르에 가 보고 싶다고 읊조리던 데메트리안의 초조한 낯이 떠올랐다. 클로에는 이런 때에조차 그를 떠올리는 스스로에게 조소하며 애써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야 매해 갔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자주 갈 수가 없지요. 오라비도 이제는 바쁘고, 아버지께서는 고티유를 좀체 비우시기 힘드신걸요.”
“그러시군요.”
그 말을 끝으로 응접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잘 배운 예법대로 다과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선 찻물 들이키는 소리도, 찻잔 내려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와의 시간이 이리 어색한 것이었나…… 클로에가 셰비크에서 그와 차를 마시던 순간들을 돌이키며 고민하던 때였다.
“제가 약조한 것이 있었죠.”
뷔욘이 문가에 시립해 있던 하녀에게 손짓했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며 뒷걸음으로 사라지는 하녀에게는, 적막했던 셰비크의 별궁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잠시 후, 하인 하나가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왔다. 스칸다르식 전통 무늬가 금박으로 새겨진 나무 트렁크는 역시 마정석으로 장식돼 있었다. 아마 안에 든 것을 잘 보존하는 마법이 걸려 있을 거였다.
“트렁크가…… 근사하네요.”
그 휘황찬란함에 조금 질리는 느낌이 드는 것을 꾹 눌러 내리며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기실 클로에가 원했던 것은…… 한들룽 지구 같은 데서, 하다못해 이곳에서라도 행상들을 직접 만나 그들이 취급하는 제품을 구경하는 거였는데.
귀족 영애가 모피를 궁금해한다 했을 때 보통 제가 의도한 대로 받아들여지기란 어려운 것일까. 클로에는 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라크루아의 영애께서 구하시는 것인데 허투루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뷔욘의 말에, 클로에는 숫제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선물을 조른 건 더더욱 아니었고 말이다.
‘그럴 사이도 안 되고.’
장갑을 낀 하인이 고요한 몸짓으로 트렁크를 여니, 그 안에는 스칸다르인들의 머리색과 같이 레몬 빛과 은빛을 띠고 있는 하얀 토끼털로 만들어진 케이프가 들어 있었다. 허리를 강조하는 제국식 드레스 위에 덧입으면 꼭 맞을 디자인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스칸다르에서 보내게 된 첫 겨울에 들었던 별궁 시녀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머, 이런 건 몇 해에 걸쳐서 만들어야만 하는 제품일 텐데요.’
‘곰베르 산맥의 산토끼 개체 수가 너무 적어서 말이죠.’
‘모피 산업을 위해 유일하게 허가받은 왕립 목축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온난한 제국에서 와 스칸다르의 엄혹한 겨울을 처음으로 맞게 된 귀비에게, 그는 아주 귀한 모피로 만든 로브를 선물했었다. 색깔은 달랐지만 꼭 이런 토끼털로 만든 것이었다.
클로에는 그 시절을 통해 얻게 된 정보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건 귀한 토끼털…… 이겠군요.”
“곰베르 산맥의 야생 토끼들이 귀한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물음표가 빠져 있는 말이었다. 클로에는 달리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아, 곧 여름이 오기는 하지만, 귀부인께 모피라면 역시 케이프 아니겠습니까. 저희 나라였다면 모를까 고티유는 겨울이 온난하니 아무래도 긴 코트는 필요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여.”
클로에의 떨떠름함을 어떻게 받아들었는지, 뷔욘이 말소리가 살가움을 담아 빨라졌다.
“이렇게까지 귀한 것이라면 대금을 어찌……”
“괴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고티유에서 가장 고귀한 영애께, 일종의 뇌물로 드리는 건데요.”
뷔욘의 눈매가 한껏 곱게 접혔다. 그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다웠지만…… 클로에는 제 마음에 피어오르는 감정에 왜 낙담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어지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제 얼굴에 난처함이 깃들어 있지 않길 바라며, 클로에는 생긋 웃었다.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입니다. 영애께서 베풀어 주신 친절에 비하면야.”
뷔욘의 미소 너머에 담겨 있는 것은, 분명 뿌듯함으로 분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에 화답하듯 클로에는 감격한 표정을 애써 만들어 냈고, 그와 별개로 제 아쉬움을 비추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까 제가 원했던 것은……
“역시 스칸다르의 자연은 신비하네요. 행상들께서는 본국으로 돌아가셨을까요?”
“그것까진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어쩐 일로……?”
구휼 기금 문제 때문에 제도에 들어왔던 행상들이 발이 묶인 것을 기억하는 클로에는, 그가 모르는 답을 확신하며 답했다.
“그 행상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싶어서요. 어머니께 비슷하게 만든 걸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클로에는 제 얼굴이 너무 절박한 빛을 띠지는 않았길 바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 클로에의 낯을, 뷔욘은 얼마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굴에 새겨진 듯 지워지지 않는 그 미소는 그가 어떤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어쩌면 무표정과도 같아 보였다.
“아쉬운 말씀을 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클로에가 기억하는 어떤 순간들처럼, 그의 눈썹이 한껏 늘어졌다. 거기에 떠오른 감정은 ‘죄송’과는 전혀 무관했다.
“그 상단과 제가 연결돼 있다는 것이 비밀이어서요. 그래서 영애처럼 영향력이 크신 분께 소개해드리기가 저어됩니다. 영애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필요하시면 저를 통해 청하시지요.”
휘황찬란한 스칸다르 왕실의 마차를 타고 그 저택에 초대받아 다녀온 아가씨가 역시나 휘황찬란한 트렁크에 커다란 무언가를 받아서 왔다는 사실은,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와아, 이게 다 뭐예요?”
“그 왕자님께 선물받으신 거예요?”
클로에와 미라벨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부터 수군대던 사용인들은, 마침내 폼폼과 쥘을 재빨리 파우더룸으로 밀어 넣어 저들의 궁금증을 재잘대게 했다. 물론 거기에는 폼폼과 쥘의 자발적인 의사가 절대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아가씨, 이러다 스칸다르 왕비 되시는 거 아니에요?”
“스칸다르 왕실은 절대 타국과 혼인하지 않는다던데.”
“꺄아, 역시 사랑에는 역경이 있어야지.”
쥘이 온몸으로 신남을 표현하듯 어깨를 으쓱대는 양에, 폼폼이 짐짓 의젓한 체하며 쥘의 옆구리를 쿡 찍었다. 그럼에도 슬며시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폼폼 역시 오늘의 이 깜짝 이벤트에 대해 궁금한 것이 퍽 많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클로에는 난처하게 웃었다.
스칸다르의 왕자와 혼인하는 건 맞았지만…… 그것이 그녀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연애결혼은 아닐 거고, 제가 정실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일전에 프래즈 부인 살롱 초대장을 구해 드렸거든. 그에 답례하신 거야.”
“아가씨도요, 참. 이 크기나 이 위용으로 봐도 단순한 답례는 넘어선 선물인데요.”
“뭐가 들었어요, 네? 이 정도면 드레스일까요? 스칸다르가 의외로 알짜배기 부국이라던데. 열어 보면 안 돼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쥘의 머리칼이 그녀가 몸을 흔드는 양에 따라 찰랑였다. 제 전담 하녀들에게 이걸 비밀로 할 수도 없고, 지금 공개하자니 뭔가 있다고 인정하는 양이 될 것 같고……
클로에가 머뭇거리는 사이, 미라벨이 과장된 몸짓으로 하인이 탁자 위에 놓아두고 간 트렁크를 열어 보였다.
“짜잔!”
“와아, 색깔 봐.”
“이게 뭐예요? 모피 케이프인가요?”
어차피 클로에의 파우더룸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녀들의 소관, 폼폼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모피 케이프를 꺼내자 쥘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빛났다.
그 반응과 비슷한 것을 아까 스칸다르의 왕실저에서 내비치지 못했던 미라벨은, 그때 뱉지 못해 근질근질했던 말을 슬쩍 얹었다.
“그 예쁜 왕자님께 네가 이런 토끼 같은 이미지인가 봐.”
“토끼?”
“귀엽잖아, 레몬 빛 토끼. 일단 토끼가 귀엽고 레몬 빛도 귀엽지. 네 머리칼이랑도 어울리고. 하긴, 케이프도 귀엽다.”
“케이프가 귀여워?”
“모피 케이프를 입을 일이 얼마나 있니, 겨울에는 무도회도 거의 없는데.”
“……그건 그렇지.”
미라벨이 뜻 없이 던졌을 말들이 클로에의 가슴에 콕콕 와서 박혔다.
보기에 예쁘고, 자주 쓰일 일 없고, 하지만 예뻐할 수 있는 것. 그 토끼털 케이프에서 클로에는 왠지 셰비크에서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보드라운 촉감을 한번 쓸어 보았다. 희귀한 품종으로부터 이만큼의 모피를 얻으려면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리고 그런 것이 그때에도, 지금에도, 제게로 왔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것이 독립국 스칸다르의 첫 왕이 셰비크의 궁인들에게 보이는 귀비에 대한 총애의 증명이었는데.
클로에는 오늘 뷔욘에게서 이 ‘선물’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감싸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부인은 제 하나뿐인 반려이시니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을 지니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에도 지금도 고운 미소를 걸어 놓은 뷔욘의 얼굴에는 뿌듯함 같은 것이 흘렀고, 그때에도 지금도 그 희귀한 토끼 몇 마리가 쓰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두 나라 사이에 복식의 유행이 다른 것을 생각하면 분명 따로 제작한 것일 거였고.
그러니까, 이는 일종의 명백한 호의였다. 셰비크에서 제가 받던 것과 같은……
그러나 클로에는 아직 제가 뷔욘의 호감을 샀다는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
황송한 마음에 고마움이 벅차오르는 것과 별개로, 클로에는 뭔가 어긋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신전에 다녀오고부터 계속 클로에를 괴롭혀 온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