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7)
저녁놀처럼 선명한 주홍빛의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 아래로 번득이는 회색 눈동자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전하께서 굳이 초대하신 손님이 있으시다니 궁금하기도 했고요.”
빤히 밖에 손님이 온 것을 알면서, 여인은 여전히 자리에 평온히 앉아 있었다.
다홍빛 머리에, 회색 눈동자라. 클로에는 그 여인의 생김새에서 대번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알레지오 후작 영애인가.’
알레지오 후작과 무서우리만치 닮아 있는 눈매며 콧대 하는 것들이, 클로에는 초면에도 그녀가 알레지오 후작의 딸임을 알 수 있었다.
‘알레지오 상단이 스칸다르산 마정석을 유통하니 거래 관계에 있으신 건 알았지만…… 사적으로도 관계가 깊으신 거였나?’
그렇다면 그 교류는 고티유에 계신 시절에 그쳤던 걸까? 제 부군이 된 미래에서 그는 고티유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지만, 후작뿐 아니라 그 영애와도 교류하는 것을 보면 후작가와 꽤 깊은 연이 있었던 것이렷다.
‘알레지오 상단이 셰비크에 공식적으로 다녀간 적은 없었는데……’
클로에는 예법에 맞지 않는 줄 알면서도 뷔욘의 어깨너머로 그 영애를 살폈다. 마른 체구에 걸친 드레스는, 그 원단이 고급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디자인만 보고서 그처럼 부유한 집안의 영애로 보지 않을 법도 했다. 지식인 계층의 여성들이나 입는 상의와 하의가 따로 된 드레스였으니까. 다만 늦봄의 따스한 날씨에도 레이스로 덮여 목까지 올라오는 네크라인이 특이할 뿐이었다.
‘프래즈 부인이 즐겨 입으시는 거랑 또 좀 다르네. 그러고 보니 말레카에서는 목이 파이지 않은 드레스를 선호한다고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저보다 몇 년 먼저 리도테를 졸업했다던 그녀가 말레카에서 유학이라도 했던 걸까? 그렇다면 그건 알레지오 상단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신전에서 제이크 콜린스를 마주친 이후로 상거래에 손댔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았던 클로에는, 또 다른 ‘사업하는 여성’의 등장에 일순간 흥미가 돋았다.
‘캄포 대공녀도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저도 모르게 호의적인 마음으로 그녀를 살피려던 그때.
뷔욘의 뒤편에 서 있는 클로에를 발견한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어떤 인사치레나 예의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어서…… 클로에는 뒷덜미가 쭈뼛하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것이 일종의 적의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클로에의 얄팍한 호감은 깨어지고 말았다.
한참 클로에를 뜯어보던 눈동자가 뷔욘에게로 돌아갔다.
“그럼, 용건 끝난 저는 정말로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 뷔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에 쥔 부채로 장갑을 낀 제 손을 탁탁 치고 있었다.
클로에의 눈앞에 자리한 뷔욘의 어깨가, 짐짓 위로 부풀었다.
‘아, 화나셨다.’
제 부군은 기본적으로 제게 늘 온유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클로에의 앞에서 분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이 깊이 숨을 들이켜는 때면 넓게 펴지곤 하던 그의 어깨.
‘이런 막무가내가 용납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건가?’
지금의 뷔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그 어떤 것이리라 클로에는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 영애의 행동은 여전히 모든 것이 느릿느릿이었다. 한쪽 눈을 덮을 듯이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천천히 문 쪽으로 나와 뷔욘에게로 바싹 가까이 다가섰다.
숨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뷔욘을 향해 빛내는 그 눈동자에는 수만 마디 단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거의 어깨가 부딪힐 듯한 거리에서 치맛자락을 잡아 약식으로 인사하는 것을 클로에는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약조드린 대로 진행토록 하고, 또 연락드릴게요.”
그녀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문에서 비켜선 뷔욘을 스쳐 지나가는 내내, 영애의 시선은 뷔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고티유 사교계에서 볼 수 없는 예법이었고……
기실, 클로에가 아는 이 시대의 그 어떤 예법에도 맞지 않을 거였다.
그녀가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아서일지도, 또 어쩌면 그만큼 뷔욘과 친근해서인지도.
클로에는 불쾌해할 것이 분명한 뷔욘의 기색을 숨죽여 살폈다. 저의 존재를 완벽히 무시하고 가 버린 그녀의 무례함도 잊어버린 채.
저택의 하녀들이 테이블을 치우고 새로 내온 다구는 모두 마정석으로 장식된 것들이었다. 클로에가 제 부군의 서재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손잡이를 따라 쪼로록 달린 마정석들이 기능보다는 장식에 더 치중되었는지, 차의 향을 은은히 북돋는 정도의 기능만 부여된 것 같았다.
뷔욘은 조금 전 분노했던 사람 같지 않게, 다시 고운 미소를 그려 넣은 채 클로에를 대했다.
“라크루아의 영애께는 무엇을 대어도 모자라겠습니다만, 그래도 제집에서는 가장 특별한 찻잎입니다. 입에는 맞으십니까?”
“예, 이게 호펜차, 맞지요?”
“……매번 박식하심에 놀라게 되는군요.”
뷔욘의 연갈색 눈동자가 찻잔 너머로 클로에를 살폈다. 클로에는 마주 생긋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은 철렁했다. 그런 그의 기색이, 황궁의 중정에서 알뫼 정원에 대해 주워섬길 때와 같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맛있다고나 할걸…….’
스칸다르의 고산지대에서 나는 찻잎을 스칸다르 전통 방식으로 덖어서 만든 차. 클로에가 셰비크의 왕궁에서야 처음으로 맛보고 즐기게 된 차였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알은체를 해 버렸더니, 또 괜한 수상함을 산 것만 같았다.
‘낭패다…….’
클로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치 이 차향을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굴려고 노력했다.
“책에서 묘사한 그대로의 향이 나네요.”
‘책’이라는 단어를 굳이 강조하면서, 클로에는 스스로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 전환.
“곧 방학이시죠. 여름휴가는 가시는지요?”
“글쎄요. 제게야 딱히 의미가 있나요. 고국에 갈 수도 없고.”
뷔욘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올라갔다. 제가 스칸다르에 간 뒤에 어머니가 여름 휴가지를 셰비크의 별궁으로 정했듯이 여름에야말로 북방의 스칸다르가 지내기에 쾌적한 곳일진대, 볼모인 처지에야 그에겐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또 눈치 없는 질문을 했네.’
제가 여름마다 어머니의 고향인 라쥐르 공작령에 방문하듯, 혹여 제국 내의 어딘가로 휴가 다니는 그만의 습관이 있을지 싶어 물었던 바인데. 그의 처지를 괜스레 상기하게 한 것 같아 클로에는 관자놀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열몇 해 동안 휴가를 한 번도 안 다니셨나? 이 시절에 어찌 지내셨는지 아는 바가 없네. 또 여쭤볼 수도 없고.’
호감을 사려는 거였지, 눈치 없는 이로 낙인찍히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클로에가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있대도, 모두 고티유의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것이나 제가 사교 모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일들처럼 아주 파편적이고 피상적인 것들뿐이었다.
세 해를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러고 보면 제 부군이기 이전의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영애에게 화나신 걸 눈치챘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나 봐.’
괜히 말을 돌리려다가, 또 이상한 지뢰를 밟은 느낌이었다. 굳이 꺼낼 말도 아니었는데.
사실 이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음 달이면 그가 어떤 계획을 세웠든 다 무용해지게 되니까.
‘황제 폐하 탄신연 지나고서였지, 부왕 전하께서 위독하시단 소식이 퍼지고 전하께서 귀국하시게 된 게.’
얼마 후면 고티유의 사교계에도 알음알음 소문이 돌 일이었다. 스칸다르가 아무리 폐쇄적이어도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제후국들의 사정에 대해 첩보를 전해 받고 있는 황제라면 이미 파악한 내용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다음 달에 치러질 황제의 50세 탄신연에 황제의 아우를 자처하는 그가 불참함으로써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끝내 뷔욘 스칸다르가 귀국하면서 확정될 것이었다.
‘어쩌면…… 전하께서는 지금 소식을 들어 알고 계실 수도 있겠지?’
클로에는 뷔욘의 낯을 살폈다.
볼모로서 제국을 벗어날 수 없는 제후국의 후계자. 고티유를 벗어나려면 황제의 윤허가 필요했고, 제 모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고향에는 십여 년간 돌아가지 못했을 사람. 어쩌다 한 번씩이나마 스칸다르의 왕실이 제국의 행사에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 가족조차 만날 수 없었을 거였다.
‘이때 생활이 정말 외로우셨겠지. 그런 걸 여쭤보진 못했지만……’
클로에는 추후 제가 알게 될 그의 가족에 대해 떠올렸다. 저와 그의 국혼이 있고서 얼마 뒤, 지방의 별궁으로 내려가 교류가 사라진 뷔욘의 모후와 그 여동생. 그러고 보면, 그에게 가족은 결국 저 하나였다.
그래서였을까. 원로원의 반대에 저를 정실로 입적시키진 못하였으나, 그는 늘 정비를 들이지는 않을 것이라 거듭 강조하곤 했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갈 약속인지는 몰랐지만 그렇게 말해 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클로에는 그때 저의 외로움에, 지금 뷔욘이 감당하고 있을 외로움을 덧그려 보았다.
그때, 그가 고티유의 가족들에 대해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었지.
“스칸다르의 부왕께서는……”
클로에는 조심스레 그의 낯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와 부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 외로움의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에게도 역시 가족은 애틋하리라.
“이번 탄신연 때에 오실는지요? 올해는 50세연이라 화려하게 치러질 거라 들었습니다.”
“글쎄요.”
고운 미소를 그려 넣었던 그의 낯에 일순 실금이 가는가 싶더니,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클로에는 그 표정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