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6)
클로에는 보름 전, 제가 도망치듯이 떠나왔던 일을 떠올렸다. 신전에 다녀와 수심에 빠져 있을 때에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얼굴. 제가 겁도 없이 누군가의 미래를 휘둘렀을 거라 걱정하던 때에, 이미 너무나도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던 그의 얼굴.
아마, 데메트리안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없었더라면 클로에가 그 자리를 도망치듯이 떠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랬기에, 행복하지 않았기에 그가 제게로 도피하려는 걸까?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온 이래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고, 저에 대한 열기 같은 건 전혀 감출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그는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클로에가 기억하는 미래에 확실한 것들은 그런 연애 감정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클로에가 작은 사업을 벌이고, 루시엔과 안면을 트고, 라이언이 의상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앤지네가 스칸다르의 모피를 다루게 되겠지만……
꾸깃.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루시엔의 편지가 구겨지고 말았다.
아는 사람이면 이럴 수 없다.
‘어차피 2년 뒤에는…….’
* * *
“데미. 아무래도 클로에를 마주칠 수가 없구나.”
“……!”
크레벨 가족들이 간만에 다 모인 식탁 앞에서 제 어머니가 내뱉으시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식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일순간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흠흠.”
“사레들리셨으면 물 드세요.”
크레벨 공작부인이 무심한 눈동자로 제 남편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큰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캐리언 백작부인이 초대장을 보냈다고는 하는데, 못 온다고 답신이 왔대. 저번 주말 알로제 후작저 정찬회도 그렇고.”
데메트리안은 진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단둘이 있을 때 부탁드린 것을 왜…….’
혼약을 거부하겠다고 말씀드린 이래로 아버지와 어색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하필 이 자리에서 클로에 이야기를 꺼내실 게 뭐람.
“그냥 네가 직접 만나서 주렴. 네 방에 갖다 두라고 할게.”
“……네에.”
직접 줄 수가 없으니 어머니께 부탁드린 거였는데.
데메트리안은 제 관자놀이에 부딪히는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애꿎은 스테이크 조각만 후벼 잘랐다.
“그나저나 요즘 클로에를 사교계 모임에서 통 볼 수가 없어. 작년에 다녀 보니 재미없었던 걸까?”
“글쎄요. 사교계 활동을 일종의 의무로 생각하는 클로에가 단순히 재미를 기준 삼아 판단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요.”
제 맞은편에서 동생 루이폴트가 예의 그 문어적인 말투로 대꾸하는 것에,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뭘 안다고?’
한 인간 개체로 관찰한 바를 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와 같은 종류의 관심일까 날을 세우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 동생을 상대로.
데메트리안은 요즘처럼 제가 한심하다고 느낀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그때’에도, 무력하다고 여길지언정 한심하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그래도 알로제 후작저 연회에까지 안 올 줄은 몰랐어. 멜라니랑 친한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알로제 후작 영애 멜라니와는 리도테 동기여서 그 댁 초대에 불응할 리가 없는데.
‘일부러 마주칠까 봐 이번엔 모시러 가지도 않았는데.’
어느 봄, 정찬회에 참석한 어머니를 모시러 갔을 때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튀어나온 클로에의 얼굴.
‘멜라니가 우리 데미 공자님께 인사하고 싶대!’
‘아,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알로제 영애,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네, 부인. 오늘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부인. 잘 가, 데미.’
제 어머니에게도, 저에게도, 저를 수줍게 바라보던 알로제 영애에게도 공평하게 생글대던 그 얼굴.
‘뭐…… 사람은 바뀌니까…….’
제가 어머니를 모시러 가지 않았듯이, 클로에도 정찬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였다. 어쩌면 저를 마주칠까 봐 오지 않았을 수도…… 거기까지 생각한 데메트리안은 쓰게 웃었다.
‘내가 로이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얼마 전 만났던 클로에의 사람들. ‘그때’에도 클로에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데메트리안의 상념을 깬 것은,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풍기는 크레벨 공작의 한마디였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우리들 얘기 좀 합시다.”
“크레벨이 무슨 식사 자리에서 대화나 하던 가문이었던가요?”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가문 얘기를 하자고 원로원 얘기를 꺼낼 거라면 넣어 두세요. 말마따나 간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린데.”
공작부인이 하늘색 눈동자를 빛냈다. 어떤 단호함을 띠고 그녀의 눈동자가 빛날 때면, 한겨울의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눈치채지 못할 수 있었을까. 큰아들이 기어코 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던진 것을.
열흘도 넘게 같이 일하는 큰아들과 입궁도 귀택도 따로 하고, 무슨 대역죄인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그를 보는 시선이 으르렁거렸던 걸 보면 알아차릴 수밖에. 그게 아니라면 큰아들이 저들 속을 썩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낳아 준 게 무슨 유세라고 젊은 시절 철없는 장난을 자식에게 짐 씌우나요? 잘못한 건 공작님이죠.’
괜히 그렇게 속 긁는 말을 지나가듯 뱉으며, 공작부인은 공작에게 그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못 박아 놓은 차였다.
끄응, 제 부인이 무슨 의도로 자꾸 클로에 얘기를 꺼내는지 모를 리가 없는 공작은 타는 마음에 목만 축일 뿐이었다.
‘이 공주님은, 남의 속도 모르고…….’
* * *
라크루아 궁정백저 앞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하나가 도착했다. 상아색으로 칠해진 몸체에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그 마차의 창문 밑으로는 스칸다르 왕가의 문장이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나가며 보면 모를 거였지만, 궁정백저의 사용인들이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아가씨, 오늘 가신다는 약속이 스칸다르 왕자님을 뵙는 거였어요?”
집사로부터 스칸다르 왕실저에서 보낸 마차가 왔다는 말을 들은 폼폼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약속이 있으시다기에 치장해 드리기는 했는데, 그냥 가끔 가시던 대로 사교계 다과회에나 가시려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미인 왕자님 말야?”
“응, 그러니까! 맞아요, 아가씨?”
귀족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용인들의 세계에서도 스칸다르의 왕자는 유명했다. 미소가 아름다운 미인이라거나, 사연이 있어 보이는 미인이라거나, 어디서나 빛나는 미인이라거나, 아무튼 어떠한 미인이라는 식이었다.
왕자님에 대한 소문이 긍정적으로만 난 것에는 그 저택에 제국인이 사용인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부리는 사람에게 마냥 좋은 생각만 할 수는 없는 게 인륜이니까.
“아아, 응. 맞아.”
“아니, 왜 미리 말씀 안 해 주시고요!”
“왜?”
“그야, 저번처럼 예쁘게 꾸며 드리려고…….”
클로에의 머리 장식을 돕고 있던 쥘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정혼자가 있는 크레벨 소공작에 비하면, 저희들 같은 사용인들 세계에 들려오는 염문 하나 없는 제후국의 왕자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었다.
“괜찮아. 그럴 것 없어. 충분히 좋아.”
클로에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점검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부군께서는 제가 의식하지 않은 때에도 저를 이미 은애하셨다니. 여느 사교계 모임에 참석할 때의 이 정도면 괜찮을 거였다. 폼폼과 쥘의 얼굴에서는 안타까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제후국의 볼모인 스칸다르의 왕자가 머무르는 곳은, 부유한 평민들의 저택들이 모여 있는 1지구에서도 귀족들의 타운하우스 밀집 지구와의 경계에 자리해 있었다. 그래서 스칸다르 왕실저가 자리한 호이제르 거리 맞은편에는 귀족들의 으리번쩍한 취향들이 잔뜩 버무려진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애.”
그 호화로운 저택들의 맞은편,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스칸다르 왕실저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뷔욘이 클로에를 맞았다.
“오시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마차를 타고 다니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꽤나 화려한 마차를 소유하고 계셨군요?”
“부왕께서 스칸다르도 나름 부유하다고 자랑하시고 싶으셨던 것인지 마련해 놓으셨더군요. 제게는 어울리지 않아서 저는 다른 걸 타고 다닙니다만.”
뷔욘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를 연모하는 영애들이 들었다면 그 어떤 화려한 마차도 님의 미모를 가리울 수 없을 거라 감읍할 말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안으로.”
대대로 스칸다르의 후계자들이 머물렀을 그 3층짜리 저택은 지금까지 클로에가 오며 가며 본 타운하우스 중에서 가장 단출해 보였다. 정원은 간신히 구색만 맞춰 놓은 수준이었고, 사병을 거느릴 수 없어서인지 뒷마당도 따로 마련되지 않은 듯했다.
‘스칸다르 왕실을 기죽이려고 이런 정도로밖에 허가를 안 내줬나?’
예전에는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뷔욘은 아마 이 저택에 머무르는 마지막 후계자가 되겠지. 자그마한 연민의 마음과, 그에 당연한 듯 따라붙는 미래에 대한 설렘이 피어올랐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죠.”
열린 현관문 안으로 보인 풍경은…… 그의 말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외관에서 느낀 자그마한 연민을 다 잊을 만큼. 누추하다는 표현은 기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자신감에서 온 것이리라.
저택 벽면을 장식한 곰베르 산맥 특유의 연보랏빛 곰 가죽 장식 하며 서대륙에서 넘어왔을 신묘한 무늬의 카펫, 저택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갖은 보석으로 장식된 마정석 램프들까지.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호화로움으로만 따지면 셰비크 왕궁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와아.”
스칸다르 왕실저에 도착한 이래로 열리지 않았던 미라벨의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배어났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소박한 외관의 저택 내부가 이리 휘황찬란하게 채워진 것에 경탄하는 것이 실례일지, 셰비크의 기억을 바탕으로 태연하게 반응하는 것이 실례일지 고민하며 조금 놀란 눈빛만 만들어 낼 뿐이었다.
“손님이 오시는 일이 드문지라, 정돈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대대로 사용한 집이라 좀 어수선합니다.”
“어수선하기는요,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걸요.”
클로에는 반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걸 어찌 받아들인 것인지 돌아보는 뷔욘의 낯에, 조금 기묘한 미소가 떠오른 듯도 했다.
그렇게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밝은 금발의 사용인들이 응접실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왜 아직.”
“저, 전하……. 아직 영애께서.”
문틈으로 보이는 응접실 안에는 이미 사용된 듯한 다구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선객이 있었던 모양인데, 아직 치우지 않은 것일까.
“아직 안 가셨습니까.”
어쩐지 선득하게 뷔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선객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였다.
“간다고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걸요.”
가냘픈, 그러나 쨍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