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5)
“아무래도 돈벌이를 하는 건 귀족 영애의 소양에……”
“로이.”
아, 맞다.
클로에는 다시금, 제가 어머니의 성미에 대해 잊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스무 살로 돌아온 뒤로 새로이 꾸미게 된 바깥의 일들에 더 마음을 쏟느라, 다시 잊었었다고 해야 할까.
‘로이, 넌 너무 고지식한 구석이 있어. 네 아빠의 그런 점이야 사랑스럽다만…….’
늘 바르게만 행동하려는 클로에를 두고, 어머니는 늘 아쉬운 듯이 말씀하시곤 했었더랬다. 유년 시절에는 친구들이 하자는 소소한 일탈도, 미라벨이 조르는 과격한 놀이도 모두 고사하고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지내더니, 사교계에 데뷔하고 나서도 어디 연회에 가도 자정이면 들어온다며 답답하게 산다고 놀리곤 하셨었지.
그런 어머니의 미소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흥미로움이었다.
“귀족 영애의 소양 같은 게 법에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니. 불법을 저지르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럼 됐어. 이문은 좀 남니? 돈을 잃어 보는 것도 큰 경험이 될 텐데. 네 투자금이 상업 지구에도 소소하게 도움이 될 테니까.”
궁정백부인은 클로에가 제 작당을 털어놓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말 어딘가에는 클로에의 고민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한번 솔직해진 김에 클로에는 요즘 저를 괴롭히는 골칫거리까지 내보이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 있어요.”
“무슨 고민?”
“제가 하는 일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이 돼요.”
“피해라니?”
“저 때문에 얻어야 할 이득을 못 얻는다거나……”
“어머, 이 아가씨 좀 봐.”
궁정백부인이 입을 벌려 깔깔 웃었다. 라쥐르의 바다를 보며 자란 어머니는 가족들과만 있을 때면, 이렇게 체통도 잊고 천진한 웃음을 짓곤 했다.
“로이. 혹시 누구를 협박했니?”
“아뇨…….”
라이언을 회유하려고 조금 겁을 줬던 것도 같았지만, 궁정백부인이 생각하는 것은 그 수준이 아닐 거였다.
“그럼 혹시 누굴 다치게 했어?”
“아니죠.”
“사기를 친 것도, 불법을 저지른 것도 없지?”
“설마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네 쌈짓돈으로 무슨 독과점을 저질렀을 것도 아니고.”
“…….”
그런가? 대수로울 것 없는 문제인가?
어머니께서 어떤 조언을 주실 것을 바라고 털어놓은 것이긴 했지만, 고민할 거리조차 아니라는 양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클로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동안 끙끙 앓았던 건데……’
“네 성정에 그러지도 못했겠지만, 혹여 네가 일로 한 일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대도 그건 경쟁의 과정에서 나온 일이야. 그들은 운이 없었거나 자기들의 준비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상대가 자기에게 피해 입혔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기꺼이 경쟁하려고 뛰어든 업이고, 각자 본분에 맞게 해 나가면 되는 일인걸.”
자선사업을 할 것도 아니잖니, 그리 덧붙이며 궁정백부인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제게는 취미인 일이, 제가 한들룽 지구나 아티장 지구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생계인 데서 오는 마음의 빚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생각하다 보니 상상의 나래는, 원석 유통 점유율이 떨어져서 서민 지구 어디선가 술을 퍼마실 행상 아무개에 대한 죄책감으로까지 번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경험은 앞으로 네가 앞으로 무얼 하든 다 네 생각의 자산이 될 거란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예법 같은 것보다 말이지.”
가문의 명예며 귀족 영애의 몸가짐처럼 제가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어머니…… 그 별난 성미를 감당할 수 없다 여긴 세월도 길었지만, 어쨌든 그녀 덕분에 클로에는 며칠간 저를 짓누른 어려운 마음들을 가볍게 털어낼 수 있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별말을 다. 기왕이면 많이 벌고.”
둘만의 티타임이 끝나고 클로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자리를 떠난 테라스에서, 궁정백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로이가 이제 좀 똘똘하게 구는 것 같아.”
“마님도요, 참. 마님 눈이 높으신 거지, 아가씨는 원래 누구보다 영리하신데요.”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커튼 너머에 있던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말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뭐랄까. 로이는 욕심이 없었잖아.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건 그렇지만요.”
조금 전까지 클로에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궁정백부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엄마, 있잖아요, 요즘 들어 그 크레벨 애송이가 수상쩍게 굴어서…… 아이, 참. 로이가 울더라니까요.’
제 앞에서만은 여전히 철없이 구는 딸이 분에 못 이겨 투덜대던 말. 이를 떠올리며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작게 미소 지었다. 화가 나서 말을 못 만들어 낸 건지, 자세히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 불친절한 불평에서도 남작부인은 중요한 정보를 알았다.
요즘 아가씨와 크레벨 소공작 녀석 사이가 뭔가 심상찮구나.
“그나저나, 어떻던가?”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종자라는 소년은 한들룽 지구 플로리안 거리에 있는 정장집 아들이에요. 대를 이어 그 자리에서 장사한 가게여서 근처 주민들과도 사이가 좋고, 단골들 사이에도 평판이 좋아요. 어디 빚을 진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소년이 최근 돈이 급한지 비행을 저지르려는 듯한 낌새가 있어서 인근 주민들이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로이가 사람 하나 살렸군.”
“마법사는 오리포네 출신이고, 재작년에 마탑에서 서임을 받고 의무 복무 기간을 고티유 길드에서 보내고 있는 자입니다. 교외에 있는 마탑 소유 주택에서 지내고 있고, 같이 지내는 마법사들 역시 모두 길드에 소속돼 있습니다. 길드가 알레지오와 제휴돼 있어서 다들 알레지오의 일을 돕고 있고요. 기본적으로 고티유에 연고가 없는 자들만 고티유에 파견 나와 있으니 아가씨의 일이 외부에 퍼질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기, 혹시 몰라 더 조사한 내용이고요.”
남작부인이 소매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얼핏 보기에 장신구가 포장되어 있을 법한 그 벨벳 상자 안에는, 남작부인이 간만에 실력을 발휘한 것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들어 있을 거였다.
“역시 자네가 있어서 든든해. 애들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인데.”
이런 말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 어디로 튈지 너무 잘 알겠는 제 자식들을 떠올리며 궁정백부인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지난번 공작저에서의 티타임 이후로 아가씨와 크레벨 소공작이 만난 것은 총 세 번입니다. 첫째 주 숲의 날 캔달우드 공녀를 만나러 황궁에 가셨을 때 어찌 알았는지 마중 나와 있었다고 하고, 그날 저녁 대니얼 2황자와 셋이 만찬을 가졌다고요. 그 주 바람의 날 밤에 크레벨 소공작이 밤에 잠시 다녀갔고, 그 다음 주 물의 날에 독서 모임을 가지셨는데 그날 이후로는 만남이 없습니다. 라비 말로는……”
남작부인이 최근 미라벨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전했다. 클로에의 반응이 어땠는지, 미라벨의 평가는 어떠한지…… 정확히 말하면 미라벨이 두서없이 떠든 것을 제가 알아서 정리한 거였지만.
그저 가장 가까운 혈육에게 그날의 일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미라벨은 어느새 충실한 정보원이 되어 있었다.
“역시 자네를 들인 건 내가 고티유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영광이라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그러니까, 스무 해 전의 일이었다.
길드의 높은 수수료에 진저리를 치며 오늘도 퇴단하고 싶다며 용병 거리에서 술을 들이붓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웬 아기 새 같은 남자랑 한 침대였고…… 그렇게 갑작스레 들어선 애였지만 이 김에 퇴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더랬다.
그런데 그 남자가 사실 제가 궁정백가의 가신이어서, 꼭 인사드려야 한다며 데려온 타운하우스에 이 마님이 계셨지.
평소 암살 임무를 수행하러나 들어가던 귀족 저택에 대낮에 들어선 것도 어색하고, 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도 어색하고,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이 마님의 눈빛만은 어색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 눈빛.
‘하르젠 상단의 호위 일을 하다가 지금 고티유에서는 용병 길드에 속해 자객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을 시험해 보고팠던 치기였을까. 제 정체를 굳이 술술 읊으니 남편 될 자도, 궁정백저 사용인들도 대경실색하는 가운데 이 작은 마님만은 태연하게 대꾸하셨더랬다.
‘첫째가 병치레가 많아서 둘째를 얼른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마침 잘 됐군. 여기서 몸 풀고 아이들 유모로 있어 주지 않겠나? 내 말벗도 해 주고.’
그 작은 마님 덕분에 수도에 저만의 거점을 마련한 남작부인은 수수료 걱정 없이 밤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남작부인의 위명을 듣고 대륙 안팎에서 실력자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해결사 집단 농브르.
그러니까, 디나 앙 같은 라크루아의 경호조 모두 남작부인의 작품이었다.
“애들 몇을 크레벨에 붙이겠습니다.”
“그래. 캄포 대공 쪽도 주시하는 게 좋겠어. 데메트리안 그 녀석이 진심이라면 거기에도 무슨 변화가 있겠지.”
……다만 가끔 너무 사적인 지령이 내려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나 때문에 라이언도 삶이 바뀌긴 했지. 경시청에 잡히지도 않고, 순조롭게 의상실에서 수학할 돈을 모으게 됐고…… 라구 경도 조금 여유로운 돈을 버니 뭔가 달라지긴 했을 거야. 범죄자들은 범죄를 안 저질러도 됐고. 좋은 일밖에 안 했네?’
어머니와의 대화 덕분에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버린 클로에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양 두 통의 서신이 찾아왔다.
「얼마간 뵙지 못해서 서신을 보냅니다. 슈바츠 거리의 경매장에 가 보셨나요? 이번에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물건이 나온다 하여 가 보려는데, 혹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면 어떨지 싶어서요.
루비 드림.」
「일전에 말씀드린 행상이 고티유에 당도했습니다. 편하신 시일을 알려주시면 마차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영애와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요.
경의를 담아, 뷔욘 스칸다르.」
이미 제가 흔들어 버린 미래는, 클로에를 예측하지 못했던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캄포의 대공녀와 별명 같은 것을 서로 허락한 사이가 되어 버렸고, 이때쯤 제게 ‘마주치면 예쁘게 웃어 주시는 왕자님’ 정도에 불과했던 미래의 부군에게서는 티타임을 청하는 연락이 왔다.
고민할 것도 없이, 클로에는 뷔욘에게 먼저 답신을 썼다. 부군께서 고티유 시절에 저를 남몰래 은애하고 계셨다 하니 더 친해지는 것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반면……
‘캄포 대공녀와 외출이라…….’
제게 한들룽 지구에서 오며가며 알게 된 지인보다는, 제 첫사랑의 정혼자인 시절이 압도적으로 더 긴 그 이름. 그녀가 제게 보내는 호감이, 이해가 갈 듯 안 가는 듯도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걸 받아들이면 아마.’
그렇게 되면 아마, 돌이킬 수 없이 그녀와 교분을 만들 수밖에 없을 거였다.
톡톡, 클로에는 만년필 꽁지로 제 입술을 두드리며 고민했다. 그 고민의 중심에는 당연히,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동동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