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1)
클로에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신전 뒷마당을 한참 거닐고 있었다. 사제들의 성소로 이어지는 곳이어서 마차도 오갈 수 있도록 꽤 넓게 조성된 공간이었지만, 몇 번을 왕복해도 뛰는 심장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클로에는 맞잡은 양손을 슬며시 입가에 갖다 대었다.
그러는 양을, 미라벨은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인가 보네.’
오늘은, 그러니까 지난달에 신청하고 간 대신전 보물고 견학이 예정된 날이었다. 왠지 낯이 익은 그 신관을 다시 보고 싶어서, 스칸다르에 있을 때의 그 ‘손님’과 꼭 닮은 그 신관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대축일 주간에 상경한 김에 대신전에 잘 보이려고 보물고 견학을 하고 후원금을 내려는 지방 귀족들이 수많았던지라, 이제야 클로에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안내를 맡은 안톤미오노입니다.”
“지평선의 평균율을. 라크루아의 클로에입니다.”
신관 안톤미오노가 교단의 예법대로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에, 클로에는 그를 지나치게 흘끔대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주 합장했다.
“오늘 뜻깊은 시간 잘 부탁드립니다.”
“지평선의 평균율을. 영애를 모시는 누아제트의 미라벨입니다.”
“라크루아에서 주신의 영광에 관심을 다 가져 주시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제국의 대지에서 단비를 맞는 이는 모두 주신의 작은 싹 아니겠습니까.”
신전 예법에 걸맞도록 잘 꾸며낸 말로 대꾸하며, 클로에는 천천히 고개를 드는 안톤미오노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 클로에의 마음은 예정된 혼란에 빠졌다. 귀족 영애로서의 소양을 되새기며 얼굴에 미소를 띄워 간신히 감출 수는 있었지만.
‘정말 맞네.’
흐린 눈썹, 한쪽 볼에만 있는 보조개, 눈가의 점. 미끈하나마 아래로 길어 다소 강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콧대와 귀밑으로 불거진 턱.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얼굴이어서 얼굴의 골격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클로에가 셰비크의 왕궁에서 마주쳤던 손님의 특징만은 확연했다.
클로에가 걱정했던 대로였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신의 종으로서 흐뭇합니다.”
안톤미오노가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입꼬리가 보조개가 난 쪽으로 올라가 비대칭적인 호선이 그려졌다.
‘아아, 마마께서 같이 넘어오신……’
‘이보게.’
클로에가 제 부군에게 긴한 볼일이 있어 기별 없이 본궁의 집무실을 찾았던 어느 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매캐한 연기를 따라갔더니 응접실에서 제 부군과 함께 여송연을 태우고 있던 그 손님.
안톤미오노의 미소는 그가 클로에를 흘기며 짓던 삐딱한 미소를 빼다 박았다. 그것이 풍기는 뉘앙스는 다를지언정.
‘하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 입매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미소 너머에서 너울대던 무언가가 마음에 매섭게 박혔기 때문이었다.
적의였을지, 비아냥이었을지.
그게 무엇이든 클로에는 초면의 상대가 보이는 선명한 감정에 당황한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손님과 안톤미오노가 다른 것이라곤 손님이 핼쑥해 보이리만치 말랐었다는 것, 안톤미오노의 미소에 깃든 인자함이 손님에게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안톤미오노가 풍성한 연황갈색 머리칼을 지녔다는 정도일까.
“자, 그러면 이쪽 계단으로 내려가시지요.”
“네.”
“그 유명한 신전 지하에 다 들어가 보게 되네요. 어렸을 때부터 소문 진짜 많이 들었는데.”
클로에의 공적인 자리에 따를 때면 입을 잘 열지 않는 미라벨도, 뭔가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는지 평소처럼 조잘대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대신전의 지하는 고티유 제도민들 사이에 으스스한 괴담을 만들어 내기에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으니 그런 풍문도 생기나 봅니다. 하지만 두 달이 모두 그믐인 날이면 악마가 드나든다는 말은 사실일 수 있답니다. 그땐 사제들도 성소에만 머물러서 알 수가 없거든요. 이따 악마의 발자국을 보여드리죠.”
보물고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안톤미오노가 농담을 적절히 섞어 가며 신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을 이어 나갔다. 제국 연방이 에르드를 섬기는 만큼 대부분이 경전 속 내용과 연관된 상식적인 이야기였지만, 신전에 장식된 부조나 성화들을 갖고 하는 설명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시계 방향으로 쌍둥이 사도인 뷜과 에시스의 순례를 그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장면 바로 뒤에 주신의 축복으로 해결되는 과정이 옴으로써 뷜이 왜 행운의 사도가 되었는지 알 수 있죠.”
“그렇군요.”
“이 아기 사도 입상은 베람입니다. 아기의 몸을 하고 있지만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의 것이고 무구를 제대로 갖춰 입은 걸 보면 전쟁과 미의식의 사도임을 알 수 있죠.”
“정말 그러네요.”
적절한 추임새를 넣으며 경청하는 척했지만…… 정작 클로에는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심지어 제 수호 사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그것은 이 투어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에마저 달라지지 않았다.
“자, 이곳이 바로 보물고입니다.”
대신전 지하의 복도 한쪽 끝을 가득 메우고 있는, 높이로도 너비로도 보통 문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은 보물고의 입구. 안톤미오노는 연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담당자인 저와, 대신관님만이 이 문을 열 수 있죠. 여기 이 부분에 손을 대면.”
그가 과장된 손짓으로 양쪽 문이 맞물린 곳의 손잡이가 있어야 할 부분을 덮고 있는 둥그런 부조 장식에 손을 갖다 대었다.
“호오.”
“우와아.”
그의 신성력에 반응한 것인지, 그 장식이 엷은 빛을 틔우면서 두 영애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런 때조차, 클로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다른 생각이었다.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머리도 그리되고, 어쩌다 스칸다르로 넘어와서 왕궁에 드나드는 손님이 되시는 걸까? 지금도 전하와 친분이 있으실까……?’
제 기억 속 손님의 모습과 안톤미오노의 외모, 그 간극에서 불어나는 수많은 의문과 그에 대한 추측들이 제멋대로 가지들을 뻗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보물고 견학은 약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안톤미오노가 선사하는 이야기들은 책이나 직접 살았던 미래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 많았기에, 클로에는 집중하지 못하면서도 적당히 알아들은 체할 수 있었다.
그 보물고에 누가 드나들 수 있었는지, 보물고에 교단의 다른 어떤 보물들이 있었는지, 소장품들은 또 어떻게 보관돼 있었으며 도난당한 진품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짜 성배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성배가 도난당한 이후 주신의 세 성물에 관한 별의별 이야기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이 보물고에 대한 이야기 또한 큰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교리에 관심 없던 사람이라도 상식으로 외우게 됐을 정도로.
사교계의 모든 이들이 모였다 하면 주신의 성물에 대해 입을 모아 떠들던 그 시절.
“보물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캄포의 성배죠.”
그리고 이 순간만은, 클로에도 머릿속의 혼란을 잊고 잠시간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기 장식된 여덟 사도의 상징석들은 에르드의 심장이라 불립니다.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어 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사도들을 하늘로 불러들이신 대신 인류에게 여덟 가지 축복과 함께 선사하셨다는 증거라고들 하죠.”
‘하나라도 잃으면 황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되찾아야 할 걸세.’
저와 신병을 맞바꾸게 될 오래된 성물, 제가 지금 어떤 삶을 꾸리더라도 결국 정해져 있을 그 미래, 그리고 저처럼 그 나라로 이주하게 될 에르드의 신관……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떨려 오는 손을 꼭 쥐었다.
“귀중한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주신의 영광을 자매님들과 나눌 수 있어서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한 시간짜리 견학이 끝나고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온 뒤, 클로에와 미라벨은 안톤미오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저, 신관님. 혹시 개인적인 걸 좀 여쭈어도 될까요?”
클로에에게 익숙한 그 비대칭적인 입매로 인자한 사제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클로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해 두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견학을 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생각들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여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말이 나왔지만.
“개인적인 것요? 어떤……”
“혹시…… 스칸다르 쪽에 친족이 계신다거나.”
안톤미오노의 얼굴이 살포시 굳어졌다. 미소가 있던 자리에 슬금슬금 들어오는 것이 당혹이든 불쾌든 선명해지기 전에, 클로에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제 지인이…… 스칸다르 출신이고 어려서 가족을 잃었다는데, 신관님과 많이 닮아서요.”
눈썹을 한껏 늘어뜨려 안타까움을 가장하면서, 클로에는 제가 지어낸 말이 쓸데없는 수작으로 보이지 않길 바랐다. 루카에게 한번 써먹었던 핑계인지라 과연 애쓰지 않아도 절로 살이 붙었다.
안톤미오노의 눈빛이 불안하게 빛났다.
“아, 하하, 그러셨습니까.”
그가 웃음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에는 웃음기가 빠져 있었다. 클로에는 그가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웃는다고 생각했다.
“제 머리 색을 보면 아마 확률이 낮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죠.”
스칸다르인들은 모두 연한 금발을 지니고 태어나니까. 민머리여서 당연히 스칸다르인처럼 금발을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손님을 떠올리며, 클로에가 어색하게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네.’
다행히도 그의 얼굴에 다시 인자한 미소가 돌아오는 기색에, 클로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혹시 여기서 성소로 바로 연결되는 복도를 이용할 수 있나요?”
“성소에 볼일이 있으십니까?”
“네, 사제 루카미오노를 만나고 가려고요.”
“아…… 그와 친분이 있으시군요.”
인자한 미소가 다시금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하긴, 루카가 대신전 식구들하고 사이가 좋기는 어렵겠지.’
대신전에 배속되어 오자마자 개인 응접실 딸린 방까지 제공받는 파격 대우를 받은 주제에, 귀찮다면서 연차가 낮다는 핑계로 신관 보직을 마다했으니 미운털 박힐 만도 했다. 그러면서 심심하다고 친구들이 보러 와 주기를 어찌나 바라는지, 오늘 잠시 얼굴이라도 비추지 않으면 마음 상해 할 거였다.
안톤미오노가 애써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너머의 떨떠름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후원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도록 하지요.”
안톤미오노와의 보물고 견학 시간을 돌이키며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칸다르에서 무탈하게 지내려면 머리색을 들키면 안 되니 밀었던 거겠지. 그런데 에르드의 사제가 왜…… 제국 연방에 속해 있을 때에도 주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스칸다르고, 독립하고서는 더더군다나……’
에르드의 사제가 퇴직해서든 어떠한 이유로든 다른 나라에 갔을 때 가장 위화감이 큰 나라를 꼽으라면 바로 스칸다르일 것이었다.
‘차라리 왕자님과 친분이 있으신지 여쭐 것을 그랬나.’
그러고 보면 아까 만들어 낸 질문은,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을 섞는 바람에 철없어 보였을 테니까.
보물고 견학을 두 번 신청할 수도 없고, 대신전의 고위 신관을 따로 만날 명분도 없는데. 생각이 좀 짧았지…… 그리 자책하던 차였다.
“로이!”
멀리서 저를 지켜보고 있던 미라벨이 다가오며 그 반대편을 눈짓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주춤대며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닌가.
평민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라이언처럼 키가 컸지만 어깨가 둥글게 말려 있어 왜소해 보였고, 혈색이 창백해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을 띠고 있었다.
미라벨이 크게 경계하지 않는 기색인 걸 보면 숨겨진 무위가 있는 인물도 아닐 거였다.
“저, 혹시 라크루아 영애님이신가요……?”
“그렇소만.”
지척에 다가온 남자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자. 클로에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지 않도록 신경쓰며 대꾸했다.
“아, 영애님, 이렇게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다니 정말 주신께서 도우시는군요.”
“내가 그대에게 사례를 받을 일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