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11)
앤지네와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소재를 써 보고 싶어서인지, 앤지 부부가 여름 상품으로 개발 중인 머리 장식 견본에 한번 적용해 보겠다고 선뜻 나선 것이었다. 이 아가씨께서 웬 장난을 치시는 건 아닌지 의아해하는 듯한 기색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오래 거래하고 지내 온 앤지네라지만 혼자서, 그것도 단순히 상품을 맞추려는 게 아니라 구두로나마 사업 제휴를 마치고 나오자니 내딛는 발걸음이 벅차올랐다.
“그럼 라이언이 모자나 가죽 장인 구해 오는 거는? 그건 안 해?”
“곧 여름이잖아. 그건 천천히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내가 요즘 연회도 잘 안 나가고.”
“그래, 어차피 갈 거라면 폐하 50세 탄신연이 딱이지…… 어?”
고개를 주억거리던 미라벨이 내는 소리에, 클로에는 덩달아 그녀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알고 온 거 아니지?”
“……몰랐어.”
골목 건너편의 대장간에서 뷔욘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 것인지 로브의 후드를 덮어 쓰고 있었지만, 그의 밝은 금발이며 새하얀 얼굴이 가려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느낀 뷔욘이 고운 미소를 얼굴에 걸며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또 뵙네요, 영애.”
“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왕자님?”
클로에가 당황한 낯을 감추고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를 해 보였다.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야 특별한 일이 아닐진대, 이 왕자님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대는 것이었다.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부군을 뵈어서 반가워서일까.’
뷔욘 또한 고개를 까딱여서 그 인사를 받았다.
“예, 덕분에요. 영애 분들께서 이쪽에 오시는 건 별로 본 적이 없는 듯한데……”
“그런가요? 저희야말로 자주 오지만 왕자님을 뵙는 건 처음인걸요.”
“그러셨습니까.”
뷔욘의 곱게 웃고 있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슬쩍, 클로에의 뒤로 비껴 선 미라벨에게로 향했다.
한들룽 지구에 다니면서 맛을 들인 바지를 이곳에까지 입고 온 미라벨의 옷차림을 뷔욘의 눈이 무감정하게 훑었다. 그가 저들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눈매를 굳히고 있던 미라벨이, 그런 시선이며 표정을 눈여겨보았다.
‘로이는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마치 매제감을 심사하는 마음일까. 미라벨의 눈빛에는 일말의 책임감마저 서려 있었다.
“호위…… 분의 무구를 보기에는 이곳이 딱 알맞은 동네죠.”
호위라뇨, 물어보려던 클로에가 제 뒤에 있는 미라벨의 옷차림을 재빨리 떠올리고는 모호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 올렸다. 제가 젖자매라 소개하며 다니기는 하지만 이런 차림새로는 영락없이 시녀보다는 호위로 보일 거였다. 호위가 맞기는 하지만.
클로에는 그저 뷔욘이 민망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살갑게 말을 덧붙였다.
“이쪽은 제 젖자매인 누아제트 남작 영애예요. 연회에 자주 다니지 않아서 아무래도 낯이 익지 않으시죠. 저는 그냥 어머니 심부름으로 온 걸요. 장신구 주문할 게 있어서요.”
“아, 어쩐지. 그렇다면 장인들을 저택으로 부르시지 않고요?”
“제가 이 지구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해서요. 구경할 것도 많고 하니까요. 그래서 심부름하게 해 주시라 졸랐답니다.”
“아하, 영애께서는 퍽 활동적이십니다.”
경탄하듯 대꾸하는 뷔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티장 지구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클로에의 뻔뻔한 말을 들은 미라벨의 눈 역시 가늘어진 것은 덤이었다. 예전에는 마르코네 가잘 때마다 떨떠름해 하더니.
‘그런 부인께는 역시 이 셰비크 궁이 좁은 거지요.’
제 뒤에 있는 미라벨의 표정을 알 리 없는 클로에는 언젠가 들었던 부군의 말을 떠올렸다.
‘하긴, 스칸다르의 여인들은 밖에 잘 나가지 않으니까.’
드디어 밤이 깊어 그가 제 처소를 드디어 밝힐 때면, 궁 안에서만 머무르는 제 일과에는 조잘조잘 보고할 바가 별로 없어 곧잘 적막해지곤 하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미리 더 가까워져 놓으면, 분명히……
“왕자님께서는 대장간에 검을 맡기러 오셨나요?”
“예에.”
뷔욘의 얼굴에 그려졌던 미소가 살포시 깨졌다. 그 간극을 숨기려는 듯 그는 뒤이어 느릿하게 덧붙였다.
“제 호위의 검이죠.”
“아.”
실수했네. 클로에는 슬며시 입술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뷔욘이 검을 수련하는 것은 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늘 호위를 대동하고 다녔고,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검술 교양 수업조차 듣지 않았다고 했다. 무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던지 실수로라도 제가 검을 쓴다는 사실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황자들과 친목을 다질 겸 대련을 벌이는 일조차 없었다. 일국의 후계자가 검을 배우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실제로 부군이 새벽마다 근위대원들과 대련을 벌이시는 걸 보고서 얼마나 놀랐던지. 꽤나 거칠고, 한편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던 그의 검술. 고티유의 영애들이 알면 또 자지러질 거리였다.
그런 것들을 재빨리 돌이킨 클로에가 어색하지 않게 말을 이었다.
“대장간에서 나오시길래 짐작해 본 것뿐이에요.”
언제 미소가 깨졌었냐는 듯, 뷔욘이 다시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자주 오지는 않긴 합니다. 오늘도 좋은 우연이네요.”
“스미더스, 저기 저도 알아요. 제 남동생이 소년 병사단에 들어갈 때에 제 오라비가 마정석이 달린 검을 저기서 맞춰서 선물해 줬거든요.”
“저희 나라와 오랜 거래 관계에 있기는 하지요.”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지오 후작과 그 상단도 그렇고, 스칸다르의 마정석 산업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새로이 보이는 게 많았다.
“참, 제가 일전에 행상을 소개해 드리기로 했었죠.”
“아, 네, 맞아요. 그러셨었죠.”
마침 스칸다르의 모피를 구해서 앤지네에 견본 상품 제작을 맡기고 나온 터라 괜히 가슴이 철렁이는 것 같았다. 비밀이랄 건 아니지만, 스칸다르의 무언가를 이용한 것이라 그에게는 숨기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고티유에 자주 오가는 행상이 있는데, 이번에 올 때 괜찮은 것을 구해 오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어머.”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반짝였다. 중고품 시장에 다시 가면 못 구할 것은 없었으나, 양지의 경로를 통해 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점이 있었으니까.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처음으로 거래하는 상단이 생길 수도……
클로에가 한 손을 가슴에 놓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여 다시금 인사했다.
“마음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왕자님.”
“별말씀을요. 영애께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제 기쁨입니다.”
클로에가 인사하는 양을 쳐다보던 뷔욘의 눈이 조금 더 깊게 휘어졌다. 한걸음 떨어져서 서 있던 미라벨은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로이를 볼 땐 이렇게 사람처럼 웃기는 하는데 말야.’
뷔욘이 천천히 손을 뻗어 클로에의 앞에 내밀자, 클로에는 미미한 머뭇거림을 감춰 두고서 가슴에 놓았던 손을 그의 손 위로 옮겼다. 고작 몇 번 있었던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하는 양에, 클로에는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셰비크에서는 작별할 일이 없었으니 손등에 키스를 받을 일도 없었는데. 뭔가 연애 비슷한 것 같네…….’
클로에의 손등에 입을 깊게 묻었던 뷔욘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들이 고티유에 오면 제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뷔욘이 고개를 까닥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반대편으로 떠났다. 뒤에 서 있던 그의 호위, 디에크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라벨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데. 역시 데미 공자가 더……’
결국 대결 한번 해 보지 못할 디에크와의 눈싸움을 클로에가 안타까워하는 줄도 모르고, 미라벨은 제 생각에 빠져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저 왕자님을 마주칠 때마다 데메트리안의 안색과 비교하게 되는 건 매제 심사관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왕자님의 호위는 사실 미라벨에게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했다.
“왕자님께서 도와주시면 물량도 걱정 없으니, 탄신연 때까지 견본만 잘 준비해 보면 되겠다.”
“잘 됐네.”
앤지네와의 일과 뷔욘의 호의까지 더해져 눈을 빛내고 있는 클로에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미라벨의 마음은 걱정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더 좋아하면 뭘 하나. 마음 하나 제대로 표현할 줄을 모르는데.’
미라벨은 며칠 전 클로에를 따라 황궁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모시는 분들이 독서 모임을 하시는 동안 파이겐과 다른 응접실에서 서로의 무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급히 원로원 시종이 찾기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 건강한 애가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고 재빨리 찾아가 보았더니, 클로에는 원로원의 빈 회의실 한 곳에 들어가 빨개진 코와 눈으로 훌쩍이고 있었다.
‘로이, 무슨 일이야? 데미 공자랑 싸웠어?’
‘……아냐, 그런 거. 그냥 일단 귀택하고 싶어.’
아직 마음이 안 풀린 것인지 그날의 일에 대해 클로에가 이야기해 준 바는 아직 없지만,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데메트리안이 지금껏 클로에에게 해 온 양을 보면.
‘데미 공자가 밉다고 괜히 더 마음 가는 건 아닌지 몰라. 좀 알아먹게 얘기해 줄 걸 그랬나.’
* * *
“단주님, 전달 드리고 왔습니다.”
“그래.”
“위험부담이 커졌으니 제도 내 수송에만 총력을 기울이라십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새로운 의뢰도 들어왔습니다.”
“이따 다 들어오면 한 번에 얘기하세.”
이올린 한센은 한들룽 지구 구석진 곳에 마련된 숙소의 제 방 안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배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난달 임무 결행일 바로 전날에 정보가 샌 곳도 알 수 없이 체포되어 문초받을 때에 얻게 된 증표였다.
이올린은 뭔가를 안다는 듯이 지껄이던 오만한 애송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순히 독립 의도를 외치려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너희를 후원하는 누군가의 뜻일 텐데. 그는 너희를 어떻게 하려고 할까.’
그 애송이가 지껄이는 말을 가당찮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듣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던 말이 마음에 박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르투젠 황실에 호의적인 스칸다르의 현 왕이 즉위하고서 분리 독립파의 입지가 약해졌음에도, 대대로 분리 독립파를 이끌어 온 핵심 세력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동지가 없으면 없는 대로 물자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껏 선조들이 해 온 활동을 이어 갈 뿐이었다. 어쩌다 가끔 스칸다르의 귀족들이 적선과도 같은 후원금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면서.
10년쯤 전에 저희를 찾은 그분은, 그래서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최대한 소란을 키워라. 너희들이 판을 만들면, 내가 꿈을 이뤄 주겠다.’
‘너희의 신념을 돈으로 사겠다는 거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았다. 이올린이 단주가 되고서 처음으로 정기적인 후원을 약속해 주신 분이었으니까.
덕분에 분리 독립파의 활동은 활기를 띠었고, 새로운 단원들도 종종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만큼 있던 동지들이 제국에 체포되어 떠나가기도 했지만.
하지만 최근 ‘그분’이 지시하시는 일을 생각하면……
이올린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단주님, 마법사가 왔습니다.”
“기다리라고 해라. 곧 나가겠다.”
이올린은 창문으로 기울어져 들어온 햇살이 제 손안의 배지를 비추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곰과 사도의 날개가 그려진 가문의 문장이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너희의 ‘그분’이 너희들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을 시키려고 하면. 그래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진다면 내게 찾아오게.’
이올린의 손끝이 라피스라줄리로 장식된 크레벨 공작가의 상징인 곰의 머리 부분을 한없이 문지르고 있었다. 마치 그 손길이 보석의 뿌예진 부분을 닦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리하면 저의 번민에 무슨 묘수라도 떠오를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