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10)
라이언이 궁정백저에 드나든 지도 벌써 3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대문에 들어서면서 쭈뼛대던 것이 일주일에 두 번씩 드나들다 보니, 이제는 문지기나 다른 사용인들과 어설프게나마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아가씨의 바깥일을 돕는 소년이라는 정도로 인식되면서였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모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선선해질 때까지 기다릴까?”
“이 빛깔들이 은근히 계절을 안 타는 색이라 괜찮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좀 신비롭잖아요. 모피인데 은회색이니, 회보라색이니.”
오늘 라이언의 방문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어졌다. 보통은 정화한 보석을 매각한 내역을 보고하고 정산한 뒤에 라구에게 맡길 보석을 받아 가면 끝이었는데, 오늘은 중고품 시장에서 구해 온 스칸다르산 모피들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작은 회의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거 자체로 모피 소품에 활용하기는 좀 그렇지?”
“네, 아무래도 고티유 의상실에는 모피는 검은색, 갈색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모피가 주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개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염색을 할까?”
“아주 독특한 색으로 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을 거예요. 염색하는 과정에서 털의 윤기가 떨어질 우려도 있고요.”
평소의 소극적인 말투를 벗어던진 라이언은 오늘의 회의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패션에 있어 간신히 체면을 차릴 정도의 안목만 있었고, 미라벨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라이언은 패션을 배우겠다고 탈법 행위까지 서슴지 않으려던 소년이었던 것이다.
“마법으로 염색하면?”
스칸다르의 마도구상이 선보였던 마정석 장신구 중에 머리칼에 윤기를 더한다거나 색을 다르게 해주는 것들도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미라벨이 말했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아는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음……”
라이언이 한참을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전 이 본연의 색깔을 활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보는 어두운 색깔의 모피랑 윤기나 털의 질감은 동일한데 색깔은 왠지 더 신비하잖아요. 이런 색은 염색으로 낼 수도 없고요.”
담비 털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라이언을 보며, 클로에와 미라벨은 한번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예의 그 귀족적인 하관을 앙다문 채로 생각에 빠져 있는 라이언의 표정은 평소의 그 뭔가 허술한 것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뭔가 사교계에 유행시킬 만한 게 없을까 싶어.’
클로에는 라이언에게 의견을 구하면서, 고티유 사교계의 이목을 반짝 끌어올 만한 것을 추구한다고 언급했다. 희소하기 때문에 경쟁을 붙어서라도 독점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은 것으로. 보석상에 팔면 그만인 보석과 달리, 빈티지 의상실에 팔 수 없는 스칸다르산 모피를 활용할 길은 그것 하나였던 것이다.
‘모피라는 고급 소재에 내 이름이 붙으면 같은 디자인이라도 가격을 크게 올릴 수 있을 거랬지, 대공녀가.’
클로에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것은, 또 루시엔의 조언 덕분이었다. 서로에게 암호와도 같은 별명을 만든 그날, 제가 준 선물에 감명이라도 받은 것인지 몇 번을 감탄하던 루시엔이 적극적으로 조언을 주고 나선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에둘러 소개하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사업 계획이라도 짜 줄 기세였달까.
“저평가된 것을 제값에 파신댔죠.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끔 해 보세요. 영애께서 사교계에 갖고 있으신 영향력을 활용해서요.”
“제가 무슨 영향력이 있다고요……?”
클로에는 사교계의 꽃으로 칭송받고 있는 저보다 몇 살 연상의 앨포드 후작 영애를 떠올렸다. 그런 것을 읽기라도 했는지, 루시엔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사교계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 꽃만이던가요? 꽃이란 말도 우습지만. 그렇다면 코르셋 한번 조여 본 적 없을 황자들이며 소공작들, 하물며 사제 루카미오노 같은 사람들은 왜 영향을 끼치나요?”
“그들이야 나름으로……”
나름대로 아름답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 말을 하면서 클로에는 루시엔이 사교계 지형에 박식한 것에 새삼 감탄했다.
‘어쩐지 나도 알아보더라니. 듣는 바는 다 있다 이건가……’
루시엔은 흥분을 감추지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들의 후광은 권력이에요. 마침 영애도 갖고 계신 그거요. 영애가 당장 내일 코르셋을 안 쓴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간대도, 겉으로는 경악한 척해도 다들 제 나름대로 장점을 찾으려 애쓰게 될걸요. 다음번엔 누군가는 따라 입고 오고요. 하물며 장신구라면요.”
그러고 보면 확실히, 대축일 주간 첫 무도회 때에 클로에가 크레벨 온실의 아네모네를 꽃팔찌에 쓴 이후로 아네모네의 인기가 조금 오르긴 했었다. 다과회에 초대되어 갈 때마다 아네모네를 메인으로 한 센터피스들이 장식되어 있다거나, 초상화를 그릴 때에 아네모네를 소품으로 활용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요즘에 내가 다과회에 안 다녀서 모르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클로에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라이언은 여름용 중절모나 레이스 장갑에 포인트 장식으로 얹는다거나, 손지갑이나 부채에 달 참 장식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일단 견본을 좀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아. 우선 네가 올여름에 유행할 것 같은 모자나 장갑 샘플을 좀 구해 오렴.”
“아, 의상실에 가서요…….”
벌써 한 달째 동업 중인데 라이언은 아직도 영애님들 드나드시는 곳이 낯선 모양이었다. 빨개지는 라이언의 노숙한 낯을 보면서 미라벨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이죽대기 시작했다.
“너 진짜 대축일 주간엔 어떻게 그러고 다닌 거야? 가면 없어서 그래?”
“문장 배지 저택 출입증으로만 쓰지 말고, 내 이름 팔면서 내가 보냈다고 그래.”
“네, 네에.”
“혹시 시범 제작을 맡겨 볼 만한 장인들도 알고 있니?”
“음, 모피는 고급 의상실에서만 쓰긴 하는데…… 가죽 공방을 알아보면 될 듯해요.”
가죽 공방…… 클로에는 가장 최근에 교류하게 된, 뭔가 툭 치면 정보를 우다다 내뱉을 것 같은 지인을 떠올렸다. 마침 그녀가 피혁을 유통하니 한번 물어볼까,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짐짓 내저었다.
며칠 전 그날 이후로 괘씸한 데메트리안을 그녀와의 관계에서 빼기로 다짐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보석 장식도 할 수 있을까?”
“가방이나 벨트에 버클을 다는 걸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 평판도 좋고 실력도 좋고…… 기왕이면 너희 가게와 앞으로 좋은 연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 알아보렴.”
“저, 저희 가게요?”
“그래. 정장하고 가죽 소품은 한 세트 아니겠니?”
클로에는 2년짜리 제 장난에 휘말린 평민 소년에게 제 안목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장난치고는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지만…….
라이언의 눈에 감격이 차올랐다. 말을 다정하게 하지는 않으셔도 마음 쓰시는 바가 황송하기 그지없는 주인님이신 것이었다.
“아, 주인님. 이거 라구 경이 충전하셨다고요.”
라이언이 감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일전에 데메트리안과 라구를 소개해 줄 때 썼던 원거리 통신구의 마력이 다 떨어져 라구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계속 갖고 있기로 했어? 그 경이랑 연락할 일이 많으려고.”
“혹시 모르니까. 급히 연락할 수단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클로에가 마력 충전을 다시 맡긴다는 것이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겠다는 방증으로 느꼈는지,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라구의 목소리가 한껏 즐거워진 것은 덤이었다.
다음 날 클로에는 간만에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아티장 지구로 나섰다. 라이언에게 알아보라고 한 것과 별개로 귀족 영애의 눈으로 봐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오시…… 아니,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 가게가 이렇게 생겼었군?”
“필요하신 물품이 있으면 저택으로 부르시면 될 것을요. 들어오세요.”
장신구 공방 ‘앤지네’의 주인장 부부 중 남편 쪽인 한스가 클로에와 미라벨을 맞아들였다. 그가 안내한 접객용 테이블은 그 용도로 쓰이는 일이 별로 없는지, 그 위에 잡다한 공구들과 리본 쪼가리, 금속으로 만든 나뭇잎이나 날개 모양의 장식들, 다채로운 빛깔의 깃털 견본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걸 치우는 한스의 손길이 당황한 기색을 어지간히도 드러냈다.
“이것 참, 영애님들 대접할 차나 변변히 있는지 모르겠는데. 앤지, 나와 봐! 라크루아 아가씨께서 오셨어!”
“아가씨께서 오셨다고?”
가게 안쪽의 작업실에서 돋보기안경을 끼고 황급히 나오던 앤지가 아이쿠야, 다시 돌아서고는 안경을 벗고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으며 허둥지둥 나왔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셔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를 부르시면 될 것을요.”
“갑자기 손님 맞는 게 귀찮아서 부부가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고, 영애님도 참요. 오신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앤지네는 앤지가 태어났을 무렵에 그녀의 부모님이 열어 지금까지 2대째 내려오고 있는 곳이었다. 앤지의 어머니가 라크루아 모녀의 단골 의상실 안드레아에서 소품을 만들다 독립한 것이 인연이 되어, 라크루아와 수십 년째 거래를 이어 오고 있었다. 때문에 라크루아의 모녀가 쓰는 머리 장식은 모두 앤지네에서 나왔다.
“집에 몰래 자네들에게 부탁할 게 생겨서 말이네.”
“어머, 영애님. 사춘기도 아니시고. 아이고, 영 내 드릴 다과랄 게 없네요.”
궁정백부인과 비슷한 연배의 앤지가 얼음을 넣은 레몬수와 몇 가지 비스킷을 내며 말했다.
“대접받자고 온 건 아니니 걱정 말게. 자네들에게 공범이 돼 달라고 조르러 왔는걸.”
“무서운 소리 마세요. 고티유에서 어떻게 라크루아의 눈을 피해요?”
클로에가 앤지의 너스레에 웃으면서 미라벨에게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이게 했다. 중고품 시장에서 구한 것 중 은회색의 담비 털이었다. 어느 빛깔의 머리칼에도 어울릴 색으로 고른 것이었다.
“스칸다르산 담비일세. 빛깔이 독특해서 혹시 여름 장신구에 활용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이게 담비 털이라고요? 색이 너무 다른데요?”
“곰베르 산맥 동물들이 이렇다고들 하더군. 익숙한 빛깔이 아니다 보니 고티유에는 잘 안 들어온 모양이야.”
“장식용 모피를 한참 봤지만 살면서 처음 들어요. 아가씨는 이런 걸 어찌 구하셨대요? 스칸다르에 다녀오시기라도 하셨어요?”
앤지가 한스와 담비 목도리를 뒤적이며 하는 말에 미라벨이 작게 웃음을 짓는 게 느껴졌지만, 클로에는 그냥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쓸 만해 보이는가?”
“예, 뭐, 재단이 많이 된 게 아니라 활용하기도 편할 것 같고요, 삭은 부분도 없네요.”
“그런데 이걸 갖고 뭘 하시려고……?”
모피를 살피던 앤지와 한스의 눈에 호기심이 깃드는 걸 살펴본 클로에가 자못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이 수락해 주길 바라는 절박함을 잘 감춘 채로.
“이 모피를 활용해서 머리 장식을 개발해 주게. 내가 이번 황제 폐하 50세 탄신연에 하고 가면 자네들에게로 주문이 들어오지 않겠어? 앞으로 내가 계속 스칸다르산 모피를 댈 테니 투자금으로 치고 수익을 나누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