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9)
클로에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클로에의 얼굴은 떨떠름한 듯 굳어져서…… 어쩌면 마레와 라쥐르에서 싸늘하게 굳었던 그 얼굴과도, 또 공작저에 놀러 왔을 때 제 시선을 피하던 얼굴과도 맞닿아 있었다.
정작 말을 내뱉은 클로에도 제가 울려 버린 신경질적인 어투에 놀라 있었다. 덩달아 굳어 가는 데메트리안의 얼굴……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는데.
“아니, 그냥. 이상하잖아.”
더듬대며 제 당황한 낯을 숨기려는 클로에의 눈동자와, 왠지 모를 낭패감을 역력히 띠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중간 어스름한 곳에서 열없이 마주쳤다.
그 사이에 흐른 얼마간의 침묵.
‘이게 아닌가?’
데메트리안은 며칠 전 밤에 보았던 미라벨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가 제게 주문한 것은 다른 것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제가 세웠던 명확한 절차를 놔두고, 미라벨의 불확실한 눈짓을 제멋대로 해석하고서 그에 따른 것뿐…….
‘역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거였나.’
겸연쩍어진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미세한 낭패감이 깃들었다.
그 낯을 보고 있자니, 클로에는 자연스레 지난 주일 밤 키슬라바산 에메랄드를 들고 황궁을 향해 달리던 마차 안에서의 상념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루시엔의 다양한 얼굴을 접하며 떠올렸던 바로 그 의문.
‘데미는 행복하지 않았어서, 그래서 이리 구는 걸까?’
그래, 제가 스무 살로 돌아온 그날부터 뭔가 달라진 듯이 구는 데메트리안이라면……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낮의 클로에에게는 그것을 내뱉을 용기가 없었다.
답을 들어 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묻어 두는 편이 현명한 거야.’
모든 것을 털어놓고, 궁금한 걸 나누어 봤자 달라질 건 없는데. 괜한 애달픔이나 더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데메트리안이 루시엔과 잘 맞을지 아닌지를 추측하는 것은 쥐가 하는 고양이 생각일 거였다. 평생을 살아온 나라에서, 자유롭게 부모님과 친구들과 오가며 외롭지 않게 지낼 두 사람을 걱정하는 것 말이었다. 고작 두 사람이 안 맞는 정도야……
거기까지 생각이 흘렀을 때, 클로에는 저를 바라보던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로이……?”
후두둑. 저도 모르는 새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가, 이윽고 볼을 타고 흘러내려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어, 나 왜……?”
클로에 스스로도 당황했고, 그보다 더 당황한 데메트리안은 손수건을 다급하게 꺼냈다. 데메트리안이 그걸 손에 쥐여 주려고 할 때……
“미안. 나 오늘 일찍 가 볼게.”
클로에는 이 자리에 남아 있지 않는 편을 택했다.
‘데미랑 만나면 자꾸……’
단단한 것만 같았던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 나니까.
원망할 것은 사실 자꾸만 흔들리는 저라고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애써 상황과 데메트리안을 탓하기로 했다.
쥐여 주지 못한 손수건과, 남은 티푸드와 함께 선물하려던 온실의 꽃이 담긴 상자만이 응접실에 남았다.
* * *
크레벨의 모든 식구들이 공작저에 돌아와 있는 늦은 저녁. 데메트리안은 제 서재에 틀어박혀 저의 낭패감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을 드러내 버리는 게 아무래도 문제인 걸까.’
제가 미라벨의 눈빛을 오해했기 때문일까. 클로에의 앞에서만은 제 마음에 솔직하게 행동하기로 한 것이,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행한 것이 클로에를 불쾌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어 버렸다.
데메트리안이 클로에가 우는 것을 본 것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고, 그걸 보는 마음은……
‘울 것 같은 얼굴만 봐도 가슴이 아팠는데.’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 또 ‘돌아오고’ 나서……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 표정.
또, 제 잘못이었다. 루카미오노를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며 타박을 듣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루카는 분명 사정을 몰라도 ‘형편없는 새끼’라면서 이죽거릴 거고…… 기실, 그건 제가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은 바였다.
클로에가 떠나가 버린 원로원의 응접실에서, 클로에에게 주려던 모든 것들이 남겨진 그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서, 데메트리안은 클로에를 잃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클로에를 한 번 잃었었고,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제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야 할까. 역시 그뿐일까.
그때, 데메트리안의 머릿속에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다시금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도 같다.
‘비겁하게 굴지 마.’
아니, 제가 들어야 할 말은 그게 맞았다.
똑똑.
“아버지, 첫쨉니다.”
“들어오너라.”
육중한 나무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문고리를 돌렸다.
“허허, 네가 집에서 웬일이냐, 내 서재엘 다 오고.”
머리를 식히려던 건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던 크레벨 공작이 안경을 벗으며 큰아들을 반겼다. 아무래도 일터에서 함께 일하다 보니, 집에서는 아버지와는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위스키까지?”
“오래간만에 아버지랑 단둘이 한잔하고 싶어서요.”
그것도 제가 직접 위스키와 얼음 바스켓, 잔을 챙겨 들고서.
“허허, 별일이 다 있구나.”
부인이 ‘키우는 맛이 없어요’라며 아쉬워하곤 할 때에 그 지분을 독식하던 큰아들이, 웬일로 진득이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 있을 때만 와서는 앉지도 않고 용건만 이야기하고는 곧바로 나가던 무뚝뚝한 아들이었는데.
요즘 들어 뭔가 일터에서 교류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듯해졌다 싶더라니, 아비인 제게까지 바뀐 태도를 보일 줄 몰랐던 크레벨 공작은 흥미로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소파로 향했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티가 났나요?”
머쓱하게 웃는 것이 저리도 어색할 데가. 젊은 시절의 저도 그러지는 않았는데, 마치 ‘가주’ 그 자체로 살아가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양 뻣뻣하게 자라난 아들을 보면 부인의 아쉬운 소리가 이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크레벨 공작이 제 검푸른 빛깔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스체르바뇰의 위스키인 게냐?”
“네, 얼마 전에 사교클럽에 갔다가 알게 된 로스첸트 자작이 선물해 와서요.”
“그래, 네가 웬일로 마지막 주도 아닌데 사교클럽에 나타났다는 얘기가 원로원에 파다하더구나.”
“알아볼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데메트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퓌잘리 누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식들을 물색하러 갔다가 허탕을 쳤던 그날의 기억……. 대충 무슨 사정인지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크레벨 공작은 제 잔에 얼음과 위스키를 채우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과의 친목이 크레벨에 번거로움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까.”
“예, 그런 것 같더군요…….”
데메트리안은 이번에 황실 마법사단을 설득하던 과정을 돌이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황실 마법사단 설득하느라 애먹었다고. 그래, 다른 수도 안 써 보고 왜 저들에게 심증만으로 책임을 지우냐며 강짜를 부리면 도리가 없지.”
“그래도 이제 해결됐으니까요. 당분간은 숨 돌렸습니다.”
크레벨의 부자는 그렇게 최근의 공무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거니 받거니 위스키를 두어 잔씩 비웠다.
그렇게 병에 든 것을 3분의 1쯤 비웠을 때였다.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안 하던 짓까지 다 하는 거냐.”
크레벨 공작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그……”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이렇게 말을 꺼내길 어려워하는 건 처음 보는구나.”
“…….”
이리 말해야 할지, 저리 말해야 할지 제 용건을 미루고 또 미루며 변죽만 울리는 제가 스스로도 어색하던 차였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바라는 일이니까……
데메트리안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대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태우는 증류주의 홧홧한 감각이 그에게 어떤 용기를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꿀꺽, 침을 삼키고 데메트리안은 입안에서 수십 번을 굴렸던 그 말을 뱉었다.
“아버지께서 캄포의 대공과 맺으신 정혼을, 제게서 물려 주십시오.”
위스키 잔을 흔들던 공작의 손짓이 멎었다. 달각, 얼음이 미끄러져 유리잔에 부딪혔다.
“두 분께서 어린 시절부터 지켜 오신 언약임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도 어렵게 승인해 주신 혼약이고요.”
제 아들의 말 너머에 깔린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는 크레벨 공작의 검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것을 상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공작은 어느새 비어 있는 아들의 잔에 위스키를 다시 흘려 넣으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질책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기심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크루아의 딸 때문이냐?”
“그 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데메트리안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아무와도 혼인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계자야 루이폴트의 자식을 입양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루이폴트를 후계자로 지목하셔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데메트리안은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덧붙였다.
원로원 의장인 아버지의 체면이 있어 제국 아카데미에 다니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리도테의 대학원로 돌아가 뼈를 묻길 바라마지않는 루이폴트가 들었다면 기함할 소리였다.
‘고작 이런 이유로 아버지께서 나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치지는 않으시겠지만…….’
그 말에서 보이고자 한 그의 의지가 크레벨 공작에게도 가닿았는지, 데메트리안이 빼닮은 그의 각진 하관이 단단히 굳어졌다.
공작은 말없이 제 잔의 위스키를 비웠다. 데메트리안이 그의 잔을 채우고, 제 잔도 다시 채운 뒤 다시 비우고…… 크레벨의 부자가 위스키 병을 다시 반쯤 비웠을 때였다. 얼음만 남은 잔을 잘게 흔들며 주시하던 크레벨 공작의 무거운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너는 그 정혼이 ‘맹세’인 걸 잊은 게냐? 거기에 크레벨이 무엇을 걸었는지도?”
그 말에, 데메트리안은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크레벨이 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