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8)
프레더릭의 말에는 웃음기가 빠져 있었다. 농담으로 해야 하는 소린데, 밤의 유능함을 믿는 것인지 그는 굳어진 표정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늘 잘생긴 왕자님 미소를 짓던 모습만 봐 왔던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그의 비밀스러운 구석을 발견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가고 싶은 나라 있나?”
걱정도 잠시, 프레더릭은 곧 다시 활기를 찾은 체했다.
“공작가는 혼처가 다 차 있으니, 영애 정도면 어디 일국의 비는 되셔야지. 그래야 라크루아 백작에게도 내 면이 서지 않겠어?”
그 유쾌한 말투에, 클로에는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미래도 잊고 다시금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전하께서 책봉 받으시면 힘써 주시는 건가요?”
“못할 게 뭐 있겠어. 보자, 스체르바뇰의 왕세자는 북부인답게 체격도 크고 좀 거친데, 속내는 은근히 여린 친구야. 에티아는…… 아, 영애와 사촌지간이군. 그란디시도 아직 책봉 전이긴 한데, 두 왕자 다 평판이 좋아. 말레카는…… 요한 그 녀석이 마도 공학에 미쳐 있기는 한데 사리 분별도 적당히 할 줄 알아서 제 아내에게도 미치지 않을까 싶군.”
“말레카는 좋은 나라죠?”
“말레카는 좋은 나라지.”
그렇게 말하는 프레더릭의 얼굴은 어느새 풀려, 사람 좋은 왕자님 미소를 다시 얼굴에 걸고 있었다.
클로에는 저만 아는 웃음을 지었다.
‘모두 다 이때쯤 거론되던 메리앤의 혼처 후보들이네.’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이때의 클로에는, 메리앤과 혼약하지 않는 나라 중 한 곳이 저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기왕이면 고티유에서 가장 가까운 그란디시나, 다음 대 황후의 처가인 말레카이길 바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길어지던 때였다.
“영애, 혹시.”
프레더릭은 어느새 저만의 생각에 빠져 밤하늘에 시선을 묻고 있었다. 보름을 지났거나 그에 못 미쳐 일그러져 있는 두 개의 달을 한참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말이 새어 나왔다.
“50퍼센트의 확률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영애라면 투자하겠나?”
클로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황태자 책봉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왜 이런 걸 제게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숨겨 줄 것만 같은 밤이 그에게 어떤 충동을 점지한 거겠지. 이런 밝은 달밤에는, 그늘이 유독 어둡게 지니까…… 저와 데메트리안에게 며칠 전 그러했듯이.
그리고 거기엔 어떤 구체적인 고뇌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조심스레 물었다.
“위험한 일인가요?”
“위험이 없진 않지.”
“비도덕적인가요?”
“……그렇게 보일지도.”
“저라면.”
클로에는 최대한 제가 무얼 눈치챈 티가 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뇨, 안 그럴래요.”
어차피 2년 뒤에 책봉되실 수 있는걸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클로에는 프레더릭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프레더릭의 금안이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황궁의 외궁 앞,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를 기다리며 데메트리안은 며칠 전 마주했던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미라벨이 그 눈빛에 실제로 무엇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데메트리안이 해석한 바는……
‘태도 확실히 해.’
‘읽고 싶은 대로 읽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미라벨을 통해 건네받은 오염된 에메랄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라구가 황실 마법사들과 대면하기를 꺼린 덕에 직접 시연해 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들고서 마법사단을 찾아갔을 때 그가 읊으란 대로 읊었더니 그 말 많은 마법사들이 기묘한 침묵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균일하지 못하게 투입된 마력이 입자를 과도하게 결정화한다는 식이었나.’
비슷하게만 말해도 그 고매한 황실 마법사들이라면 못 알아들은 연기도 못할 거라던 라구의 장담대로, 마법사단은 원로원의 협조 요청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키슬라바의 상인들이 다행히 보증서는 남겨두어서 증거까지 있었다.
‘덕분에 각 영지에 파견된 마법사들이 행상들과 함께 다시 올라올 때까지는 숨 좀 돌릴 수 있게 됐지.’
일이 잘 풀렸고, 이는 클로에가 도운 덕이었다. 덕분에 클로에와의 만남도 사수할 수 있었고.
그런 생각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던 데메트리안을, 그의 호위 파이겐은 오늘도 고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요 몇 주 매일같이 죽상이시더만.’
제 공자님께서 마치 오늘을 위해 달린 사람처럼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꼴로 퇴궁한 덕에, 파이겐 역시 공작저의 안락한 제 숙소에 한 몸 제대로 뉘이지 못한 나날이 길었던 것이었다. 그게 데메트리안의 탓은 아니었지만 탓할 곳이 필요하니 괜스레 제 공자님의 기행에 삐쭉대게 되었다.
‘데미, 이 어미가 간만에 봄바람이 들어서 우리 아들들 새 옷 좀 맞췄단다.’
‘형님 고생하시는 덕분에 나도 호사를 누렸어.’
‘오랜만에 편하게 출근하는 날이니 입고 다녀오면 어떻겠니? 주방에 말해 티푸드를 좀 챙기라 할 테니 편하게 먹으면서 일하고.’
오늘 새벽, 수련을 마치고 공자님 따라 입궁할 준비를 하러 복도를 지날 때에 식당에서 들려오는 크레벨들의 대화 소리에 파이겐은 곧바로 알아챘다.
아, 마님께서도 이 환장할 공자님의 일방통행 연애에 대해 좀 아시는구나.
간만에 그 지긋지긋한 아카데미 제복 대신 정장다운 정장을 입은 공자님의 자태는,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제가 봐도 눈길이 갔다. 올해 유행인지 주름이 자잘하게 많이 잡힌 크라바트를 했는데, 선이 굵기는 해도 아직 소년의 상이 가시지 않은 얼굴은 그마저도 찰떡같이 소화해 냈다.
이렇게까지 차려입은 소공작의 모습이 평일의 황궁에서 낯선 것이다 보니 지나다니는 관료들 모두가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파이겐은 왠지 모르게 제가 다 낯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이러면서 티 나지 않기를 바라시다니.’
그때쯤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멀리서 나타났다.
“선출제로 집정관을 뽑는 시도까진 좋았어. 하지만 투표 제도에 한계가 있으니 공화제에도 위기가 온 거지.”
“투표제만 보완했다면 더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종교도 정립되지 않은 고대잖아. 사회에 애초에 한계가 있으니 선출제가 적합하지 않았다는 거지.”
“세상에 선출제에 적합한 사회가 있을까? 일단 도입을 하고 거기에 맞춰 국민들 수준을 맞춰 가야지.”
“기반이 어느 정도는 조성돼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걸 기다리는 사이에 사회가 도태될 수도 있잖아.”
“……아니, 선출제에 왜 갑자기 꽂혔어? 원로원 의장이 선출직이었으면 너 후계자 자리도 없어.”
자꾸 제 말꼬리를 잡는 통에 짜증이 난 클로에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러고서는 지레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논거를 제시해 봐’ 운운하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것 같아, 반사적으로 데메트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같은 소파 반대쪽에 앉아 있는 데메트리안은……
‘웃어?’
난데없이 온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히 비소가 아니라 미소였다.
어이없어하는 클로에의 표정을 살피며, 데메트리안은 등받이에 팔을 기대 머리통을 괴었다.
‘그래, 이런 시간이 정말 그리웠어.’
지난번 만남 때에는 정말 오랜만에 갖는 둘만의 시간이란 생각에 벅차올랐던 데다가,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인 대화에 그저 클로에가 말하는 모습만 넋 놓고 쳐다봤었더랬다. 제가 별다른 대꾸를 안 하니 클로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정도가 당시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제 의견에 힘주어 또박또박 울리는 목소리, 그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눈썹, 감정이 격해질 때엔 살짝 홍조를 띠는 볼.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 공기에 제 목소리를 얹을 수 있었을까.
오늘은 제가 뭐라고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달싹이는 입술이나 설핏 좁아지는 미간, 조금 억지를 부리면 반사적으로 벌어지는 입술…… 그 생생한 반응에, 데메트리안은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반응해 주는 게 재밌어서 자꾸 딴죽을 걸게 되네.’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데메트리안의 눈동자에는 감격 비슷한 것이 차올랐다. 그 시선이 소파 건너편의 클로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자니,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데미, 눈빛 좀 바꾸면 안 돼?”
“네 말이면 뭐든 들어 주고 싶은데.”
데메트리안이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손을 뻗어 클로에의 귤빛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클로에의 뾰족한 목소리도 모두 기꺼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구체적인 이야기면 좋겠어.”
동시에 그는 저도 모르게 취한 제 행동에 놀랐다. 밤의 중정에서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한번 가닿았던 손길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니, 괜찮았으면. 둘만 있으니까 말야…….’
데메트리안은 조심스럽게 제 손에 쥔 그 머리칼을 슬며시 엄지로 문질렀다.
클로에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제가 마음을 추스르려 하면 뭘 하나. 이 첫사랑 오라버니께선 온몸으로 제가 뭔가 달라졌음을 내비치고 계시는걸.
“……아니, 그 밑도 끝도 없는 닭살 말투도 좀 어째 보고 말이야. 제발, 데미.”
“그게 무슨 소리야, 로이.”
데메트리안은 뭔가 작정을 한 사람처럼 굴었다. 공작저에 방문했을 때 화해 비슷한 것을 하면서 뭔가 알아먹은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 비밀스런 밤에 말려들지 말았어야 했었는지도.
그런 심란함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자니, 데메트리안은 제가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클로에의 머리칼을 제 입술로 가져가고 있었다. 마치 오리포네산 고급 차를 나눠마실 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라곤, 그의 눈빛이 클로에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슬며시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그의 입꼬리에, 짙푸른 눈동자 너머에서 반짝, 비치는 열기……
클로에는 그 모든 예상치 못한 것들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과, 미세한 손짓 같은 것들을 해독하면 그의 의중을 알아낼 수 있을 것처럼.
“좋네.”
그가 입가에 머금은 그 말에, 클로에는 그가 무엇을 두고 좋다고 말하는지 바로 알았다. 그것은…… 제가 느끼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뭔가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해져 왔다. 마음 같아선 영애님의 몸가짐이고 뭐고 꺅 소리라도 지르며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얼굴마저 빨개져 오려는 통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왜 그래? 너답잖게. 왜 자꾸 추근대는 사람처럼 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