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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61화 (61/189)

61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7)

똑똑.

퇴궁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데메트리안의 귓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피로함이 잠시라도 가실까 싶어 집무실 책상에 제 다리를 길게 뻗어 두고서 반쯤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차였다. 말없이 노크만 하는 걸 보니 외궁 하인이나 경비병이렷다.

“들어오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이었다.

“누아제트 영애?”

슬쩍 뜬 눈에 미라벨의 얼굴이 들어오자, 데메트리안은 후다닥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여긴 어쩐 일로.”

“로이 심부름 왔어요.”

“……같이 온 건 아니고요?”

미라벨은 저를 응접탁자 앞으로 안내하는 데메트리안의 몸짓에서, 당장 창가로 달려가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있는지 확인하고픈 충동을 읽었다. 어휴, 저 애송이.

“같이 왔는데 요 앞에서 1황자 전하를 마주쳤지 뭐예요.”

“이런.”

얼마 전까지 미라벨이 앉았던 자리에서 죽상을 하고 있던 프레더릭이 조금 부러워졌다. 프레더릭에겐 감흥도 없을 일이겠지만.

그의 낯에 비치는 생각이 무언지 알겠어서, 미라벨은 속으로 웃으며 태연스레 말했다.

“걱정 마세요. 1황자 전하께 잠시 맡겨 놓고 온 거니까요.”

“…….”

데메트리안은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미라벨이 어려웠다. 저보다 나이도 아래고, 궁정백저에 놀러갈 때면 늘 거기에 있는 클로에의 놀이 친구로 알아 온 세월이 지금 따져 보면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는데. 모두가 어린이일 때에 다 같이 교외 호숫가로 놀러 가서 말도 타고 물놀이도 하며 허물없이 놀기도 했었지만, 클로에 앞에서는 장난기 많은 왈가닥인 척하다가도 무얼 안다는 듯이 제게 코웃음 치곤 하던 것을 생각하면.

‘뭐랄까, 로이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 그런 걸까.’

데메트리안이 미라벨과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한 심사를 반추하는 동안, 미라벨은 그의 낯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중고품 시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라이언이 있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클로에의 얼굴에는 심란함이 묻어났다.

‘캄포 아가씨가 내숭 떨다가 본색이라도 드러낸 걸까?’

클로에가 루시엔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을 미라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마주할 때면 다른 영애들을 대할 때와 달리 살포시 날이 서 있었으니까. 그건 그녀에 대한 비호감이라기보다, 그녀가 너무나도 살갑게 굴어 오는 데에 대한 경계심에 가까웠다.

‘도대체 이 공자님은 나중에 어떻게 되길래 약혼을 미룬다는 걸까? 캄포 아가씨가 로이를 그리 꼬여내는 걸 보면 캄포도 정혼을 마냥 기대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걸까?’

아저씨들의 고릿적 약속이 뭐라고, 잘 통할 것 같은 두 아가씨가 속 터놓고 친해지지도 못하고, 뭐든 다 제 생각대로 굴러간다는 듯 남 눈치 안 보고 사는 이 공자님도 솔직할 수 없는 걸까. 저 또한 나름 남작가 영애긴 하지만, 귀족들 세계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한텐 누아제트보다는 엄마 피가 더 진하게 흐르나 봐.’

그런 농담 같은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미라벨이 대신 들고 온 클로에의 손지갑에서 천 주머니를 꺼냈다.

“리비에라 강변 중고품 시장에서 찾은 거예요. 며칠 전에 매입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키슬라바식 커팅이래요.”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놀란 빛을 띠었다.

“……로이가 이런 걸 알아보는 재주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마법사와 알고 지내게 된 것도……”

주머니에서 꺼낸 에메랄드를, 탁자에 놓인 램프 불빛에 비춰보던 데메트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라벨이 적선하는 마음으로라도 뭔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 주길 바라서였지만……

‘로이가 곧이곧대로 다 말해 줬을 리가 없지.’

모든 건 아직 저만 알고 있다는 생각에 미라벨은 뿌듯함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자님이 로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지실 때도 됐죠.”

미라벨은 일부러 말을 못되게 내뱉으며, 조금 고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흘렀던 것이다.

‘쌤통이다, 애송아.’

거기다가 클로에가 캄포의 아가씨와 알고 지내게 되었다는 것까지 알면 얼마나 놀랄까. 그런 의뭉스런 흥미를 삼키며 미라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아무리 1황자 전하라지만 너무 오래 혼자 둬서요.”

“잠시, 같이 나가죠.”

그의 에스코트를 받을 것도 없이 휘적휘적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은 그때 들려오는 말에, 미라벨은 작게 한숨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제 쪽으로 다가온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흐르는 감정은, 아마 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러지 마세요.”

미라벨은 데메트리안을 얼마간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데메트리안은 왠지 모르게 꼼짝 못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는 걸 공자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저번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같이 갔다면 좋았을 텐데.’

데메트리안의 집무실을 나와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어 내려가며, 미라벨은 며칠 전 물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디 경이랑 같이 갔으니까. 오늘은 쉬어, 너도.’

그 왕자님이 오신다기에 또 한 번 살펴보고 싶어서 따라가려 했더니, 변수를 만들면 안 되니 그때처럼 가겠단다. 속옷까지 그대로 입고 싶은데 그것까지는 미처 기억이 안 난다나. 왕자님과 연관되지 않은 것은 얼마 전까지와 완전히 다르게 살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 ‘꿈’을 꿨으니 분리 독립파 체포에도 손을 대고, 지금 하는 사업놀음도 하는 거면서. 바꾸면 안 되는 것들만 안 건드린다는 건가?’

미라벨은 내심 분리 독립파의 체포에 클로에가 연관된 것을, 스칸다르의 그 예쁜 왕자님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알 수 없는 마음이 단순한 호감만은 아닐 것 같은데. 뭔가 확신하고 있는 듯한 클로에의 앞에서 차마 그런 걱정을 내뱉지는 못했지만.

그 왕자님을 제국아카데미 도서관 앞에서 봤을 때에도, 알레지오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미라벨은 번번이 데메트리안의 얼빠진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방금처럼 저를 보자마자 클로에가 오진 않았을까 두리번거리던 그의 모습, 클로에가 지근거리에 와 있단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 가닿고 싶어 하는 그의 조바심.

‘그 정도는 돼야 로이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거지. 역시 살롱에 같이 갔었어야 해.’

스칸다르 모피 거래처를 알아봐 준다느니 뭐라느니 굉장히 잘해 줬었다는 것 같은데, 미라벨은 제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 믿겠다고 생각했다.

“라크루아 영애? 영애가 이 밤에 무슨 일이야?”

프레더릭의 얼굴에는 예의 그 왕자님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얼굴이 잔뜩 상한 것이 구휼 기금 문제 때문에 고생은 고생인 모양이었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어서 그에게도 이런 삶의 피로가 비칠 수 있을 줄은 몰랐더랬다.

“제 오라비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소공작에게 전달할 것이 있다고 해서요.”

“아하. 소공작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니.”

그의 얼굴에 미세한 희망이 비쳤다. 외궁 동관에서 유일하게 불 켜진 곳이 데메트리안의 집무실이었으니, 아마 그를 만나고 오는 것이었으리라. 클로에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고단하시죠?”

“하하, 뭐, 일이 풀리지 않으려니 이렇게도 꼬이나 싶더군.”

그러고서 프레더릭은 잠시간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자리를 뜰 수도 있는데 시간을 끄는 것이, 뭔가 이야기할 상대를 찾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크루아라서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무와는 무관하고, 데미와도 친한 게 나니까.’

클로에는 로브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제 손지갑을 꺼내 미라벨에게 건넸다.

“소공작께 전해 주게.”

“네, 영애.”

미라벨은 말씨와는 다르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고는, 그 손지갑을 받아서 프레더릭이 나타난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산책하지 않겠나?”

황족의 상징인 금빛 눈동자가 클로에의 수련화를 스쳤다.

“걷기에 불편하지 않을 것 같으니.”

어둠 속에서 나타난 프레더릭을 본 순간, 클로에는 달구어졌던 제 마음이 급격히 식는 것을 느꼈다.

루시엔의 마차에서 나와 이곳에 오는 내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질문 하나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캄포 대공녀와 사이가 안 좋았을까.

데메트리안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고 자기 합리화하고 있던 것과 정반대로 말이다.

중고품 시장에서 구한 에메랄드는 핑계, 그를 만나 모든 것을 확인하고 묻고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온몸에 부글댔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클로에는 늘 생각해 왔건만……

‘부질없는 일에 괜히 마음을 쏟을 뻔했어.’

프레더릭을 마주친 건 그래서 다행이었다. 책임질 수 없는 감정과 이야기를 풀자면 대책 없는 찝찝함만 만들 거였으니까. 어차피, 어차피 저와 그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데.

그가 불행했다고 해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걸 떠올리며 걷는 황궁의 중정은 고즈넉했다. 며칠 전 데메트리안이 제 팔을 덥혀 주던 그 나무 그늘이 눈초리에 걸렸다.

딱 그 정도였다. 저와 데메트리안의 사이는 그 정도면 족했다. 그들이 야트막한 온기를 나눈대도 그것은 그 누구의 눈에도 들지 않을 곳에서나마 가능한 것이었다. 햇살과 연회장 등불 아래서는, 그냥 오랜 우정을 지키고 있는 크레벨 소공작과 라크루아의 영애 정도면 족했다.

클로에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내내 말이 없던 프레더릭이 말을 꺼냈다.

“영애는 5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나?”

보니, 뭐든 얘기해 보라는 것처럼 프레더릭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필 5년 뒤라.’

클로에는 그 5년 뒤에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은 전혀 다른 것을 꿈꾸게도 해 주는 법……

‘이때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더라.’

스칸다르에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한 스칸다르 왕실은 다른 나라 출신의 비를 들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사교계의 다과회나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에만 외출하며, 데메트리안과 주기적으로 독서 모임을 갖던 시절. 캄포 대공녀가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에 누군가의 부인, 혹은 어디의 세자비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 상상 속의 저는 곰베르 산맥의 살을 에는 추위도 버텨 보았고, 라쥐르 남부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도 쬐어 보았다.

그러니까, 아르투젠 황실의 후계 구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니 괜스레 장난기가 돌았다.

“글쎄요. 전하께서 책봉을 받으셔야 알지 않을까요? 제가 2황자 전하의 비 후보에 있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책봉을 받지 못하는 남은 황자의 비 후보이긴 했지만, 프레더릭은 2년 뒤면 황태자가 될 거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프레더릭이 넌지시 대꾸했다.

“그렇다는 건 나와 혼인할 수도 있다는 소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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