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6)
기실 클로에의 뇌리에서 루시엔의 존재가 잊힌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데메트리안의 정혼자인 캄포의 대공녀’였지, 제가 한들룽 지구에서 만난 루시엔 캄포는 아니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처음으로 그 둘을 한자리에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 모를 정도로 오만하고, 어쩌면 밑도 끝도 없이 사랑받아 왔으며, 무엇보다 그 맹세로 이뤄진 크레벨과의 혼약을 태내에서부터 의무이자 권리로 추구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지.’
가상의 캄포 대공녀를 그려 놓고 그에 맞추어 상상하던 바가 있었는데, 실제로 알게 된 그녀에게서 그와 어긋나는 면모를 찾을 때마다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그녀를,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공작부인이 되기 전까지의 일탈을 즐기는 어린 영애라고만 간주해 왔었는데……
‘사실은 다 편견이었던 걸까,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했던 것뿐.’
클로에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차 안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클로에는 놓쳤던 그녀의 본질이랄 것을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루시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루시엔도 여봐라는 듯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고압적으로 말했던 것과 달리 새까만 눈동자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그 침묵이 조금 길어질 무렵.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시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지시면 그렇게 할게요.”
그리 말하는 루시엔에게서는 아까의 기색은 모두 누그러져 있었다. 농담이었다는 듯 씨익 입매가 올라갔다.
그제야 밀려오는 불쾌함, 당황스러움, 그런 감정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엔이 푸스스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르투젠의 사교계에 대해선 식견이 부족해요. 그러니 제가 머무를 확률이 있는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분을 도와드리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정말, 단순히 그뿐이시라고요?”
그 이유만이라면 그냥 지금이라도 고티유에 머무르는 귀족가 영애들의 모임에 나가고 리도테에 입학하면 될 일인데. 그런 말을 덧붙이려다가 클로에는 제 앞에 있는 소녀의 모습을 되새겼다.
루시엔은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어울리지는 않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 소녀가 야회복을 입고 레이스 장갑을 끼고 부채를 흔드는 모습이…… 글쎄, 어울리기야 하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그녀에게는 다른 것들이 더 잘 어울릴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늘어지는 클로에의 눈매를 지켜보던 루시엔이 빙긋 웃었다.
“저 혼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던 분야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을 보고 반갑지 않을 리가요? 말씀드렸지만, 아르투젠 영애들께서는 이런 쪽에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답니다.”
“……대공녀께서도 언젠가 아르투젠에서 데뷔탕트를 치르실 텐데, 그런 편견을 계속 지니고 계시면 스스로도 즐겁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게 보이려던 의도는 아니었어요.”
루시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 이 대공녀께서 제 의도를 곡해할 여지를 남길 리가.’
클로에는 루시엔이 내뱉는 말이며 행동 하나하나에 의도가 담기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리포네 사교계의 분위기에 대해서야 저도 들은 바가 다지만, 두 사회가 서로 다른데 무엇이 낫고 낫지 않다를 말하는 건 교만이라고 생각해요.”
내내 미미한 호선을 띠고 있던 루시엔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그것 역시 일종의 미소처럼도 보였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미소가 아니라 저만 아는 미소.
그러는 양에, 클로에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것은 말싸움이 아니었고, 또……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그릇된 것을 선택했다는 것처럼 말하면 옳지 않으니까요.”
클로에는 자백하는 듯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사적인 감정이 담긴 것을 들키지 않도록 한마디 한마디 꾹꾹 눌러 가면서.
그렇게 말함으로써 제가 옹호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였을까.
클로에는 데메트리안과 격하게 논박할 때에 제가 옹호했던 한 위인을 떠올렸다. 눈앞의 영애에게 캄포라는 성을 물려준, 후대에 끊임없이 회자될 혼약으로써 제 백성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안겨 주려 했던 캄포의 마지막 왕을.
루시엔은 작게 웃으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사람이야.’
클로에 라크루아에 대해 어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정혼자랍시고 영지에 온 크레벨의 큰 공자가 끊임없이 입에 올린 이름이었는데.
‘아, 로이가 캄포의 사슴 고기가 유명하다고 부러워했는데. 정말 풍미가 좋군요.’
‘아직 승마를 안 배우셨군요? 하긴, 로이도 승마는 일곱 살 때에 배웠지요.’
‘이런 품종의 장미는 처음 보네요. 혹 돌아갈 때 몇 송이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로이가 흥미로워할 거라서요.’
루시엔이 여섯 살, 데메트리안의 나이 열네 살이던 여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캄포 대공저에 크레벨들이 다함께 놀러와 머물렀던 그때. 소년 병사단을 그만둔 데메트리안이 그해 가을부터 네 살 어린 제 아우의 보호자 명목으로 리도테에 청강을 다닐 예정이었기에, 공자님께 드문 ‘아무것도 없는’ 여름을 맞아 기획된 휴가였다.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가문과 제게 어떤 혼약이 맺어져 있다고 들어 왔었고, 크레벨의 공자들 중 맏이를 두고 제 아버지가 ‘사위’라 부르는 걸 듣기는 했지만…… 말이야 정혼자라지만 여덟 살이나 많은 그 ‘큰 공자’는 괜히 어렵게 느껴지기만 했다.
‘로이가 누구인가요? 큰 공자님의 친우인가요?’
며칠을 귀동냥하던 어린 루시엔이 터울이 덜 져서 보다 친근하게 다가왔던 그의 아우에게 물었을 때였다. 열 살의 신동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사전적인 정의로는 맞는데, 대공녀께서 생각하시는 바와 성별은 다를 겁니다.’
귤색 머리칼에, 맹랑한 듯 보이는 풀빛 눈동자가 매력적인 고티유 사교계의 인기인. 그 영애가 한들룽 지구에 들어섰을 때 어찌 몰라볼 수 있었을까. 그다지 흥미도 없는 사교계 경험은 어머니를 따라 드나든 오리포네에서 쌓은 게 다였지만, 알고 싶은 걸 알 방법이야 무궁무진했으니까. 고티유를 드나들게 된 지가 몇 해인데.
루시엔은 저를 위해서, 클로에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제 수호 사도는 뷜이에요. 이름이 부담스러우시면 루비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앰버예요.”
“불의 날에 태어나셨군요.”
여전히 클로에는 뭔가 거북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루시엔과 헤어진 클로에는 마차를 달려 황궁으로 향하게 했다. 필립 1세 대로를 따라 올라오는 길에 라이언을 중간 적당한 곳에 내려 주고서였다.
그렇게 달려가면서도 클로에는 제가 데메트리안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키슬라바산 에메랄드를 제보해야겠다고만 생각했을 뿐.
‘크레벨 공작가는 별 의미가 없죠.’
아니, 사실 그것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 클로에는 루시엔과 대화를 할 때부터 줄곧 데메트리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데미는 행복했었을까.’
제가 스칸다르로 가고서 3년간 데메트리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의 근황을 알 수 있는 방편이라곤 ‘고자로 뒈졌으면’이라는 말로 끝나곤 하는 메리앤의 편지 속 단편적인 이야기나,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가족들로부터 듣는 것이 다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클로에는 막연히 그가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편지 한 통 없는 것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일도 열심히 해서 내무부 서기관으로도 갔댔고, 캄포 대공녀는…… 내가 스칸다르로 간 뒤에 리도테에 들어가면서 크레벨과 교류를 시작했다고 들었지. 그런데 과연……’
클로에는 오늘 마주한 루시엔의 모습을 돌이켜 보았다.
‘웬만한 어른도 압도할 분위기가 있고, 강단도 있고 자기주장 강한……’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어떤 부류와 맞지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 강단이며 자기주장이라는 것이 클로에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클로에의 그 정도는 데메트리안의 역치에 맞춰져 있었다. 그와 함께 자라온 만큼 클로에의 유별난 부분도 데메트리안의 모난 부분도 서로 부딪히지 않을 딱 그 정도까지만 자랐으니까.
그리고 지금껏 제가 겪은 루시엔의 화법을 보면……
‘잘 안 맞았을 것 같은데.’
그걸 생각하는 것이 기쁜지, 고소한지, 클로에 자신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단 하나의 궁금증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데미는 행복했을까.’
어쩌면 행복하지 않았기에 자꾸 이러는 걸까.
얼마 전, 대니얼과 만찬을 함께한 날 중정에서 보았던 어둠에 반쯤 묻힌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말도 빚어내지 못하고, 마냥 제 팔만 보듬어 주던 그의 얼굴.
그리고, 어젯밤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더듬대듯 제 일과를 물으며 쑥스러워하던 얼굴.
그 눈동자 너머에 어떤 감정이 넘실대는 것을 몰랐다면 거짓말이리라.
‘무슨 말을 삭이고 있었던 걸까…….’
그건 그가 다시 걷게 될 미래와 연관이 있을까.
클로에는 왠지 그 답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아무리 바뀌는 게 없달지라도.
프란츠 광장에 마차를 세우고 요기라도 하고 오라며 마부에게 은화 몇 개를 챙겨주고서, 클로에는 미라벨과 황궁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외궁의 창문들 중, 원로원 의장 보좌관의 집무실 자리만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나도 나지만 소공작도 퇴근 못 하고 있더라고. 이게 며칠 짼지.’
그때의 ‘오늘’과 달리 클로에가 외출한 바람에 듣지 못한 에티엔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주일이라 집에만 머무르던 클로에가 듣고서, 곧 만나기로 한 데메트리안과의 약속을 미루자고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먹게 된 바로 그 말이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안은 이제 저와의 만남을 미룰 상상조차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고, 클로에는 그런 배려조차 하고 싶지 않은 심술이 났다. 그가 행복했건 행복하지 못했건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밤에 오니까 으스스하네. 주일이라 더 그렇겠지?”
“응, 입궁했었더래도 지금쯤이면 다들 퇴궁했을 시간이니까.”
그러면서 외궁 동관으로 들어서려는데, 건물 안쪽 어두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크루아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