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5)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루비가 8세기 양식으로 장식된 검집, 오염된 마석을 대리석처럼 장식한 펜던트, 투박하지만 적당한 크기의 알을 달고 있는 반지들, 그리고……
“이게 뭐라고 정말 산다는 거야? 그냥 인조 아냐?”
잡화 전문 상점에서 모피로 된 소품류를 뒤지던 클로에가 은회색 털로 된 목도리를 사려고 하자, 기겁한 미라벨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거려 왔다. 클로에는 속으로 빙긋이 웃으며 나직이 대꾸했다.
“담비.”
“담비가 무슨 이런 색깔이야? 갈색이 바래면 회색 돼?”
“곰베르 산맥 동쪽 담비들은 털 빛깔이 모두 이래.”
“에엥? 네가 그렇다면야…….”
스칸다르의 비전하였다는 애의 말이니 틀리진 않겠지만…… 클로에의 의중이 대번에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에 미라벨이 눈썹을 한껏 늘어뜨렸다.
‘이것도 마법으로 어떻게 하면 흔히 생각하는 갈색으로 변하는 걸까?’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미라벨의 신뢰에는 미안하게도, 당장에 무슨 계획이 있어서 스칸다르의 모피들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다. 이 역시 일종의 ‘투자’였달까.
‘용도는 다 같이 고민해 봐야지. 결국 대공녀에게 완전히 빚졌네, 오늘도…….’
스칸다르산 모피마저 루시엔이 추천해 준 곳에서 구하게 되니, 이제는 마음속에 진득하니 자리 잡은 께적지근함을 무시해야만 할 때였다.
‘지금까지야 계산된 듯 보인대도 호의는 호의임이 명백한데……’
앞으로도 제게 보일 것이 쭉 호의이기만 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며 클로에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어제 경시청이 한들룽 지구에 발이 묶인 상단들을 재조사했다죠.”
루시엔이 예의 그 휴대용 다구들로 차를 내며 입을 열었다. 마치 그에 대해 물어볼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클로에가 에메랄드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기 전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떠보려고 온 것은 맞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시작하니 클로에는 또 속이 간파당한 것 같아 다시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혹시 무슨, 정보상도 운영하세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가 나중에 어떤 자리에 있게 될 줄 몰라서요.”
어떤 위치긴, 크레벨 공작부인이겠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눌러 두었던 루시엔에 대한 거북함이 다시금 샘솟는 것 같았다. 괜히 왔나…….
“어제 한들룽 지구에 갔더니 어수선하더라고요. 제가 이러고 다니는 건 단순히 신분을 숨기는 데에만 유용한 게 아니에요. 저를 그냥 종자로 보는 상인들은 저들이 떠드는 게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 준답니다.”
정체를 알고 봐서 그런지 아무리 봐도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클로에의 눈에 담긴 맞은편의 영애는 다소 왜소한 체구에 소담한 콧날과 유독 땡그란 눈까지, 도저히 소년으로 볼 법한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상인들 사이에선 영락없는 소년 종자라나.
‘하긴, 벌써 5년은 이쪽으로 다녔다고 했지.’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라고 봤으면 계속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에는 이어지는 루시엔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상인들은 경시청 나리들 얼굴은 다 몰라도 라크루아의 도련님은 알죠. 그분을 하대하는 건방진 아카데미 생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얼마 전 키슬라바에서 올라온 상단의 숙소. 무슨 일인지 그들이 다녀가고서 상단에서 곡소리가 나더라.”
손가락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문지르면서 노래하듯 그런 것들을 늘어놓던 루시엔이, 고개를 모로 꺾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가 제가 들은 거예요.”
클로에는 어제 데메트리안이 전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제 발코니로 날아든 그는, 역시나 아카데미의 제복 차림이었다.
“그러면 왜 제가 에메랄드를 찾으리라고 생각하신 거죠?”
“영애께서 여기에 오신다면, 찾으실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안 오실 수도 있죠. 다만 영애께선 보석을 보시는 안목이 있으신 것 같고 키슬라바 상단의 주력 상품 중 하나가 에메랄드니까요.”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그 말 속에, 네가 에티엔의 누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혼자와 친밀한 사이여서 그렇다는 타박이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지레 그렇게. 정작 루시엔에게선 아무런 기색도 없었는데.
클로에는 그런 제 심사에 씁쓸함을 느끼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런 루시엔의 짐작이 도움이 되었느냐면,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루시엔이 언급한 수석 좌판에 갔더니 불균등한 빛을 내는, 뭔가 그 빛이 조금 부연 엄지 한 마디만 한 에메랄드 같은 것이 정말로 있었으니까.
‘그거 이번에 들어온 건데, 품질 보면 키슬라바산도 아닐 거면서 거기 에메랄드처럼 커팅해 놓은 게 재밌다오.’
주인장이 설명해 주던 것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제가 어떤 시험을 당하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새로이 도전하는 일들이 재밌기만 하다가도, 거기서 마주친 루시엔의 호의가 제게 어떻게든 도움이 될 때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데메트리안의 낯선 눈빛을 볼 때와도 같았다.
어쩌면 저와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미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느낌, 제가 기억하고 있는 미래가 왠지 모르게 다른 세상의 것으로만 느껴지는 느낌.
‘도대체 내가 왜 스무 살로 돌아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에 빠져 고민하던 클로에는,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이걸 오늘 챙겨서 나오면서도 이렇게 진짜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 그간 감사하기도 해서 작은 선물을 가져왔어요.”
“어머.”
루시엔이 종이로 싸인 그 꾸러미를 열자 길쭉한 벨벳 상자가 나타났다. 일전에 메리앤과 제러미에게 건넸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열어 봐도 되죠?”
그 안에서는 역시 메리앤과 제러미에게 줬던 것과 같은 책갈피가 나왔다. 다만 그에 박힌 보석이 사파이어 대신 다이아몬드였을 뿐.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제작한 건데…… 제가 대공녀의 수호 사도는 누구인지 몰라서요.”
사도들의 우두머리인 아망의 다이아몬드가, 생일을 모를 때에 무난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저평가된 고급 보석을 찾아 팔고 있거든요. 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그 말에 고개를 까닥이는 루시엔의 얼굴에는 굳이 설명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팔기 마땅찮은 게 생겨서 만들어 봤어요.”
그래, 굳이 신경 쓴 건 아니야. 클로에는 이게 선물이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냥 지금까지 받은 도움에 대한 대가야.’
루시엔을 마주칠 때마다 드는 그 찝찝함을 털어버리기 위한 거였다. 도움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계속 무슨 도움을 받고 있으니, 뭐라도 줘서 떳떳해지고 싶었다.
‘기왕이면 이 불편한 호의를 끊어내면 더 좋겠지.’
캄포의 대공녀와는 그 정도의 관계면 족했으니까. 황자궁의 친우들을 위한 것을 제작할 때에 하나 더 만들면서부터 다짐했던 바였다.
“와아.”
루시엔이 손끝으로 금으로 만들어진 책갈피와, 책에 끼우면 책등에서 빛나도록 세공된 다이아몬드 같은 걸 쓸었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피어났다.
“정말 감사해요. 선물이라니.”
지금껏 그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미소란 흥미를 표현하거나 호감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면, 입을 벌려 활짝 웃는 것이 정말……
‘맞아, 아쉴 또래였지.’
제 경계심과 그녀를 포장하고 있는 갖은 수식들을 떼어 내면, 제 동생 또래의 당찬 소녀가 거기 있을 뿐이었다.
천만에요, 중얼거리며 루시엔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클로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저, 그런데 대공녀께서는 왜…… 제게 잘해 주시는 건가요?”
“잘해 드리다니요?”
순식간에 그 천진한 미소를 지워낸 루시엔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도와주시잖아요. 한들룽 지구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매번.”
“도와드리는 게 잘해 드리는 건가요?”
클로에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교계 지인들이라면? 예를 들어 퓌잘리 누스나 엘레니아 룩소스처럼 인사말만 주고받는 사이라면?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예의니까.
하지만 루시엔과는……
클로에는 마음이 콕콕 찔려 오는 것을 모른 체하고 적당한 답을 만들어 냈다.
“제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가르쳐 주시니까요.”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그 ‘필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의 애정, 사교계 지인들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더불어 클로에는 루시엔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부족했다.
‘클로에 라크루아에에게’, 그러니까 ‘당신 정혼자의 가장 가까운 여성에게’. 루시엔이 언급한 적도 없는 그 구절을 클로에는 매번 저도 모르게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방어적으로 굳어 가는 클로에의 얼굴을 살피며 루시엔이 웃었다. 평소에 짓던 미소와도, 선물을 받고 지은 웃음과도 전혀 다른, 무언가 삐뚜름한 미소였다.
“황가의 보좌인 캄포가 타의 모범이 되려는 게 어찌 호의로 읽힐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루시엔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말투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곤조곤했으나 그 내용이 너무 고압적이었으며, 양어깨를 짐짓 펴며 뒤로 기대는 그 몸짓은 일견 위압적이기도 했다.
루시엔이 나이치고 자그마한 소녀만 아니었다면 저도 모르게 위축됐을 듯했다. 지레 드는 불쾌한 기색을 갈무리하며 클로에가 조심스레 대꾸했다.
“무슨 의미시죠……?”
“지금 성이야 캄포지만 그 성이 제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제 위치는 다른 맥락에 있어요. 아르투젠 황위 계승 서열 5위, 오리포네 쪽으로는 7위. 거기에 크레벨 공작가는 별 의미가 없죠. 저는 다만 고귀한 피가 흐르는 이로서 황실의 집사인 라크루아의 여식에게 배움을 베풀었을 뿐이랍니다.”
“…….”
클로에는 그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할 수도, 화낼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제게 무턱대고 보여 온 호의와 지금 루시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 중 그 무엇도 그녀의 진의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이게 본래 성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