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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58화 (58/189)

58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4)

주일을 맞아 난생 처음으로 와 본 리비에라 강변의 중고품 시장은 정말로 규모가 대단했다. 지금껏 이런 곳을 왜 몰랐나 싶었을 정도로.

한낮의 햇살이 물살에 반짝반짝 부딪히는 옆으로 아무렇게나 좌판을 연 사람들이 너른 강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중고품 좌판들이며, 이 시장에 온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팔기 위한 노점상들에, 돈이 급한 이들을 위해 전당을 잡아 주는 가설 전당포까지…… 다양한 행상들로 가득 찬 그 규모는, 강변을 따라 걸으면 족히 30분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와, 정말 넓다.”

“그러게. 크레벨 정원보다도 더 넓은 것 같아.”

“대공녀는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았대? 우리가 몰랐던 게 이상한 건가?”

미라벨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루시엔이 소개해 준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 그 주에 바로 방문할까 했던 걸 여태 미뤄두었던 것이었다. 평민들이 왁자지껄 모여든다는 시장통에 선뜻 발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역시 한몫했다.

한들룽 지구에서 매입하는 것에 익숙해지느라 눈을 돌릴 여유가 없기도 했으니 아주 핑계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지인짜 넓다. 주일에 사람들 신전 안 가고 다 여기 오나 봐.”

“저도 어렸을 때 와 보고 처음인데, 기억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것 같아요.”

오늘도 클로에의 감상을 대신 내뱉어 주는 미라벨의 말에, 라이언이 살갑게 대꾸했다. 흥정할 일이 생길 경우를 위해 그를 대동한 것이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우선 빛깔이 특이한 모피들이 있나 보는 거야. 하지만 액세서리 가판도 꼼꼼히 살펴야 해. 수석 파는 곳도 괜찮아. 에메랄드를 찾는 거야, 알았지?”

마차에서 제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던 바를 다시 한번 되짚는 목소리는, 흥성대는 시장의 소음 때문에 한껏 높아져 있었다.

‘어쨌든 마력에 오염된 보석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나니까.’

간밤에 다녀간 데메트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 일을 최대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말을 꺼낸 사람으로서 느낀 일말의 책임감이라고 할까……

“키슬라바산 에메랄드가 오염돼서 나온 게 있는지 살피는 거야.”

“알겠어.”

“네, 주인님.”

어제 갑작스레 찾아온 데메트리안에 대한 의구심도 잠시,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은 설렘 그 자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괴감만 들었지만……

하지만 그보다도 클로에의 마음을 고양시킨 것은, 제가 무슨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황자로부터 황실 양조장 와인을 하사받을 정도의.

와인 병의 라벨을 자꾸만 쓰다듬던 그 손끝의 찌릿찌릿한 감각은, 언젠가 축제 장터거리의 불량배들을 훼방 놓았을 때의 것과 같았다.

‘한 사람의 제국민으로서 당연히 힘을 보태는 거야.’

클로에는 아무도 묻지 않은 다짐을 되새기며, 미라벨의 팔짱을 끼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기 옷 한 벌에 1실버래. 싼 거지, 라이언?”

“네, 밖에서 옷 지어 입으려면 셔츠 하나도 10실버는 드니까요.”

“너희 가게에서는 저런 옷은 안 만들지?”

“친한 분들이 부탁하면 평상복도 짓기는 해요. 그치만 아무래도 값이 비싸니까……”

미라벨이 친근하게 붙이는 말에 라이언은 곧잘 대답했다. 셋이 한배를 타게 된 지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어갔으니 어색함도 많이 덜어진 것이었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클로에의 눈은 매섭게 좌판들의 면면을 훑었다.

‘원석이 그 상단에서 팔던 것 중엔 가장 컸다니 어쩌면 수석 쪽일까? 혹시 모르니 전당포에 먼저 가 봐야 할까?’

겉으로야 스칸다르산 모피를 찾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요즘 제가 한 발 걸쳐 버린 문제가 마음속에서는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건 정말로 한시가 급한 문제였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클로에의 어깨를 잡았다.

“엄마야!”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누가 어깨를 잡아채니, 깜짝 놀란 클로에가 소리를 내질렀다. 바로 곁의 미라벨과 라이언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그 소리에 돌아보았다.

‘요즘 매번 이렇게 놀라네…….’

‘예전’에는 초대장을 주고받으며 정해진 사람들만을 만났다면, 요즘은 발 닿는 곳에서마다 즉석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게 돼서일까. 민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클로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 오셨네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로브 속으로 감춘 소녀, 루시엔이 방긋 웃고 있었다. 제 어깨를 쥐는 힘에서도 이미 짐작하긴 한 터였다.

클로에는 민망함을 반쯤 남겨둔 채로 대꾸했다.

“네에, 여기서 또 뵙네요.”

“지난주에도 오실까 해서 기다렸었거든요.”

“저를요?”

루시엔은 또 속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정말,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자꾸 알은체를 하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가 인사치레로 지었던 미소를 허물어뜨릴 무렵.

“몇 군데, 소개해 드리고픈 곳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루시엔은 답도 듣지도 않고 따라오라는 듯이 앞서 나갔다.

이렇게 붐비는 거리라곤 대축일이나 수확제 장터거리밖에 가 본 적 없는 클로에와 달리, 루시엔은 이 도떼기시장이 익숙한지 내딛는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축제 장터거리는 그래도 나름의 규칙을 갖고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좌판 규모도, 좌판들 사이의 간격도 제각각이라 여기저기서 길이 막히는데도 말이었다.

그런 루시엔을 쫓아가면서, 클로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는 것도 모르고 발을 재게 놀렸다. 결국 팔짱을 끼고 있던 미라벨에게 라이언과 다른 곳 먼저 구경하고 있으라고 보내고서야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여기가 장신구 종류로는 가장 많은 수량을 취급하는 데예요.”

“여기는 격주로 나오는 곳인데, 마침 오늘 날이 잘 맞았네요. 귀족들 유행에 맞춰 서민들이 착용하는 장신구들을 취급하더라고요.”

“저 좌판이 잡화 전문인데, 가끔 모피로 된 모자나 목도리 같은 소품들도 있어요.”

“저기 사람 많은 데가 여기서 가장 큰 곳이에요. 장신구며 잡화며 옷이며 다 균일가로 팔거든요.”

“원석도 보시려면 여기가 가장 구색이 좋아요.”

“여긴 주인장 감각이 탁월해요. 투박해도 복고풍으로 쓸 만한 장신구나 소품을 팔더라고요.”

무슨 관광 안내원처럼, 루시엔은 클로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좌판들만 쏙쏙 골라서 추천해 주었다. 제가 어떤 것들을 살피려 하는지 다 꿰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니, 정말…… 많이 와 보셨나 봐요.”

“한 달에 한 번쯤 와서 둘러보곤 해요.”

“취급하시는 품목들이랑 이 시장이 관계가 없지 않나요? 그, 피혁이나 목재 같은 것들요…….”

루시엔의 마차에서 본 것들을 떠올리며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에서 팔거나 팔리는 건 모두 완제품이지, 루시엔이 유통하는 원자재들은 아니었으니까.

루시엔이 방긋 웃어 보였다.

“시장 조사 차원에서 둘러보면 좋아요. 중고품으로 어떤 게 거래되는지 알면 유행을 타지 않는 제품이 뭔지도 알 수 있으니까요.”

“유행 타지 않는 제품요.”

클로에가 루시엔이 하는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유행 타지 않는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곳에 자재를 대려는 걸까, 아니면 혹시 제작에도 손을 대고 있는 걸까?’

그 얼굴에 궁금증이 차오르는 것이 선연했다. 이를 지켜보던 루시엔의 눈빛이 진하게 빛났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 둘러보시고 나서 저쪽 저희 마차로 오시겠어요?”

루시엔이 고개를 까닥여 강둑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어드메에 마차를 세워 놨다는 것이리라.

‘그거야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매번 만날 때마다 친근하게 대해 주는 것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저희가 처음 온 거라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서요.”

껄끄러운 기색을 대놓고 비치진 않았지만 이것은 에두른 거절. 루시엔이 작게 웃었다.

“저도 여기에 볼일이 있고, 제 마차는 단순한 이동용이 아니니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클로이 쪽으로 숙여 오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렇게 숙이니 클로에의 눈에는 정수리만 들어왔다.

“아까 보여드렸던 수석 좌판에 키슬라바산 에메랄드가 하나 있었어요.”

“네……?”

고개를 든 루시엔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따 뵈어요?”

인파 속으로 대번에 들어간 그 자취는 금세 사라졌다.

루시엔이 추천해 준 좌판들은, 정말로 클로에의 필요에 정확히 부합하는 곳들이었다. 각 좌판에서마다 무언가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볼 만하지 않은 곳들이 없었다. 마력에 오염되면서 생긴 얼룩이 마치 대리석에서처럼 원석 고유의 무늬로 보이기도 하는지, 고급 장신구에나 달릴 크기의 오염된 보석들을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양식으로 다시 세공해서 파는 것들도 보였다.

‘전당포에 있는 건 누가 봐도 귀부인들이 좋아할 디자인이었는데. 이런 게 유행을 타지 않는 제품인 걸까?’

루시엔이 주인장의 감각을 칭찬했던 구제 액세서리 좌판을 살피고 있을 때, 미라벨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그런’ 거야?”

“그래 보이네.”

“포리지가 제 애인 준다고 산 목걸이가 딱 저렇게 생겼는데.”

보석이 딸린 장신구를 자주 살 수 없는 평민들 사이에서는 유행과 무관한 디자인이 인기인 것 같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니 다시금 루시엔에게 생각의 꼬리가 가닿는 것이었다.

‘도대체 키슬라바산 에메랄드에 대해선 어떻게 아는 거지?’

제가 흥미를 가질 걸 이미 안다는 듯이 단정하듯 말을 던지던 그 모습.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라이언을 시켜 눈여겨봐 둔 몇몇 장신구들의 셈을 치르게 하고 좌판에서 떠나가며, 클로에는 루시엔을 만나러 가는 것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키슬라바산 에메랄드에 대해 어찌 아나 싶어서 따져 물으러 가려고 했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뭔가 내어놓고 미끼를 흔드는 것이 마치 함정에 빠지는 것만 같아서 꺼림칙했고.

‘물론 대공녀가 나를 꼬여내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리고 그녀의 안목에 감탄할 때면 이렇게 마음이 동하다가, 다시 괜한 거북함에 주저하게 되었다.

‘정혼자랑 친하게 지낸다고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럴 거면 애초에 도와주지도 않았을 테고.’

루시엔이 짚어 준 좌판 한 군데, 한 군데를 돌 때마다 고민은 더욱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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