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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57화 (57/189)

57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3)

“……그렇다고들 하더군.”

웬 사내와 나오는 클로에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던 것을 떠올리니 조금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어렴풋이 그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웬 영애랑 불장난이라도 하는 걸까요? 그 폐쇄적인 왕국에 데려갈 수도 없을 텐데…… 그러고 보면 저 왕자의 사생활이 기이할 정도로 깔끔하긴 하네요.”

요즘 들어 연애 이야기에 부쩍 관심이 생겼는지, 제 누이의 것보다 조금 더 짙푸른 청록색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을 듣는 데메트리안은 단 한 사람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칸다르의 왕자께서 얼마 전에 에메랄드를 주문하셔서 말입죠.’

저에게 에메랄드는, 단 한 쌍의 눈동자를 묘사하는 말이었으니까.

* * *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올라온 클로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음 주 물의 날에 약속된 데메트리안과의 독서 모임을 위해 빌린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제가 기억하는 그때와 같은 책을 빌렸다면 할 필요가 없는 노력이었으나…… 원로원이 아닌 공작저의 서재에서 책을 골라 오게 된 탓에 처음 보는 책이었다.

《고대 왕국 변천사》, 딱딱하고도 정직한 제목 그대로 고대 왕국들의 정치 체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끙끙대며, 때로는 지적 자극에 즐거워하며 읽어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똑똑.

“응, 들어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폼폼이나 미라벨이겠거니 생각하고 대꾸했는데, 문간에서는 미동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그리 생각하며 다시 책에 눈을 돌렸는데 다시금 들려오는 마찰음.

톡, 톡, 토톡.

‘……?’

그러고 보니, 문 두드리는 소리와는 무게감이 사뭇 달랐다. 가볍고, 파동이 짧은……

‘유리창?’

오싹해진 클로에는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게 책을 덮고, 최대한 숨죽여서 슬리퍼를 신었다. 협탁 서랍을 조심스레 열어 그 안에서 제 단도 두 자루를 꺼내 들고, 몸을 날래게 움직여 창문 바로 옆의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섰다.

‘창문을 두드리는 걸 보니 밤손님은 아니겠지만……’

어떡해야 할까? 커튼을 젖히고 정체를 확인한 뒤에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우선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봐서 단도를 날릴까……

‘라비야 잠들었대도 경호조의 기사들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면 실력자긴 할 텐데.’

꿀꺽, 클로에가 숨을 눌러 참으며 몸을 벽에 한껏 붙였다.

톡, 톡, 토톡.

다시금 울리는 소리에, 클로에는 흠칫 떨었다.

‘근데 저 박자가……?’

이 긴장감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친근감이, 착각일지 근거가 있는 것일지 한참 생각하다 보니……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스쳤다.

‘내가 밖에서 계속 노크했잖아!’

‘미안, 로이. 너인 줄 몰랐어. 루카 녀석이 하도 노크하고 도망가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많이 두드린 줄 알아? 손가락 아파!’

‘미안해. 그럼 우리끼리 암호를 정하자. 이렇게 두드리면 너인 줄 알게.’

문을 두드리느라 빨개졌다며 내민 중지 손가락 마디를 손바닥으로 쏙 감싸고는, 아홉 살 데메트리안은 천천히 두 번, 빠르게 두 번 문을 두드려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를 따라 크레벨 공작저에 놀러갈 때 가정교사의 숙제를 하는 데메트리안을 불러내는 암호가 되었고……

‘설마?’

클로에는 갑작스레 달려든 추측에, 곧바로 커튼을 확 젖혔다. 창밖의 인영을 확인한 클로에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이렇게 놀란 적은 없었는데……

“데미?”

데메트리안이 창밖 테라스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려던 것인지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클로에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들고 있던 단도들을 창가의 티테이블에 올려놓고, 동시에 그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숄을 어깨에 둘렀다. 제 방인 만큼 취침용 드레스 차림이어서였지만, 사실 그런 건 둘 사이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는 내내 깜짝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클로에의 눈동자는 데메트리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클로에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었다. 봄이 깊어졌어도 밤은 여전히 서늘하여, 활짝 열어낸 창문을 타고 봄밤의 공기가 숭덩 들어왔다. 며칠 전 황궁 중정에서의 그 기온과도 같았다.

“아니, 데미, 이 시간에, 아니, 어떻게 여기로…… 아무튼, 뭐야? 무슨 일이야?”

내내 다물리지 못했던 클로에의 입이, 창문을 열자마자 잔뜩 말을 쏟아냈다. 클로에가 창문을 여는 데에 방해되지 않도록 물러선 데메트리안의 품엔 와인이 한 병 들려 있었다.

데메트리안의 마음에는 난처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글쎄, 왤까.’

저도 모를 일이었다. 파이겐에게 안면이 있는 이 저택의 경호조 기사들을 만나 언질 좀 해 두라고 해 가면서까지 이 깜짝 방문을 벌인 이유를, 그 자신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밀회 장소로 유명한 예가체프의 앞에서 발견되었을 때부터 데메트리안은 조금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오늘 탐문 결과를 로이에게 전하라고 하셨죠? 2황자 전하랑 만찬 때 얘기 듣고 궁금해했다고요.’

‘아냐, 귀택하면 시간이 늦을 텐데 굳이. 어차피 다음 주에 만날 거니 그때 내가 말하지.’

마음 같아서는 고마움을 핑계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한다면 클로에가 싫어할 것이 뻔해 참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에티엔에게 대신 보고해 달라 부탁했던 것인데…… 그것을 핑계로 대어서라도 반드시 오늘 확인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스칸다르의 왕자와 예가체프에서 만난 이가 그녀인지를.

하지만 막상 꾸밈없는 차림새의 클로에의 모습을 보자 그는 모든 변명을 잊었고, 그러고서 새로이 핑계를 빚어내자니 모든 것들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사실은 보고 싶어서, 그게 가장 컸으니까.

“무슨 일 있어?”

요 얼마간의 냉정한 기색도 모두 지운 채, 클로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메트리안의 낯을 살폈다.

“……잘 들어갔나 해서.”

“뭐라고?”

“그날 못 데려다줬잖아. 야근한다고.”

“……진심이야?”

그 단아한 미간에 주름이 지는 것을 보며,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편지했잖아. 정말로 무슨 일이야? 네가 그렇게 치를 떠는 로망스 속 등장인물도 아니고, 달밤에 테라스로 숨어든다니…… 세상사람 아무도 못 믿을걸,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클로에는 조금 전 엄습했던 긴장감을 다 털어내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끊임없이 조잘대었다. 눈썹이 오르락내리락하거나, 그 도톰한 입술이 이렇게나 저렇게 벌어지는 것을 한참 쳐다보던 데메트리안은 클로에 쪽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쉿, 나 몰래 온 거잖아.”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기며, 와인 병을 들고 있던 손을 그녀의 머리 너머로 뻗어 창문을 밀어 닫았다. 대번에 가까워진 그에게서는 봄밤의 싸늘함을 잊을 정도의 열기가 났다.

“달려왔어? 혹시 담장도 뛰어넘은 거야?”

“그게 로망스의 미덕이라며.”

“나 참, 라크루아 경호조 내일 손 좀 봐야겠구먼……”

클로에는 일부러 슬며시 한걸음 물러서며 부러 툴툴대었다.

데메트리안은 그 멀어지는 간격이 아쉬우면서도, 그녀가 왜 그러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제가 그녀에 대해 몰랐던 게 어찌나 많았던가……. 그것은 지난 몇 년간 그를 괴롭혀 온 후회라는 감정이 빚어낸 가장 결정적인 명제였다.

데메트리안은 다짐하듯이 말했다.

“어제는 고마웠어.”

“그거 이야기하려고?”

“오늘 상단들도 다 돌아봤고.”

“정말? 뭐래, 도움이 됐어?”

“응, 키슬라바령에서 올라온 상단에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다더라고.”

“와, 정말? 그거 증거품으로 마법사단에 보여주면 되는 거겠네?”

일부러 내었던 거리감도 잊고, 클로에가 온 얼굴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얼굴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너무도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러고도 지금껏 마주할 수 없어 어찌나 속절없이 애가 탔던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은 덩달아 미소 지어 보였다.

“아직 문제가 있어.”

“응?”

그 해사한 미소가 걷히고 순식간에 당혹과 호기심이 들어차는 얼굴. 그런 변화들을 살피던 데메트리안은, 제 가슴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심장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심장 소리가 이토록 유별나게 들리지 않으리라…….

“그 에메랄드가 모조거나 값어치가 없는 건 줄 알고 처분을 했대.”

“에엥, 정말? 말도 안 돼.”

“그러게 말야. 문책당한 이가 홧술을 마셨던 모양인데, 어디서 어떻게 팔았는지도 모르겠대. 전당포에 맡겼는지도 모르고, 어디 도박판에서 잃었는지도 모른다고.”

“뭐야 그게……. 그럼 어떡해?”

한껏 늘어지는 클로에의 눈썹을 제 손끝으로 덧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은 말을 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상단들의 발을 묶어 놨으니 아직 고티유에 있지 않을까 싶어. 전당포 같은 곳들 위주로 찾아봐야지.”

“그렇구나…….”

“못 찾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증인은 돼 줄 수 있으니 큰 성과가 있었던 셈이지. 그래서 말인데.”

데메트리안은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와인 병을 클로에의 앞에 내밀었다. 아랫부분을 다른 손으로 받치고 병을 돌려, 라벨이 클로에 쪽으로 보이도록 했다.

클로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황실 양조장 거잖아?”

“대니얼이 고맙다고.”

바람의 날인데도 근무 때문에 지친 기색으로 들어선 대니얼로부터, 거의 강탈에 가깝도록 받아 온 그 와인에는 그렇게 그럴싸한 내력이 생성되었다. 크레벨의 후계자로서도 황자의 친우로서도 지금껏 뭘 요구하는 적이 없던 데메트리안의 생떼에, 대니얼이 보이던 알 만하다는 눈빛……

그에 대한 민망함은 모두 마음속의 일, 데메트리안은 이 테라스에서 클로에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와, 이게 무슨 영광이야. 원래 관료들도 공훈 세우면 다 이런 거 받는 거야? ……물론 내가 뭐 공훈을 세운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는 아쉬운 공을 세웠지.”

“그래?”

와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클로에가 눈동자를 굴려 데메트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도 은근히 물어오는 모양새에 데메트리안은 재차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응, 당연하지.”

데메트리안으로부터 황실 양조장 와인을 건네받은 클로에는, 묘하게 차오르는 감격에 그 라벨을 손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러는 양을 쳐다보는 데메트리안은, 이제 제가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억지로 만들어 온 용건들은 다 털었으니까.

그는 한참 전부터 제 목구멍을 간지럽히던 질문을 조심스레 입에 올렸다.

“그…… 말이지.”

“응?”

“너 오늘 계속 집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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