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2)
데메트리안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에티엔은, 아무렇게나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근무 모드로 전환했다. 그와 단둘이 외근을 나오게 되어 꽁했던 마음이 합리적인 근거로 인해 사그라든 것이었다.
그가 신이 나서 상단들의 목록을 읊는 걸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생각했다.
‘이 예상외의 수확이 제 누이에게서 나온 것을 꿈에도 모르겠지.’
이는, 대니얼을 제외하면 저만 아는 사실. 그리 생각하니 근래 들어 클로에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지고 있어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마법사와 알게 되셨어요?”
“으응, 지인 소개로.”
그 지인이 클로에인 것 또한 에티엔은 상상도 못할 거였고.
이 공이 알맞은 곳에 돌아가야 하니 언젠가는 말해야겠지만…… 잠시나마 자기만 알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데메트리안은 지레 뿌듯함을 느꼈다.
‘나중에 로이와 상의해 보고, 되도록이면 치하를 받을 수 있게 해야지.’
어제 마법사를 통해 대강의 곡절은 듣기야 했지만, 아직 클로에가 그와 관련된 것들을 일단 비밀로 해 둔 듯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저만 아는 미소를 지었다.
“보석이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굽쇼?”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듣는 소리였다.
에티엔이 언급한 상단들을 찾아 마력에 오염된 커프스 버튼을 보이며 혹시 비슷한 현상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하나같이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온 것이었다.
‘에이, 이렇게 되면 무슨 보석인가요.’
‘보석의 경도가 얼마나 되는지 나리들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보석의 품질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들의 한결같은 대꾸를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은 이번에도 예견된 낙담에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법사가 시연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못 믿었을 거니까…….’
아침에 마차 안에서 에티엔의 반응 또한 다르지 않았고. 데메트리안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꼬박 네 번 덧붙였던 말을 한 번 더 내뱉었다.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네. 아무튼, 혹시 이런 현상이 나타난 보석을 발견했다면 수사에 도움이 될 테니……”
“네에, 그런 일이 있었습죠. 딱 이랬죠, 그게.”
커프스 버튼을 품에 넣으려던 데메트리안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정말인가?”
옆에서 지레 침울한 기색이던 에티엔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나리들의 격한 반응에 작게 당황한 중년인, 키슬라바 백작령에서 온 상단의 단주는 콧잔등을 찡긋해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꾸했다.
“거짓을 말해 뭐하겠습니까?”
데메트리안과 에티엔은 서로 고개를 까딱여 일말의 성공을 자축했다. 애초에 이토록 오래 붙어 있던 적이 없는 사이인데, 거듭된 낭패로 인해 분위기가 처지고 말아 대화다운 대화가 사라진 지 족히 두 시간은 지나 있었다.
“얀과 그렉을 와 보라고 하려무나.”
상단주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열 살은 될까 싶은 어린 꼬마가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방 안에 들어온 것은 키만 삐쭉하게 큰 갈색 머리의 남자와, 그보다는 작지만 옆으로 체구가 단단하게 벌어진 밀빛 머리칼의 남자였다.
“이것 좀 보려무나. 그때 그 에메랄드가 꼭 이랬지?”
사내들은 안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안경을 꺼내어 데메트리안의 커프스 버튼을 들여다보았다.
“맞습니다, 어르신. 내포물이라기엔 뭔가 특이하게 보였었죠.”
“이게 무슨 특별한 현상인가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상단주와 마주보고 앉아 있던 데메트리안과 에티엔은, 상단의 사내들이 대화하는 것을 유심히 들으며 그 기색을 살폈다. 무언가, 조짐이 좋았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아니, 이번에 최상품 에메랄드 원석을 몇 점 갖고 왔는데, 그중 두 개가 이렇게 빛이 상했던가요? 그래서 얀 저 녀석이 검수를 잘못한 줄 알고 키슬라바 사무실에 누락품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연락을 보내 놓았던 참입니다.”
“예, 이유는 모르겠는데 희끗희끗한 얼룩이 있어서, 제가 영락없이 물건을 잘못 챙긴 줄 알았지 뭡니까. 덕분에 술 취해서 물건 잘못 챙긴 놈이 됐는데……”
길쭉한 사내, 얀이 억울하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그래, 네가 술 마시면 기억은 잃어도 일을 잘못하는 경우는 없는데 말이지.”
“그래, 너도 알잖아. 내가 저번에 안드로 포구에서 뱃놈들이랑 럼주 대결을 하고도 발주를……”
“자랑이다, 이놈들아!”
상단주가 안경 너머로 눈을 홉떠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너스레가 적당히 끝나는 눈치에, 데메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오염된 에메랄드를 볼 수 있겠는가?”
상단주가 다시 두 사내에게 시선을 보냈다. 얀과 그렉은 갑자기 입을 꼭 다물고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설마, 네놈들……”
“아니, 상단주께서 갖다 버리든 말든 알아서 하시라면서요?”
“내가 어디, 정말로 버리랬냐? 하등품이라도 에메랄드는 에메랄든데! 그 큼지막한 걸 다시 세공하면 어떻게든 팔리는 걸 몰라?”
과오가 하나 지워졌지만, 다시금 새로운 과오를 뒤집어쓰게 된 사내들이 하릴없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저들 발끝만 바라보았다.
“으이그, 있는 걸 왕자한테 갖다 바쳤으니 남은 거라도 어떻게 수익을 낼 궁리를 해야지, 이놈들이……”
“왕자?”
“아, 예에.”
갑작스레 끼어든 데메트리안의 말소리에, 역정을 내던 상단주가 황급히 표정을 바꿔 보이며 공손한 목소리를 내었다. 키슬라바 백작이 맡긴 기부금을 잃어버린 것도 송구스러운데, 수사에 도움이 될 증거품까지 제 아랫것들의 짧은 생각으로 잃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스칸다르의 왕자께서 얼마 전에 에메랄드를 주문하셔서 말입죠. 가장 알이 큰 게 이번에 그리돼 버려서, 주문하신 것보다 못 미치는 걸로 납품하는 바람에 값도 제대로 못 받았지 말입니다.”
데메트리안과 에티엔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상단주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하소연해야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거기까지 말한 상단주는 다시금 제 눈앞의 사내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영주의 신임을 잃은 것도 억울할 텐데, 상품까지 손해를 봤으니 속이 상하긴 하겠네요.”
에티엔이 나지막이 속삭여 오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상단주의 심정을 헤아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는 대로 경비대 두 소대 정도를 가동해 아티장 지구 보석상 및 시내 전당포들을 수색토록 하겠습니다.”
키슬라바 상단주와의 면담을 마치고 경시청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에티엔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주말 내내 특근을 하게 생긴 거였으나 간만에 맞이한 이렇다 할 단서에 들뜬 것이 티가 났다.
“그래. 그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증거품을 팔았는지 기억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행상들도 뱃사람들처럼 마셨다 하면 아주 거나하게 마신다더니, 참말인가 봐요.”
에티엔이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 철야의 나날에 끝이 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이 떠올라서인지 자꾸만 입꼬리가 헤실헤실 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야. 하급품이라도 보석은 보석인데 어디에 갖다 팔았는지 기억을 못 하는 게 말이 되나.”
“술에 잔뜩 취하면 그리 되나 보죠.”
“술에 취하면 기억 못하는 건 범죄자들 핑계 아냐, 다?”
“글쎄요, 제가 술을 못해서.”
그리 답하며 에티엔은 지난 달 사교클럽에서 그와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무슨 연유인지 그리 취한 모습은 처음 보았지만, 그래도 정신은 얼추 수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다.
‘술기운을 빌리니 제 속내를 좀 비추는 것 같긴 하더라만…… 요즘 조금 진심인 듯 군다는 듯도 하고.’
여전히 어렵기만 한 누이의 친우, 혹은 내적 친근감만 지닌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건만, 이미 팔이 안으로 굽어 버린 에티엔은 그의 안색을 감정하듯 살폈다.
‘그저께 대니얼 전하와 셋이 만찬을 했다던데 그건 또 무슨 일일까…….’
에티엔이 생각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그의 연갈색 머리칼과 청록색 눈동자에서 클로에와 닮은 부분들을 찾고 있던 데메트리안은, 늘 허여멀겠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그러한 에티엔의 낯을 살피며 말했다.
“주말인데 너도, 경비대도 다 고생이겠다.”
“……소공작께서 다른 사람 고생을 헤아릴 줄도 아셨군요?”
“누가 들으면 내가 언제는 다른 사람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인 줄 알겠네.”
맞는데요, 라고 에티엔은 거의 말할 뻔했다. 제가 아는 크레벨 소공작은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거기엔 예외가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은 에티엔은, 다시금 사교클럽에서 마주쳤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떠올렸다.
‘술이 세서 로이를 챙겨 준 게 아니라, 역시 로이를……’
아니지, 행여라도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제 누이에게 드는 미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 에티엔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필립 1세 대로를 따라 올라온 경시청의 마차는 어느새 프란츠 광장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거기서 황궁을 끼고 서쪽으로 더 올라가면 경시청이니, 기나긴 외근도 이제 다 끝나는 것이었다.
“어라?”
창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상관에게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던 에티엔이 내뱉은 외마디에, 데메트리안의 눈길이 덩달아 창밖으로 이동했다.
프란츠 광장에 접어들면서 한껏 느려진 마차의 속도 덕분에 대로 건너편 인도의 풍경이 빠짐없이 한눈에 담겼다.
필립 1세 대로와 앙헬라타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자리한 커피하우스 예가체프 앞에, 밝은 빛의 금발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실크햇을 눌러 썼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는 근방을 지나던 귀족 아녀자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절로 가는 관심을 감출 줄 모르는 평민 아녀자들 모두의 시선을 사로집고 있었다.
“저 사람, 스칸다르의 왕자 아닌가요?”
오늘따라 저를 두 번이나 뜨끔하게 만드는 그 이름. 데메트리안은 유달리 의식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상체를 숙여 제 시야에 차창의 차양이 걸리지 않게끔 했다.
“저기가 그 유명한 예가체프죠? 가 보셨어요?”
“……아니.”
데메트리안이 예가체프의 상호를 눈에 담은 것은, 클로에가 웬 사내 녀석과 함께 나오던 그날밖에 없었다.
사교계 모임에도 잘 걸음하지 않는 스칸다르의 왕자가 이토록 남들의 눈에 띄는 곳에 나타난 것부터가 이색적인 일이어서, 두 청년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왕자가 연애라도 하는 걸까요?”
미래에 그 왕자와 제 누이가 혼인하게 될 것을 꿈에도 모르는 에티엔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연애라니?”
“왜, 저 예가체프가 밀회의 장소로 유명하다지 않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