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표류하는 지난 시간의 자취 (1)
「……그러니 되도록이면 소공작에게 협조해 주게. 명목은 ‘마법 자문’ 정도로 하고 출장비는 내가 지불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나.」
황궁에서 대니얼과 만찬을 가진 다음 날 아침, 클로에는 숙취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라구에게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어젯밤 일정을 헤아리며 초조해하던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편지지 위에 동동 떠다녔다.
‘내일이면 주말이니 부디 라구 경이 바로 답신을 보내 주면 좋을 텐데…….’
만찬장에서 한숨 섞인 말들을 주고받던 두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보석이 마력에 오염되는 현상을 활용할 수 있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그들의 얼굴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본 사람들 같았다. 그 낯에 희망과 의심이 뒤섞여 떠오른 것이었다.
특히,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려는 듯이 담담한 낯을 꾸며 내던 데메트리안의 얼굴. 그의 얼굴에 그러한 피로가 담긴 것을 본 적이 있었을까.
‘눈가가 아주 퀭해서는…….’
조심스레 제 팔을 감싸 오던 그의 두터운 손, 그리고 미안하다고 털어놓듯 내뱉던 때의 한 가지 감정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얼굴…… 어젯밤의 순간들을 돌이키던 클로에가 이마를 짚었다.
‘그게 다 밤이어서야. 달빛 때문이라고.’
밤하늘에 떠오른 두 개의 달이 모두 보름 언저리가 되는, 여느 때보다 밝은 달밤에는 그늘이 더욱 어둡게 지는 법이었으니까.
클로에는 변명하듯이 만년필 뚜껑을 꾸욱 눌러 닫았다.
다행히 라구로부터 답신이 온 것은 오전을 넘기기 이전이었다. 이제는 마법사 길드에 몇 번 다녀와 봤다고 헤매지도 않고 익숙하게 심부름을 하게 된 전령은. 답신과 더불어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받아 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실 마법사들이 싫어할 일이라면 더 재밌겠네요. 다만 어디서 뵐지가 문제예요. 크레벨의 소공작이 오시기에 알레지오는 보고 듣는 이가 많아 어렵겠고, 원로원으로 제가 찾아가자니 황실 마법사들에게 탐지당할 게 뻔해 제가 사양하고 싶습니다. 의심받는 건 둘째치고 그들과 마주치는 것도 영……」
‘마탑 내에도 세력 간의 알력이 없지야 않겠지만, 라구 경처럼 갓 서품 받은 이가 이리 말할 정도인가?’
제국 마법사단에 속한 황실 마법사들은 어쨌든 마탑의 엘리트들인데 말이다. 클로에는 제가 몰랐던 세계를 엿보는 듯한 마음에, 흥미진진하게 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제국의 유력 가문 영애인 클로에를 대함에 있어서 일말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그의 독특한 성정이 편지에도 묻어나 있어서, 클로에는 편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꽤나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대목이었다.
「……해서, 제가 시험 삼아 만들어 본 마도구를 함께 보냅니다. 버튼을 누르시고 할 말을 녹음하시고 다시 버튼을 누르시면 저한테 전달될 거예요.」
그 대목까지 읽고서 클로에는 전령이 함께 건넸던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조약돌 모양으로 된 나무 조각이었는데, 가운데에 마정석이 박힌 버튼이 있어서 그것을 누르라는 것 같았다. 일전에 마법사 길드에 가서 라구를 불러 달라 했을 때 노파가 입에 대고 중얼거렸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고 이 정도로 원거리 통신을 시도해 보는 것도 처음이어서, 아마 몇 번 오고가면 마력이 다 닳을 거예요. 쓰시면서 불편하신 점이나……」
편지 뒷부분에는 간단한 조작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 마도구의 내력에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지만, 클로에는 그가 주절대는 것을 대충 흘려듣는 것처럼 그 설명 또한 대충 읽고 내려 두었다.
일단 편지에 써져 있는 대로 버튼을 누르니 마정석이 빛나며 짧게 진동이 왔다. 녹음된다는 신호 같았다.
“편지 잘 받았네.”
뭔가 더 길게 말할까 했지만 혼잣말을 하려니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색해져서,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라구가 설명한 대로 버튼을 몇 초간 다시 꾸욱 눌렀다.
그러고 얼마 뒤 긴 진동이 오기에 버튼을 두 번 누르니 라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력 아깝게 왜…… 30초는 더 말하실 수 있다고요.]
대충 잘 쓰시는 것 같으니 기쁘다는 말이 길게 이어지는 것을 다 들은 클로에가 제 목소리를 다시 녹음했다.
“이 통신구를 소공작에게 보내겠네. 둘이 연락하여 만나도록 하게.”
라구를 소개해 주는 것까지가 제 역할이지, 거기에 배석할 필요까지는 제가 생각하기에 없었던 것이다. 얼굴 볼 구실을 잃어버린 데메트리안이 아쉬워할 것도 모르고.
크레벨 공작저에서 전령이 온 건 다시 이튿날이었다. 라구를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 짤막한 보고가 있었다.
「커프스 버튼을 갖고 마법사가 오염과 정화를 시연해 줬어. 큰 도움이 됐어. 오늘 경시청에 얘기해서 피해 상단들을 면담해 보려고. 성과가 있다면 소식 전할게. 네가 도와줬으니 당연히 그리 되겠지만.」
제몫을 한 듯한 통신구 또한 편지와 함께 돌아왔다. 라구가 소공작 앞에서 감히 ‘그거, 영애께 드린 건데……’라고 말하며 라크루아에 돌려보낼 것을 종용한 게 분명했다.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에게 통신구를 보낼 때 썼던 것이 그대로 돌아온 나무 상자 안에는 크레벨 온실의 장미꽃 몇 송이가 짧게 잘려서 담겨 있었다.
「마음만으로는 온실의 장미는 이미 다 네게 보냈어. 너의 데미가.」
크레벨 공작부인이 알았다가는 웃었을지 가슴을 쳤을지 모를 그 마지막 문구에,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누가 볼세라 그 편지를 재빨리 접어 넣었다.
‘나는 그냥…… 제국민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그의 짐을 나눠 지려던 건 전혀 아니야. 클로에는 심란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 * *
주말인 바람의 날에 출근하면서도 한들룽 지구로 외근 나갈 생각에 들떠 있던 에티엔 라크루아는, 크레벨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 사건이 원로원도 개입한 사업에 대한 일이니 이 건으로 온 것은 맞는데…… 설마 같이 나가자고 하진 않겠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응접실 소파에 기대 몸을 묻고 있던 데메트리안은, 문을 열고 들어 온 에티엔을 보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경시청 출근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 몰랐네? 가면서 얘기하자.”
“가자뇨, 어딜요?”
“한들룽 지구. 오늘 내가 같이 나가기로 했어.”
“…….”
요즘 출근이나 퇴근이 무색할 정도로 경시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에티엔은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정말이지, 어제 철의 날인데도 23시가 넘어 퇴근하고 사교클럽도 못 가고 잠만 자다가 나온 건데 게으름뱅이 취급을 받다니……
‘우리에게 일 넘겨 놓고 원로원은 여유 부리는 건가?’
그러면서 데메트리안의 낯을 살피는데, 그 역시 얼굴이 거칠한 것이 저와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저와 마찬가지로 퀭해야 할 눈에 왠지 모를 생기가 넘치는 것이 이상했을 뿐.
‘나랑 같이 나가는 게 즐거워서 이럴 린 없겠고…….’
제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경시청 제복으로 갈아입기만 하고 바로 나가려는 에티엔의 축 처진 뒷모습에, 반가운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에티.”
제 사수인 노엘 웬즐리가, 깔끔하게 잘린 단발을 찰랑이며 사무실에서 빼꼼 따라 나왔다. 고생도 같이 하고 출퇴근도 같은 시간에 하는데 어째서 그녀만 청량해 보이는 걸까…… 에티엔이 반색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할 무렵이었다.
“그럼, 노엘 경. 다음에 뵙죠. 오늘 양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린 듯 복도로 나온 데메트리안이 노엘 웬즐리에게 살갑게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런 걸 보는 에티엔의 마음은 다양한 심사로 복잡해졌다. 우선은, 저 소공작이 저런 살뜰한 답례를 하는 것부터가 이상했고……
“대신 외근 나가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제 파트너 잘 부탁드리고, 부디 큰 수확 얻어 오시길 바라요.”
그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엘은 여느 때처럼 입꼬리를 들어 올려 사무적인 미소를 두 청년 관료들에게 지어 보였다.
“에티엔 경, 오늘은 혼자 힘내 봐요. 소공작 각하 덕분에 저만 쉬네요.”
“경이라도 쉬실 수 있어서 다행이지요.”
어떤 마음이 담긴 게 자명한 그 말을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봐.”
한들룽 지구로 나가는 마차 안, 데메트리안은 다짜고짜 에티엔의 눈앞에 제 커프스 버튼을 하나 내밀었다. 그의 탄생석인 라피스라줄리가 박혀 있는 것이었다.
“새로 사셨……을까요? 자랑?”
내내 뚱한 기색이던 에티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앞에 들이밀어진 커프스버튼과 그걸 내민 데메트리안의 낯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보석을 자세히 봐 보라고.”
“…….”
도대체 무슨 난리람. 에티엔은 댓 발은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꾸욱 물면서 커프스 버튼을 받아들었다. 한숨과 함께 열의 없이 그 커프스버튼에 슬쩍 가닿았던 에티엔의 눈동자가 놀란 기색을 띠었다.
“이거 모조 라피스라줄리인가요? 왜 빛이 탁하죠……?”
“당연히 진품이고, 보석이 마력에 오염되면 이런 반응을 띤다고 하더라. 어제 마법사로부터 확인받았어.”
“혹시 이게 이번 사건과……”
“적어도, 이 범죄에 마법사가 개입됐는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직접 마력의 대상이 된 건 아니어서 이처럼 확연히 오염되진 않았을 거라고 하는데, 그래도 운 좋게 오염된 보석을 찾으면 적어도 마법사들을 의심할 근거는 생기는 거니까.”
“보석을 유통하는 상단을 찾아가 봐야겠네요. 사파이어 광산이 있는 카틸라령, 에메랄드 광산이 있는 키슬라바령과 브란트령에서 상단이 와 있고, 남대륙 무역상과 거래하는 코르테령 상단도 한번 알아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