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13)
‘게다가 어차피 한두 해나 하다가 끝날 일이니 굳이 동네방네 알릴 필요 없고 말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 같아서, 클로에는 억지로 웃는 낯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전령 보내서 물어보고 연락할게.”
“소득이 있으면 좋겠어. 뭐라도 아쉬운 상황이어서 말이지.”
말이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던 대니얼이 상체를 들어 고쳐 앉으며, 시종에게 손짓해 클로에의 잔에 와인을 조금 더 채우게 했다.
그에 고개를 주억이는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뿌듯함이랄지, 기쁨이랄지 싶은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소한 실마리를 발견한 것도 쾌거인데, 그게 클로에의 도움이었으니. 그 마법사를 소개받는다는 명목 하에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낯이 또 대니얼의 눈에는 선연히 읽혔지만, 이번만은 마음속으로도 이죽거리지 않았다. 그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썩는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아는 마법사?’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다시금 좁혀졌다. 또 하나, 제가 클로에에 대해 모르는 게 또 하나 생겼다.
* * *
“밤바람 쐬니까 좋다.”
대니얼과의 만찬 자리는 클로에가 애초에 걱정했던 것보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평소의 묘하게 냉정한 기색을 지워낸 황자님은 뭔가 호의적인 기색으로 와인을 몇 잔 더 권했고, 제 의견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긴가민가하면서도 좋았던 클로에가 그것들을 납죽납죽 다 받아 마신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 일해야 한다며 제 잔을 사양한 데메트리안의 것도 모두 클로에의 차지였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에 닿는 밤의 찬 공기가 기분 좋았다.
“아, 시원해.”
“준다고 다 마시니까 그렇지.”
“황실 연회 때도 레드와인은 안 나온다고.”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제 볼을 식히려고 매만지던 클로에가 투덜거렸다.
캄포령에서도 가장 물 좋고 볕 좋은 곳에 자리한 황실 소유의 포도밭들은 주신의 축복 덕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품질로 유명했다. 그 포도로 만들어진 황실 양조장 와인들은 또 어떻고. 축제주로 자주 쓰이는 스파클링 와인이야 황실에서 주관하는 연회 때 풀기는 하지만, 황실에만 납품되는 다른 와인들은 맛보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에게 대단한 영광이었다. 황실 구성원의 만찬에 초대받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영광을 제 몫까지 받아 준 것을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평소였으면 새침하게 눈만 흘기고 말았을 것을, 클로에는 밤과 취기를 핑계 삼아 대담하게도 고개를 그의 앞에 들이밀고 얼마간 그의 낯을 노려보았다. 요 얼마간 그에게 들었던 원망스런 마음까지 죄 담아서.
“왜 그래?”
“얄미워서.”
“…….”
미간도, 입술도 모두 찌푸려져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게 기꺼워 데메트리안은 즐겁기만 했다. 그리 생각하는 저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덤이었다.
“옛날 생각난다.”
데메트리안의 얼굴을 한동안 노려보던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의 팔에 손을 올린 채로.
기분 좋게 알딸딸해질 정도로 마시고 데메트리안의 팔에 기대서 걸으니 정말 ‘옛날’ 생각이 났다. 스무 살로서 말하기에 그리 옛날은 아니었지만,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나 데뷔탕트 때도 네가 이렇게 부축해 줬었는데.”
“뿐만이겠어.”
“헤헤.”
술 약한 제 오라비가 데메트리안을 믿고 먼저 귀택하면, 그가 세월 깊은 우정을 핑계로 매번 바래다 줬던 그때의 추억들.
그땐 그런 배려라도 제가 받아야 하는 거라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건 안 되니 그런 사소한 것들이라도.
“마레 소공작 부부가 왔을 때도.”
“결혼한 사촌언니를 오랜만에 보면 다 그래.”
“올해 신년제에도.”
“너도 좀 마셨잖아, 그땐.”
“지난달에도.”
“……그만해.”
기껏 즐겁게 얘기하는데 또 타박이다. 말 좀 붙여 줬다고 마음이 풀린 줄 아나. 클로에는 다시금 샐쭉거렸다.
그 뾰로통해진 모습조차 좋아서,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속으로 웃었다. 요즘 들어 매번 굳은 얼굴만 보았더니, 이 생생한 얼굴의 움직임이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옛날. 옛날의 이야기들이다. 옛날이 되어 버린, 그래서 입에 올릴 수 없는 추억들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클로에에게는 일상의 즐거움이 사교계 모임에만 있던 시절, 데메트리안은 그런 때라야 술 약한 오라비 대신 챙긴다는 명목으로 가닿을 수 있던 시절.
마차 안에서 제 어깨에 기대 새근새근 잠든 얼굴을 마음 놓고 바라보던 시절, 그런 그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손가락으로 덧그리는 양이 좋아 잠에서 깨지 않은 척하던 시절.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밤하늘로 스며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때문인 것 같아.”
“뭐가?”
“2황자 전하께서 나한테 따로 식사하자고 할 리가 없잖아.”
“그 녀석은 제가 고티유에 살고 있는 일개 기사라고 생각해. 별 의미 없이 너랑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었나 보지.”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의 발걸음이 멎었다.
내궁과 외궁을 잇는 중앙 정원에는 완연한 봄의 풀내음이 밤공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21시 반, 외궁으로 출근하는 모든 관료들이 구휼 기금 문제 때문에 야근으로 시달리고 있대도 내궁으로 발걸음하는 이들은 없는 시간.
클로에가 멈춰선 곳은 정원의 가운데 길에서 살짝 비껴서,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가장 어스름한 곳이었다.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희미한 당혹감이 흘렀다. 대니얼이 저 때문에 벌인 일일 테지만 단연코 제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클로에의 생각에 굳이 가부를 달자면 ‘응’이기야 했음에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그래서 없던 일로 하고팠느냐면, 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랑 단둘이 식사했을 때보다는 기분이 덜 상했을 거니까.’
뭐라도 말하고 싶은 마음, 혹시 심기를 상하게 하는 말을 꺼낼까 두려운 마음, 진심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 적당히 듣기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목구멍을 메웠다.
데메트리안은 슬며시 클로에 쪽으로 돌아 서며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클로에가 가만히 그런 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데메트리안의 시선은 클로에의 얼굴을 살짝 비켜 있었다. 얕게 목이 올라오긴 했지만 홑겹임이 분명한 드레스. 5월에 들어서며 한결 가벼워진 영애들의 외출복은 저녁나절까지 입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내색하진 않아도 쌀쌀하겠지. 제 톡톡한 면직 셔츠 너머로 쌀쌀한 밤바람을 느끼며, 데메트리안은 클로에가 손을 걸쳐 두지 않은 쪽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 손이 평소와 다른 열기를 띠고 있을 것을 데메트리안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눈앞의 이를 대할 때면 늘 그랬으니까.
누가 볼까 최대한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제 마음의 열기를 감출 수 없는 손으로 천천히 클로에의 어깨를, 위팔을 감쌌다.
“다만, 네가 곤란했다면 미안.”
소맷자락을 타고 한기가 들던 살갗에 온기가 내려앉았다. 그러는 양이 따뜻하기도 해서, 풀내음이 은은히 풍기는 정원의 어스름이 왠지 모르게 그 무엇도 묻어 줄 것만 같아서 클로에는 그의 손길을 내버려 두었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매일의 제 다짐과 달리.
“……곤란은 했는데, 뭐, 황자님과 만찬을 갖는 영광이 흔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너희들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자니 왠지 자조적인 기분이 들었다. 황자들과의 교분이나, 정무에 대해 말을 얹을 기회 같은 것들은 사실 저의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스칸다르의 귀비 전하가 되어서도 마찬가지.
‘그래, 스무 살로 돌아온 덕에 이런 경험도 해 보는 거지.’
클로에는 제가 겪었던 미래를 떠올리며, 그 시선을 데메트리안의 얼굴에서 그 뒤편의 어둑한 관목 쪽으로 옮겼다.
언제부턴가 뭔가 절박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의 시선을 마주하면, 제가 기억해야만 하는 그 미래가 왠지 모르게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그 어떤 세세한 기색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데메트리안의 시선은 클로에의 얼굴에 붙박여 떠날 줄을 몰랐다.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그녀의 입에서 제가 모르는 말들이 흘러나올 때면 왠지 그녀가 제게서 또 떠나가는 것만 같았다.
팔을 쥔 데메트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맷자락 너머로도 밤바람에 얼었던 살갗이 느껴졌다. 제게 차갑게 느껴지는 만큼, 클로에에게는 제 손이 따뜻하게 느껴지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은…… 전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으니.’
늘 책이나 펜이나 검 같은 것만 쥐던 오른손에, 클로에의 가녀린 팔이 들어찼다. 조금이라도 더 제 손의 온기를 건네고 싶어서 그러쥔 손가락을 조금 벌려도 보고, 어깨 앞쪽의 튀어나온 부분을 엄지로 문질러도 보고…… 이럴 줄 알았으면 멋없어 보이더라도 제복 자켓을 걸치고 올걸.
제 팔을 덥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클로에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무언가가 저 너머에서 일렁이는 듯한 밤바다를 담은 눈빛.
스무 살로 돌아온 이후 제가 이리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적이 있었을까.
너무도 보고 싶었음에도 그런 티가 날까 싶어, 막상 제 앞에 나타난 얼굴을 맘껏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그가 보이는 수상한 기색 때문에 괜히 눈을 피해야만 했었다.
그래, 그날부터였다.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던 새로운 스무 살의 첫날, 새벽부터 그가 저를 찾아와 있던 그날부터.
그날부터, 그는 늘 뭔가 그답지 않았다.
뭔가를 바라는 듯이, 뭔가 갈급한 것을 억누르려는 듯이. 제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의 푸르른 눈동자가 빛날 때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과, 사실 아무것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과, 얄미운 마음과 그리운 마음 그 모든 것들이 가슴에 벅차오르곤 했다. 그것들이 다 너무 곤란해 외면하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그날부터 그랬다. 제가 변한 만큼 그도 변했다.
그걸 입 밖으로 내어 확인해 볼 용기는 아직 없었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을 사실로 굳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다고 해서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말야.’
클로에가 웃음 비슷한 것을 한숨처럼 흘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