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12)
일순간 만찬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입가를 닦는다거나 고쳐 앉는다거나 하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멎은 정적이었다.
제게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클로에는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의 낯을 살폈다. 방금 들은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데메트리안과 대니얼의 시선은 클로에의 낯에 고정돼 있었다.
‘내가 말을 잘못 꺼냈나? 낄 데가 아니었나?’
탁자 아래에 내려 둔 손가락이 절로 꼼지락거렸다.
클로에가 급작스레 줄어드는 자신감에 시선을 슬며시 내릴 때쯤, 시종들이 디저트를 들고 만찬실로 들어섰다. 그들이 각자의 앞에 하나씩 말린 과일과 치즈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 그에 짝을 맞춘 스위트와인을 따라주면서야 만찬실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데메트리안이 묻고 싶은 말들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고 상석의 대니얼에게 눈짓했다.
“자세히 설명해 주겠어, 영애?”
“그러니까, 마법이 관여된 것만 확인되면 마법사들의 협조를 얻기가 더 쉬울 거잖아요?”
“그렇지.”
“제가 아는 방법은 그 근방에서 마력이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거예요.”
100퍼센트는 아니지만요, 클로에의 목소리가 다시금 자신감을 잃으며 줄어들었다.
“그게 가능한가?”
“네. 음…… 제가 아는 마법사에게서 들은 건데요.”
그렇게 운을 띄우며 클로에는 이 자리에 미라벨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결단코 이번에는 어떤 으쓱함을 담지 않았음에도. 대니얼의 만찬 제안 때문에 클로에의 황궁 방문이 길어지면서 미라벨을 먼저 귀택케 한 덕분이었다.
“보석이 마력에 노출되면 마력에 오염이 돼서 그 빛을 잃는다더라고요. 좀 성에가 낀 것처럼 보이는데…… 이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일반인이 포털 이동이 아니면 마법을 직접 경험할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신전이나 외성에 설치된 포털들은 모두 교단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신성력이 개입된 거여서 마력 간섭이 방지된대요.”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군.”
그리 말하는 대니얼의 얼굴에는 순전한 놀라움만 담겨 있었다.
“교단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 같았어요. 마력이나 신성력을 사용하면 이를 정화할 수 있다는데, 사제 루카미오노에게 물었더니 처음 듣는 일이라더라고요.”
루카미오노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클로에가 흘끗 데메트리안에게 눈짓했다.
‘루카를 만난다더니, 그런 일이었군.’
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일에 대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별개로, 데메트리안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영애가 마정석에 관심이 많았나 보지?”
“아뇨, 저는 어쩌다 마력에 오염된 보석을 구해서 수소문하다가 알게 된 일이에요.”
클로에는 순도 90퍼센트의 진실로 대꾸했다.
“그 마법사는 믿을 만한가?”
예상했던 대니얼의 질문에, 클로에는 내심 만들어 두었던 답을 내었다.
“고티유 길드에 파견 나온 마법사예요. 알레지오에 문의하러 갔더니 연결해 줘서 알게 되었어요. 마도구 전공이어서 마정석에도 자연히 조예가 깊고요.”
클로에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스위트와인으로 입을 축였다. 제가 이 방법을 알고 있는 게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긴장이 두 배였다.
‘뭔가 증거라도 될 만한 걸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면 나았을 텐데.’
말로만 설명하자니 멋쩍어져서 목이 타는 듯해 스위트와인을 꼴깍꼴깍 마셨더니, 달아서 물이 더 당겼다.
그러는 클로에의 기색을 주의 깊게 눈에 담으며, 대니얼이 클로에 쪽을 바라본 채 탁자에 기대며 팔을 걸쳐 턱을 괴었다. 그것만으로도 늘 칼같이 깔끔하던 황자님의 인상은 슬며시 소탈해졌다.
그가 그런 흐트러진 자세를 취하는 건 데메트리안이나 에티엔 앞이 아니면 없는 일이었다. 제게는 익숙한 일인 데메트리안도, 그와 개인적으로 보는 일이 처음인 클로에도, 어쩌면 그 스스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보석을 취급하는 상단 이야기를 한 거군.”
“네. 보석을 운송했다면 아마 금화랑 같이 보관했을 것 같아서요. 물론 마력에 노출된다고 해서 무조건 오염 현상이 다 나타나는 건 아니고, 얼마나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지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는데…… 그래도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마력이 쓰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손으로 턱을 괴는 바람에 볼에 닿아 있던 대니얼의 검지가 톡톡,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클로에 쪽을 향해 있었지만 제 생각에 잠긴 그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데메트리안도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전령에게 공문을 보내게 하여 통보하는 대신 면담을 청해 이런 사항을 이야기할 때에, 차갑게 굳던 황실 마법사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국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부자유한지 몰라서들 이러시오? 그 협약 때문에 날개를 펴지 못하는 동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내모는 고통을 귀족 나리들께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소.’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 사람만 처벌받을 것이고, 아니라면 모두가 결백한 것인데 왜 그리 펄펄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너무 논리만 따져서 그리 생각하나…… 아니, 대니얼도 한심해하긴 했으니까.’
전 같았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효율을 빌미로 원로원의 권위를 들이대서라도 밀어붙였을 일인데, 최대한 잡음을 줄여 가며 일을 진행하려니 살필 부분이 너무 많았다. 타인의 감정을 돌본다는 건, 아직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클로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런 침묵을 견뎠다.
당시에 에티엔이 이것도 실패, 저것도 실패라고 늘어놓은 말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수뇌부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까지는 경시청의 에티엔은 모를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제게 무슨 피해라도 돌아올까 걱정되기도 했다. 제가 요즘 하고 있는 작은 사업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혼자 안 덕에 굉장히 간단하게 돈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저만이 기억하는 미래가 없었다면 몰랐을 재주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편이 좋으니까…….’
밤마다 비척대며 들어서는 에티엔의 허연 얼굴이나, 티는 안 내도 눈 밑이 우묵한 데메트리안의 지친 낯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대축일 축제 장터나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에서처럼 뭘 알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소 얄팍한 계산이지만, 당장 한두 해 사업하는 데에 지장 가진 않을 거고…… 라구 경한테 알아서 잘 당부해 놓으면 우리 이야기까지 안 하고도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 클로에의 초조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묵묵히 고민에 빠졌던 데메트리안이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뭐라도 근거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있지도 않을 일을 대비하라고 마법사들을 객지에서 고생시키란 소리로 들리는지 영 반응이 탐탁찮아. 이래서는 제대로 협조해 줄지가 의문이라서 말야.”
원래 치렀어야 할 시행착오들이 없으니 마법사들로서는 다른 방편은 생각도 않고 저들에게 무작정 화살이 돌린다고 생각해 억울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원로원과 내무부에서도 대책을 세운 것에는 고마워하면서도 다소 파격적인 대응이라 생각하는 눈치였으니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으며 고통스러운 빛을 띠는 데메트리안의 낯에, 대니얼은 슬며시 시선을 던졌다.
‘이 녀석이 이제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생각도 다 하고…….’
데메트리안이 황실 마법사단장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걸 들은 대니얼은 깜짝 놀랐다. 늘 제가 옳은 줄 알던 녀석이 누구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니. 물론 데메트리안도 설득이란 것을 하기야 했었겠지만, 지금까지 그것은 제가 옳은 이유나 상대에게 이득이 될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었지, 상대가 진심으로 납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얼마간 흐뭇한 눈빛을 보내던 대니얼이 입을 열었다.
“예산 집행은 어떻게 되고 있지?”
“일단 긴급 지원이 필요한 곳에는 구휼 기금을 먼저 풀긴 할 거야. 그리고 2차 기부금으로 지원받기로 된 영지에는 원로원 예산으로 미리 곡물이라도 먼저 사서 보내기로 했어.”
“배수의 진을 치셨구먼. 형님이 소공작께 고마워하시겠는걸.”
프레더릭이 그런 말을 했다면 또 동생을 샘내는구나 했을 것인데, 대니얼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담백할 낯을 띨 뿐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제 형님이 잘되시기를 바랐으니까.
그 말을 듣던 클로에는 갑작스레 든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와인 잔에 입을 묻었다.
‘잘 해결되면 1황자님이 올해에 황태자 책봉을 받으시는 걸까? 2년이나 빠른데 그리 돼도 되나……? 내가 주제넘는 짓을 한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눈을 돌려 슬쩍 바라본 데메트리안의 입가에 한숨이 어렸다.
“기부금이 조성되는 것에 맞춰서 상반기 예산을 다 집행해 놓으셨다니 뭐. 그렇다고 보내 주겠다고 해 놓은 구호금을 물릴 수도 없으니까.”
애초에 재산세로만 진행하려던 구휼 기금에 원로원이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그래도 어려운 시기에 지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미 한참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을 막을 짬도 명분도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살포시 좁혀졌다. 주신이 풍요를 약속하셔도 보릿고개는 막을 수 없는 게 참 알량했다.
“마법사들을 다음 주에 보내겠다고 말해 놨는데, 그 전에…… 로이, 그 마법사를 좀 만나볼 수 있을까? 길드로 연락하면 되나?”
“으응, 그렇지.”
데메트리안의 적극적인 질문에 클로에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라구에게 뭐라도 언질을 해 놔야 하니까.
“내가 일단 먼저 연락해 볼게. 네가 갑자기 연락하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잖아? 그, 황실 마법사단처럼 굴 수도 있고…… 얼핏 휴가를 간다고 했던 것도 같고 말야.”
이를 듣는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깃들었다. 물론 라구는 지금 고티유 교외의 마법사 숙소에서 푹 쉬고 있을 거였다. 며칠 전에도 라이언이 그를 만났고, 다음 주 빛의 날에도, 다다음 주 빛의 날에도 그럴 거였으니까. 라구는 이 파견 기간에 대해 감금 노예 생활이라고 말하곤 했다.
‘라구 경이 눈치가 없지는 않아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우선 입단속을 시켜 둬야겠다.’
제가 사업을 하는 것이 데메트리안에게 비밀일 건 아니었지만, 남의 입으로 알려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지금 굳이 말을 꺼내기는 또 쑥스럽기도 했고.
‘어쩌면 내가 본의 아니게 캄포 대공녀를 알게 되고 도움을 받아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