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11)
대니얼이 애초에 클로에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일을 꾸민 건 아니었다.
데메트리안을 놀리고 싶었고, 거기에 요즘 들어 뭔가 변한 듯한 그의 분위기에 둘 사이를 살피고 싶다는 마음이 더해졌던 것이다. 팍팍한 일과에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가끔씩 필요한 것 아니던가.
‘라크루아 영애에겐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데메트리안과도 에티엔과도 가깝다 보니 한 번쯤 이런 자리를 갖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니……
‘진짜 가관이네.’
라크루아 영애는 제 동생들이 그리 따를 정도로 발랄하고 따스한 여인이었고, 그 매력은 특히 크레벨 공자를 대할 때에 빛을 발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둘이 같이 있을 때의 그녀를 곁눈질하는 영식들의 시선에는 동경과 경애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데메트리안만 없으면 그 관심을 제가 받을 줄 알고 말야. 이 녀석이 정혼자가 있으니 라이벌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허튼 꿈을 꾸는 거겠지. 어리석게도.’
겉으로 보기에 둘의 관계는 누구에게나처럼 무심하게 구는 데메트리안과, 그에게조차 허물없이 구는 클로에 사이의 세월 깊은 우정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 무심한 크레벨 공자의 시선에 따스함이 걸려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숨결 하나에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클로에는 그런 그의 변화를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다 보였다.
‘저걸 그동안 어떻게 숨겼나 몰라.’
대니얼은 웃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눈매를 굳히고는 냅킨을 들어 입을 닦는 척 슬그머니 가렸다.
“영애, 식사가 입에는 좀 맞나?”
“네, 황자궁 주방 실력이야 유명한걸요.”
“동생들 만나러 낮에 오면 티푸드나 좀 맛봤을 텐데.”
“최근에 그레이스 후작가의 요리사가 황자궁으로 왔다고 들었어요. 전채 전문이라죠? 단순한 조리인데도 풍미가 좋네요. 식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확실히 밸런스가 좋아졌지.”
클로에의 평이 자못 날카롭다 생각하며 들어 올린 시선의 끝에, 또 뭔가 황송해 죽으려고 하는 데메트리안의 낯이 걸렸다.
‘……저 팔불출.’
데메트리안이 대놓고 무슨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다만 대니얼은 그를 잘 알았고, 그의 눈빛이 띠는 낯선 기색에 보는 제가 대신 창피해졌을 뿐이었다.
대니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단정한 낯을 다시금 클로에에게 향했다.
“요즘 관료들이 다 비상이라 영애의 오라비도 그렇고, 소공작도 그렇고, 영애의 측근들을 황실에서 뺏은 것만 같아.”
“제 측근이 그들만인 것도 아니고요.”
데메트리안은 또 뭔가 상처받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것이 생기고 있다는 그 안타까움이 다시금 밀려온 것이었다. 그 찰나의 동요를 상상도 못한 채 클로에는 말을 이었다.
“공동의 어려움에 맞서 일할 수 있는 것이 관료들의 의무이자 기쁨이라죠? 황자님께서도 제3기사단 부단장으로서 의무를 수행하심에 기꺼워하시는 것처럼 데미, 아, 크레벨 소공작도, 또 제 오라비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에 대한 어색함과 별개로 막힘없이 내뱉는 클로에의 말을 들으며, 대니얼은 단정하게 꾸며낸 낯 아래로 놀라움을 감추고 있었다.
‘할 말을 내뱉는 데에 주저함도 없고, 내가 넘겨짚어서 하는 말이 틀리면 틀렸다고 바로 부정하기도 하고…….’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던 관료들도, 연무장을 함께 구르는 기사들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칼같이 말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다들 그의 말이라면 옥수수로 맥주를 만든대도 믿을 이들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그에게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의 친애의 대상이자 에티엔의 누이였던 탓에, 오히려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알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다. 대니얼은 저만 아는 만족감을 담아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그런 걸 형님도 아시면 좋을 텐데.”
“1황자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흠 잡히기를 두려워 하시니까요.”
그런 면이 저와 닮기도 했었지. 평소 데메트리안이나 에티엔과 나누던 이야기와 유사한 흐름에 클로에가 비죽 웃으며 말을 흘리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급히 덧붙였다.
“아, 제 오라비가 남들 보기에 그렇게 보일 소지가 있다고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걸 제가 들은 것 같아서 올린 말씀이에요.”
클로에는 사실 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늠할 정신이 없었다. 일반 귀족들의 만찬에조차 제가 단독으로 초대받는 일 자체가 잘 없거니와, 그것이 심지어 황자궁에서 가장 어색하다 단언할 수 있는 대니얼과의 자리니 더했다.
대니얼이 클로에를 클로에 라크루아가 아닌 친구의 누군가로 인식하는 것처럼, 대니얼 역시 클로에에게 첫사랑의 친구이자 오라비의 동지인지라 내심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그는 껄끄러웠고……
그러는 클로에를 바라보던 대니얼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빛을 띠었다.
“영애의 생각은 그렇군.”
‘그래, 바로 이런 눈빛이…… 보통 내 생각을 들으면 내용도 생각 않고 어르는 듯한 눈빛들을 보내는데, 2황자 전하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담백하기 그지없는 태도 또한 왠지 모를 껄끄러움을 더하곤 했던 것이다. 물론 제 말을 말처럼 이해하고 받아 주는 인간은 이제껏 제 오라비나 데메트리안 말고는 없기도 했지만.
클로에가 고개를 들어 흘끗 상석을 바라보자, 저를 바라보는 대니얼의 낯이 깊어지고 있었다.
‘불쾌하신 것 같지는…… 않지.’
“이번에 받은 협조 요청서가 마지막이면 좋겠다.”
“나도 그 먼 데까지 전령 보내고 싶진 않아.”
“소공작 각하께서 직접 오시면 다들 좋아할 텐데. 파이겐 경도 인기 많고.”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안건이 열 개는 될걸.”
메인 디시를 마치고 디저트를 기다릴 무렵, 대니얼과 데메트리안의 입에서 농담조로나마 근래의 골칫거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와인잔에 입을 묻으며 눈을 굴렸다. 아버지와 에티엔이 정무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건 봤어도 제 또래의 청년들이 그러는 양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데미가 정말 후계자는 후계자구나. 이럴 때면 제국 아카데미에 간 영애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단 말이지.’
셰비크의 시절까지 합쳐 지난 스물다섯 해 동안 정무에 대해 말을 보탤 기회가 없었던 클로에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관료 양성 기관인 제국 아카데미에 가거나 가지 않는 게, 보통 그네들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소궁정백도 꽤 힘들어하지? 아, 체력적인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당돌하다 여겼을 수 있는 제 말을 반영하여 말을 고치시는 것에 클로에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이런 점을 에티엔이 좋게 보는 거겠지.
“좀 쉴 만하니 이 난리라고 담배를 어찌나 태우는지 말예요.”
“요즘 볼 때마다 끽연 중이긴 하더군. 내가 경시청 정원에 화재라도 나면 피의자로 지목하려고 조서까지 다 만들어 놨어.”
대니얼이 제게 농담이랄 것을 건넨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뿌듯함을 느끼며, 클로에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냄새를 풍겨서야 오던 영애도 달아날 것 같아요.”
“하하, 글쎄.”
짐짓 너스레떠는 말에 대니얼의 눈빛이 의뭉스런 빛을 띠었다. 구체적인 의도 없이 갓 성년이 된 이들이 할 만한 대꾸를 한 것뿐인데……
‘뭐지? 에티엔이 이때 만나는 영애가 있었나? 그러면 왜 그때까지 결혼을 안 했지?’
에티엔이 저에 대해 모르는 것을 미라벨이 알고 데메트리안이 알듯이, 제가 모르는 오라비의 어떤 면들을 그가 알 수도 있을 거였다.
그 혼란을 의도했던 양, 클로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끔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서 대니얼이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어여삐 봐 줘, 영애. 행상들은 낌새도 못 차렸다 하고, 용병 거리며 한들룽 지구며 다 뒤졌는데도 수상쩍은 자들이 하나 없어. 오죽하면 황실 마법사를 끌어가겠어.”
“마법사를요?”
“물리적인 흔적이 없거든.”
데메트리안이 대신 말을 받았다.
“마법사 용병은 구하기 힘드니 일반 용병들로만 호위를 꾸렸다는데, 그중에 소드마스터가 있었을 것도 아니니까.”
한 세대에 열 명도 나오기 힘든 소드마스터를 용병으로 고용할 사정이 되는 영지가 있대도, 상단 호위에 내주지는 않을 거였다.
대니얼이 신랄한 어조로 읊조렸다.
“마법사 소행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차출한다고 같은 마법사들 원성이 자자하지. 인간들, 녹은 우리가 주는데.”
“그러니까, 마법사들 소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확인하시려는 건가요?”
“응, 아무래도 그거 말고는 말이 되는 게 없어.”
데메트리안은 저만 아는 시행착오들을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일차적으로 꺼냈던 대안들 모두 확신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어서, ‘이번’에는 굳이 실행하지 않고 회의장에서 폐기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늘 비협조적으로 구니까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황실 마법사단에서만 활동하게 한 규제나 사병으로 고용되는 것을 금지한 게 무슨 저들에게 목줄이라도 채웠다는 것처럼 굴거든.”
“제 선조들이 기꺼이 맺은 조약인데, 나 참.”
황실 마법사들에게 녹을 내리시는 황실의 일원이 짓씹듯 추임새를 넣었다. 데메트리안은 알 만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마법사들이 탐구심이 높다고들 하잖아? 그래서 흥미가 동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같은 마법사를 의심하는 거냐면서 싫어하더라고.”
이어지는 말에 대니얼에게서 코웃음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용병으로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있는 걸 몰라서 내버려 둔다고 생각하나.”
하하, 클로에는 제가 라구를 용병 계약의 형태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 떠올라 어색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늘어놓던 데메트리안의 낯에는 대번에 지친 기색이 떠올랐다. 긴장이라도 풀린 것일까.
요 며칠 마법사들과 다른 관료들의 싫은 소리를 받아내느라 괴로웠던 것을 떠올리자니 얕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이 일을 잘 해결해야……’
데메트리안은 클로에 쪽을 흘끗 보며 팔짱을 꼈다.
그런 그에게 살짝 연민의 눈길을 보낸 클로에는,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듯이 탁자 밑으로 모아 쥔 양손을 꼭 맞잡으며 다시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차가워 보인다 싶을 정도로 늘 정돈되어 있는 대니얼의 얼굴에마저 어렴풋한 피로가 어려 있었다.
클로에는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 중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가 아마도 저뿐일 사항.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혹시 행상 중에 보석류를 함께 유통하는 곳이 있다면, 마법이 쓰였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제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