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10)
그치, 언니? 메리앤이 제러미에게 쏘아붙인 뒤 동의해 달라는 양 클로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클로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은 의도로 꺼낸 말이었겠지만…… 메리앤의 단호함이 일견 매정하다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 적도 없는 왕자들을 놓고 우리끼리 품평해 봤자, 실제 혼약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칠 건데 뭐.’
해맑으신 막내 황자님의 침울한 표정이 조금 안타깝기야 했지만 제 의사와 무관하게 스칸다르로 가야만 하는 미래를 떠올리니 해 줄 말이 없었다.
클로에는 그 대신 분위기를 전환하는 쪽을 택했다.
“참, 미아, 전하. 제가 선물을 가져왔어요.”
클로에가 근처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에게 눈짓해 보이자, 그들이 테니스를 치는 동안 보관해 두었던 손가방을 건네주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두 개의 작고 길쭉한 벨벳 상자였다.
“웬 선물? 내 생일 아직인데?”
“우연히 구하게 된 사파이어 한 쌍이 있는데, 두 분 수호 사도가 마침 다 피레사시잖아요? 그래서 책갈피로 만들어 봤어요. 제가 아는 마법사한테 부탁해서 책 보존에 좋은 마법도 살짝 넣었고요.”
클로에는 ‘아는 마법사’라는 말에 미라벨이 피식거리지 않기를 바라며 제 어조에 신경을 썼다.
“어머, 마도구야, 그럼?”
“이쁘다. 고마워, 영애.”
두 개의 벨벳 상자에서 나온 것은 사파이어로 장식된 책갈피였다.
얼마 전 한들룽 지구의 전당포에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쌍을 구했는데, 정화해서 팔려니 알이 작아서 별 이윤이 안 남는다기에 마침 황궁의 두 친우가 생각났던 것이다. 물의 날에 태어난 그들의 수호 사도 피레사의 상징석이 바로 사파이어였다.
“책에 꽂아 놓기엔 너무 아깝다. 화병 같은 데 둬야겠어.”
“무슨 소리야. 영애가 주신 선물인데 유용하게 써야지.”
메리앤과 제러미가 선물 받은 책갈피에서 눈을 못 떼며, 누가 더 선물에 감격했는지 대결이라도 하듯이 티격태격했다.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와중에도 클로에의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테니스의 규칙을 헷갈린 데에는 그 불편함도 단연코 한몫했다.
‘2황자 전하와 식사라니…….’
오는 길에 마주친 2황자 대니얼이 다짜고짜 저녁을 함께 들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프레더릭도 대니얼도 어려서부터 교류하고 지내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승계 구도가 얽힌 분들이다 보니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프레더릭은 그래도 적당히 사교계 지인 대하듯 하면 되는 것인데, 늘 칼 같은 대니얼은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에티엔하고는 사적으로도 친하고 지지자로서도 가깝다지만, 나와는 아무래도…… 정말, 2황자 전하랑 혼약 맺게 됐으면 어쩔 뻔했어? 데미랑도 친하신 데다가……’
생각해 보면 데메트리안을 마주친 것부터가 화근이었다. 또 어떻게 안 건지, 제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크레벨 공작저에 갔던 날 마주친 것을 마지막으로 거의 2주 만에 보는 것이었다. 근래에 그가 저답지 않게 자꾸 나타났던 걸 생각하면 나름 오랜만이었다.
제가 황궁에 오는 걸 어찌 알고 나타난 건지 수상쩍은 마음 반, 그를 본 것이 반가워 저도 모르게 설레는 데 대한 자책 반, 클로에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또 무슨 속셈일까?’
슬쩍 그의 낯빛을 살피자니 얼굴이 거칠해 보이고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이……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슬금 피어오르는 걱정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역시 구휼 기금 문제겠지.’
왜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에티엔 역시 같은 이유로 매일같이 야근이었으니까. 경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목에서 행상들끼리 교류하다가 일이 생겼을 수 있다고 가정해 고티유 근방을 오가는 상단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한들룽 지구에서 마주친 노엘 웬즐리 역시 그 일환으로 상단들을 탐문했을 거였다.
‘대축일 주간이 가니 새로운 문제가 터지네…….’
가끔 밤의 복도에서 희끄무레한 얼굴로 비척대는 에티엔을 마주칠 때면 마치 어린 시절의 그 병약하던 도련님을 보는 것만 같았다.
‘뭐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텐데.’
데메트리안이며 에티엔이며, 제 주변의 청년 관료들을 괴롭힌 이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고, 때문에 클로에 역시 들은 바가 없어 실마리조차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다음 주면 숨 돌릴 것 같기도 해.”
“그럼 만나기로 한 거 한 주 미룰까?”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돌아오는 즉답. 클로에는 익숙해진 곤란함을 다시금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땐, 매일같이 곤죽이 되어 가는 에티엔을 보며 지레 미안해진 클로에가 먼저 약속을 미뤘더랬다.
‘그때 데미도 내가 미루자는 것을 아쉬워했었을까. 아니지, 그랬으면 그러지 말라고 답신을 보냈을 텐데…….’
그런 것을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소공작, 영애!”
원로원 쪽 입구에서 대니얼이 뛰어 나오고 있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응, 오랜만이야. 소공작을 만나러 온 건가?”
“설마요. 3황자 전하와 캔달우드의 공녀와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이 바쁜 때에 제가 그런 눈치도 없겠냐는 마음을 담아 뱉은 ‘설마요’였지만, 데메트리안은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 그 녀석들과……”
대니얼이 손수건을 꺼내, 한쪽으로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칼 사이로 송골송골 배어 나온 땀을 찍어 내며 데메트리안의 낯을 흘겼다. 표정 관리 좀 해라, 이 녀석아…….
“영애, 오늘 저녁에 혹시 일정 있나?”
“아뇨, 바로 귀택할 예정입니다만.”
클로에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작게 긴장하며 답했다. 고티유 고위 귀족가의 아녀자가 하루에 두 개 이상의 일정이 있을 리가 없으니 답을 알고서 묻는 것이렷다. 물론 요즘의 클로에는 바빴지만, 황성에 온 차림새로 그녀의 사업과 관련된 곳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
“내 동생들과 살갑게 지내 주는 게 고마워서 그런데,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그리 말하는 대니얼의 시선은 ‘웬 개수작이야’라는 말을 차마 못 내뱉고 있는 소공작의 낯을 향해 있었다.
아르투젠의 2황자 대니얼은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웃겨 죽을 것만 같았다.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크레벨 소공작과 라크루아의 영애가 눈앞의 음식만 깨작대며 뭔가 내외하는 분위기…… 일전에 제 친우의 기색에서도 느꼈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분위기가 친 오누이처럼 살갑게 구는 가운데 이따금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눈빛 좀 주워 담으라고 말하고 싶다.’
데메트리안은 전채로 나온 병아리콩 샐러드를 한 입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제 맞은편의 클로에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뭘 흘리기라도 하면 받아 주기라도 할 것인지. 클로에가 완벽한 예법으로 비워낸 접시 개수가 리비에라 강을 메울 것인데 말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10년 만에 되살아난 줄 알겠어.’
육성으로 빈정대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대니얼은 소리 없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본디 그는 데메트리안과 시국 한탄이나 하려고 원로원으로 발걸음 했던 차였다. 구휼 기금 문제로 인해 그가 속한 제3기사단이 방비하는 외성에도 불똥이 떨어져, 그 역시 고된 나날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외성이 포털 집결지였고, 동시에 고티유의 검문소 역할도 했으니까.
쏟아지는 협조 요청 때문에 며칠을 바쁘게 보내다가 드디어 온 비번 날 상황을 좀 자세히 알려고 찾았더니, 그 성실하신 친우께서 업무 외적인 이유로 자리를 비우고 없다는 것이 아닌가.
“아마 라크루아 영애를 마중 나가지 않았을까요?”
“라크루아 영애를 이 시간에?”
“다른 일로 오시는 거겠죠. 소공작이 요즘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물색없게 굴진 않아요. 화장실 간다고 해 놓고선 계단 쪽으로 가는 게 너무 뻔했지만요.”
과연 근 1년째 합을 맞춰 오고 있는 동료의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그 어조에 신랄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것이, 눈앞의 누스 영애 역시 저와 비슷한 태도로 소공작의 변모를 바라보는 것이렷다.
대니얼은 마치 십여 년 전 소년 병사단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고지식한 꼬맹이를 놀려먹음으로써 우애를 표현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황성 정문으로 향하는 대니얼의 입가에 자꾸 그때의 것만 같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황궁 입구 언저리에서 발견된 제 친우께서는 라크루아의 영애를 에스코트하고 계셨다.
‘저 의젓한 체하는 것 좀 봐, 깜찍하기는.’
저와 같은 이유로 잔뜩 지친 낯이 선연한데 말이다. 지금이야 묵묵한 낯으로 뭇 영애들의 선망을 자아내는 소공작이어도, 대니얼에게 데메트리안은 여전히 조숙한 척하는 꼬맹이 신사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반쯤 충동적으로 내뱉은 그 말에, 물론 라크루아 영애의 눈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데메트리안의 표정이었다.
‘단둘이 있었으면 잘 하지도 못하는 욕이라도 했겠어.’
피로에 절은 눈을 부라리고 있는 표정이라니. 이런 면모를 모르니 사교계 인사들이 ‘무엇에도 열 낼 것 없는 여유로움’이라 그를 칭송하는 걸 테지. 대니얼은 속으로 제 백성들에 대한 연민을 보냈다.
“여어, 소공작, 에스코트 잘 해 드리고 왔어?”
클로에를 내궁 앞에서 배웅하고 돌아온 데메트리안이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손님용 소파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대니얼의 능청스런 낯에 데메트리안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퓌잘리 누스의 얼굴에 비친 희미한 호기심을 보니 그러한 충동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냉철한 지도자의 얼굴로 구휼 기금 유실 사건에 대해 몇 마디 묻던 황자님께서 능글거리는 소년의 낯을 보이시는 모습에, 지지자 퓌잘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것이 그의 낙차 큰 매력이련가.
“너, 이……”
“이따가 너도 밥 먹으러 와. 어차피 야근이잖아?”
그 말 하나를 하려고 했던 양, 대니얼은 킬킬대며 데메트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는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이 서늘했다.
‘황자 패면 국법으로 잡혀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