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9)
‘그래도 내일 잠깐 볼 수 있으니까.’
울적해지던 마음을 털어버리려, 데메트리안은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는 제 앞의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구휼 기금 운반 협약서」
클로에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서 기약한 다음 번 만남은, 그날로부터 3주 뒤인 다음 주 물의 날이었다. 원래 주기대로 2주 뒤 물의 날에 만나자 하고 싶은 것을 마담 에투알의 살롱과 겹치는 바람에 미루면서도, 데메트리안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바빠질 것을 알았으니까.
이번에 내무부에서 진행하는 보릿고개 구휼 기금 사업에 원로원에서 귀족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힘을 보태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주부터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집, 황궁, 집을 오가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 호위 기사의 바람대로.
제국이 워낙에 넓다 보니 지역마다 보릿고개 사정이 달랐기에, 우선 귀족들의 기부금을 원로원에서 모은 뒤 예산을 집행하려던 과정에서 사달이 났다.
‘큰일 났습니다! 코르테령에서 오던 상단이……’
‘오보즈령에서 수송해 오던 기부금에 문제가……’
‘카틸라령 상단에서 전보가 왔는데요!’
지난주부터 각지의 귀족들이 보내는 기부금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는데, 이를 대신 수송하여 제도에 도착한 상단들이 보고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그 기부금을 도둑맞았다는 것이었다.
보통 각 영지에서 제도로 진상을 올릴 땐 포털을 사용하는데, 이번의 경우 현금을 보내는 것이어서 보수적인 영주들이 행상을 통해 직접 보내는 편을 택한 것이 문제였다. 포털이 수십 년째 아무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과 별개로, 마법사들을 상것으로 보는 귀족 나리들께서는 포털을 이용하면 금화가 사라질 거라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후원금이 늦는다고?’
‘40퍼센트 정도가 아직입니다. ……지방 영지에서 후원금을 수송해 오던 행상들이 하나같이 털려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현금을 행상으로……’
‘보수적인 영주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원로원에서 포털을 이용하면 후원금의 5퍼센트를 되돌려주기로 했는데도 그러더군요.’
‘벌써 집행안을 다 짜 놨는데…… 이러면 아바마마를 뵐 면목이 없잖은가.’
1황자 프레더릭에게는 이번 사업이 굉장히 중요했다. 프레더릭이 내무부에 관여한 이후 처음으로 주도하는 대규모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명확하지 못한 이유로 자꾸만 황태자 책봉이 미뤄지는 그로서는 일을 잘해 내도 모자랄 판에 흠이 잡힐 순 없었는데.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그러지 마십시오. 정부가 푸는 게 예산인데 이럴 때마다 쓰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일단 긴급 지원이 필요한 곳에 먼저 모인 기금을 풀겠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들어오는 대로 집행하지요.’
‘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영주들이 포털로 수송할 수 있도록 데메트리안이 장려 방안을 낸 덕에 피해는 예상보다 적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보내라고 하면 순순히 그리 할까?’
‘포털로 보내지 않아서 입는 피해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게끔 협약서를 만들기는 했는데…… 정말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겠죠. 도난된 금액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가을에 세수를 조정하는 식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방안을 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라도 제대로 할 것이지……’
‘혹시 몰라서 용병 고용을 지원해 줄 테니 호위를 대거 늘리게 했는데도 발생한 일입니다.’
영주들을 설득해서 부족해진 예산만큼 기부금을 다시 한 번 걷어야 했고, 한편으로는 그 사라진 기부금을 찾아야 했다. 아직 제도에 도착하지 않은 행상들을 찾아 호위도 지원해 줘야 했고.
데메트리안은 이번 기부금 수송 전후로 제가 냈던 대처 방안들과 그 결과에 대해 다시금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굳이 마법사까지 보내야 할까요?”
서류를 끼적이던 퓌잘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건이 터지고서 상식적으로 제시할 만한 방안들을 모두 건너뛰고서, 원로원의 일에 가장 비협조적이라는 황실 마법사단에 원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용병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마법사들의 소행일 수도 있으니까요. 지방 영주들이 마법사 용병을 고용할 수는 없고.”
“하긴…… 마법사 길드가 고티유랑 5공작령에만 있으니…….”
만년필로 제 입술을 톡톡 치던 퓌잘리도 납득한 듯이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협약서에 담을 새로운 방법 또한 부분적으로 실패할 수 있었다. 굳이, 구욷이 포털을 경유하기 싫다는 영지에는 마법사를 파견하고, 포털을 이용해서 보내는 영지를 위해서는 원로원의 현금 수송 마차에 엄중한 경호를 붙여 고티유 외성의 포털 집결지로 마중 나가기로 했다.
그가 아는 패착은 최대한 막은 방법이었지만, 이 사건은 제게 끝내 풀지 못한 사건이었기에 어떤 방법이 먹힐지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땐 얼마나 많은 대처들이 실패했었는지, 정말 퇴근하고도 위스키 몇 잔을 마셔야만 잠이 왔었는데.’
남들은 프레더릭의 명운만 달린 줄 알지만 제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크레벨의 후계자로서 예비 황태자와 함께 벌인 사업이었으니까. 프레더릭이 사재라도 털고 싶은 그 심정을 어찌 모르랴.
‘이걸 보란 듯이 해결해야 아버지께 말씀드릴 명분이 서는데.’
제 계획을 떠올리는 데메트리안의 마음이 다시금 초조해졌다.
이 난관을 크레벨의 후계자답게 잘 헤쳐나간 뒤,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서 혼약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것. 그런 것들을 떠올리니 다시금 머리가 아파 왔지만……
그에게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은 따로 있었다. 고민의 꼬리는 결국 또 다시 클로에에게로 돌아갔다.
바빠지면 그리움이 옅어질 거 생각한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리면 언제라도 달려가고픈 마음을 잠시나마 물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만큼 며칠쯤은 별것 아닐 줄 알았는데. 처음 알게 된 이 감정이 어디로 튈지 그가 알 리가 있었을까.
남의 감정을 살필 필요 없던 이가 제 마음이라고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제 마음의 괴로움이 무슨 연유에서인지도 모른 채 데메트리안은 연모하는 이를 눈에 담을 궁리만 했다. 그 이유를 찬찬히 따져 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마음속에서 그는 라크루아의 담장을 몇 번도 넘었고, 그녀의 위치를 추적하라고 파이겐을 몇 번도 더 파견 보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바로잡기 전까지는, 막무가내로 감정에 휩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야 적당한 이유를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젠 쓸 만한 변명거리도 다 떨어지고 말았고.
‘납득할 만한 핑계가 아니면 로이의 마음을 또 상하게 만들 텐데……’
그 적당한 이유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제가 억지로 갖다 붙였던 것임을 생각지 못하는 데메트리안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겐 무엇을 성찰할 여유가 부족했으니까.
‘그때 부탁해 두길 잘했지. 덕분에 내일 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일전에 메리앤에게 가던 그 전령에게, 앞으로도 클로에가 황자궁에 서신을 보낸다면 저를 찾아 달라 한 것은 근래 들어 제가 가장 잘한 일이었다. 전령으로서는 내궁에 대신 들어가 주신다는 소공작의 배려에 그저 감읍할 뿐이었고.
‘소공작이 라크루아 영애와 절친한 것은 알았는데, 서신까지 대신 전해 주는 건 몰랐네.’
‘전령과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죠. 그, 클로에와 만나십니까?’
‘응, 다음 주에 미아랑 테니스 치러 온다는데. 짝 맞춰야 할 때만 나를 끼워 주네, 매번.’
메리앤이 또 까칠하게 굴면서 편지 내용을 안 보여 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3황자 제러미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클로에보다 세 살, 메리앤보다 한 살 어린 황실의 막내는 열 살은 많은 제 형님들보다 사촌 메리앤과 훨씬 가까웠던 탓에 클로에와도 종종 어울리곤 했던 것이다.
덕택에 데메트리안은 퓌잘리에게 다른 빚을 지지 않고도 클로에가 언제 황자궁에 오는지 알 수 있었다.
내일, 내일이면 잠시라도 볼 수 있다.
* * *
황자궁을 찾은 클로에는 미라벨과 메리앤, 3황자 제러미와 함께 황자궁 후원 옆 잔디 코트에서 테니스를 가볍게 치고서 티타임을 가졌다.
“아니, 어떻게 테니스 규칙을 헷갈릴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니가.”
“미안, 미안. 겨우내 안 쳤더니 깜빡했나 봐.”
고티유 시절에는 미라벨과 단둘이, 또는 메리앤을 만나러 와서, 아니면 리도테의 친구들과 종종 치곤 했던 테니스인데, 클로에가 규칙을 자꾸만 헷갈린 탓에 테니스 시합이 어영부영 끝나 버린 것이었다.
‘스칸다르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못 쳐서 그런가…….’
“라크루아 영애는 모든 걸 빨리 기억하니 어떤 건 조금 미뤄 둬야 과부하가 안 걸리는 것 아니겠어?”
소년과 청년, 그 경계의 아슬아슬한 풋풋함을 지닌 연갈색 고수머리의 3황자 제러미가 땀을 찍어 내며 말했다.
“그런데 누아제트 영애는 어쩜 그렇게 운동신경이 좋아? 도통 이길 수가 없네.”
“아마 제 아버지……께서 운동에 일가견이 있으셔서……일 걸요?”
하핫, 미라벨이 멋쩍게 웃었다. 미라벨이 클로에의 호위를 겸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메리앤과 함께라야 가끔 보는 정도인 황자님에게까지 알릴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번엔 테니스 칠 때 말고도 좀 끼워 줘.”
“여자들끼리 수다 떠는 데에?”
“나도 제후국 왕자들에 대해 주워들은 거 있다, 뭐.”
“그래? 그럼 스체르바뇰하고 왕세자랑 에티아 왕세자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왜, 내 초상화 해마다 보내는 걸 내가 모를까 봐서?”
메리앤이 제러미를 몰아붙였다. 후계 구도의 핵심에 있는 두 형님들과 달리, 막내 황자님께는 꽤나 만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네가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걸 알면 그 나라들에서 너를 데려갈 것 같아? 초상화만 보내는 걸 다행인 줄 알아.”
“너, 황자라고 말 좀 막 한다? 캄포 대공도 못 될 게, 아주.”
그들이 까부는 양을 보던 클로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얹었다.
“에티아 왕세자는 우리 큰 이모 아들이잖아. 난 스체르바뇰에 한 표라니까. 알폰소는 좀 그릇이 작다고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거든.”
이맘때의 여느 때처럼 메리앤과 그녀들의 정략혼 상대가 될지 모를 제후국의 왕자들에 대해 떠들자니, 클로에는 정말 스무 살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다시금 드는 것이었다.
“막상 만났을 때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 알아? 이번 아바마마 50세연 때 각국에서 왕자들이 오면 너 같은 말괄량이라도……”
“제리.”
조금 전까지 짓까불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메리앤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너는 선택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없어. 나는 황실 직계가 아니잖아. 그건 로이 언니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