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8)
살롱이 시작되기 전 뷔욘의 곁에 붙어 있었던 한껏 치장한 영애 중 하나, 룩소르 후작가의 엘레니아가 다가왔다.
‘그때도 룩소르 영애가 오면서 대화가 끝났었지.’
적당한 타이밍이네. 클로에가 저만 아는 그 뜻을 담아, 엘레니아 룩소르에게 눈인사를 해 보였다.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느라 스칸다르산 여송연 이야기까지 내뱉을 뻔했다.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클로에가 뷔욘을 향해 눈짓하자, 뷔욘이 예의 그 고운 미소를 다시 그려 넣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엘레니아 룩소르와는 비슷한 시기에 리도테를 다니긴 했지만 특별할 것 없는 친분만 유지하는 정도여서, 클로에는 굳이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목표했던 ‘살롱 중간의 대화’는 달성했으니까.
그렇듯 미련 없이 돌아서는 클로에의 뒷모습에서, 엘레니아가 붙여 오는 말에 대거리하면서도 뷔욘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 모임을 가건 얼굴만 비추고 가장 먼저 자리를 뜨던 스칸다르의 왕자는, 제가 먼저 초청해 달라 부탁했기 때문인지 이번에도 늦게까지 살롱에 남아 있었다. 그의 곁에 끊임없이 몰려들던 영애들이 귀택해야 할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다만 그가 머무르는 것이 기억보다 더 길어졌기에 클로에에게는 또 다시 소소한 의문이 달려들었다.
‘내가 그동안 알뫼 정원이나 스칸다르의 모피 같은 걸 물어봤던 게 변수가 된 걸까? 불쾌해하시지는 않으셨으니 괜찮을까?’
그와 관련된 미래를 저도 모르게 조금 비튼 건 아닐까 싶어서 걱정되었지만 그의 미소에 기대어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유익한 시간 보냈습니다.”
“전하께서 찾아 주셔서 평소보다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했던 것 같네요. 괜찮으시다면 부디 7월에도.”
“그렇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탐탁찮아했던 것과는 별개로 마담 에투알은 뷔욘의 흥행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모이던 것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이 살롱을 찾은 것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평소와 달리 일행을 대동한 덕분이었다. 자매나 여식이나 친우 등, 스칸다르의 왕자가 온다는 소문에 그를 연모하는 영애들이 붙어 온 것이리라.
사람이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엄선한 가문이나 학자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이곳에서 소개되는 학자나 예술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복작대는 편이 더 좋으니 마담 에투알의 입장에서도 흐뭇한 일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영애의 배웅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의 고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역시 없던 일인데.
여러 영식들에게 에스코트하는 영광도, 첫 춤의 영광도, 춤 한 곡의 영광도 줘 봤던 클로에지만 제 배웅을 받는 영광을 선사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배웅은 신사의 영역이니까. 거절하기 애매한 요청을 자연스레 하는 것 또한 그의 여유로운 매력 중 하나일까.
그의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 미세하게 굳어진 마담 에투알의 안색을 살피며, 클로에는 뷔욘을 따라 나섰다.
저택의 현관으로 나왔을 때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가 나올 것을 알았는지 그의 호위가 문 옆에 시립해 있었다.
‘뭔가 따로 할 말이 있으신 건가?’
마차까지 바래다 달라는 걸 줄 알고 그의 걸음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 살피는데, 그저 남의 눈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현관에 멈춰 선 뷔욘이 얼마간 뜸을 들였다. 어색한 침묵. 눈을 데로록 굴리던 클로에의 시선 끝에 뷔욘의 호위가 걸렸다.
‘저 왕자님 호위, 암기도 쓸 것 같은데. 셀까?’
혹시나 싶어 미라벨이 붙어 보고 싶다던 그의 얼굴을 뜯어보니, 역시나 낯이 익었다.
‘디에크 경인가?’
셰비크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친위대 기사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클로에는 저와 교류할 일이 거의 없는 친위대의 기사들을 머리 색이나 얼굴의 특징 같은 것으로 기억하곤 했는데,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5년 어린 그 얼굴에 그의 특징이랄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디에크 경은 한쪽 눈 밑에 흉터가 길게 난 기사인데…… 아직 그 상처가 생기기 전인가 보구나. 그러고 보니 두건에 싸여서 머리칼 색도 안 보이고…… 친위대에서도 손꼽는 기사라곤 했었으니 라비가 붙어 보고 싶어 할 만하네.’
미라벨이 셰비크에 가더라도 누군가와 대련할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그녀의 의문은 끝내 풀리지 못할 거였지만.
스칸다르에서의 기억을 안고 뷔욘의 주변을 살피는 것은 마치 한 번 읽은 추리 로망스를 다시 읽는 것 같았다.
‘가기 전까지 스칸다르에 대해서도, 전하에 대해서도 정말 아는 게 없었던 걸 생각하니 말야.’
오늘의 그는, 제가 뭘 아는 척하며 던지는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모두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이런 흥미에서 훗날 그의 연심이 비롯된 걸 수도 있을 터였다.
‘혹시 알고 지내는 신관이 있으신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 없으시다면 손님이랑 그 신관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그 신관을 가까이서 확인해 보려고 보물고 견학 신청을 해 놓긴 했는데…….’
그의 우호적인 반응에 힘입어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뷔욘이 입을 열었다.
“스칸다르산 모피에 대해서 여쭤보셨죠.”
“네? 아, 네. 유통이 아예 안 되는 줄은 몰랐어요. 아쉽게요.”
클로에는 난처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뷔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눈가를 접으며 짓는 그 고운 미소 말고 다른 식으로도 그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을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아마 고티유 사교계의 영애들 그 누구도 모르겠지.’
클로에는 새삼, 제 미래가 없었다면 몰랐을 그의 ‘진짜’ 표정들을 떠올렸다. 그는 늘 그 예쁜 얼굴에 고운 미소를 가면처럼 쓰고 다니는 인물이었지만, 제게는 가끔 생생한 표정이나 눈빛을 보여 주곤 했다.
부부의 연을 맺기 이전에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 오늘 뷔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영애들처럼 그를 사모하는 고티유의 그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역시 전하께서는……’
그런 감상에, 클로에의 가슴이 벅차오를 때였다.
“제가 고티유에 주재하는 사절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흥미 있으실 만한 것을 상단들에게 구해 보라 하지요.”
“어머.”
생각도 못한 그의 말에 클로에는 적당한 대꾸도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그 양을 바라보는 뷔욘의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자연스럽게 클로에의 손을 잡아 올린 뷔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클로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그 손등에 입을 묻었다.
“고티유에 사는 이가 어찌 라크루아를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 *
데메트리안은 제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하다가도, 10분에 한 번씩 노을 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늘은 준휴일인 물의 날이어서 오전에만 근무하면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최근 터진 사고로 갑작스레 일이 늘어난 탓에 여의치 않았던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가 자꾸만 한숨짓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근래에 쏟아지는 일거리들이야 사실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고, 어찌 대처할지 또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방도를 몰랐더라도 곧 찾아낼 수 있을 터였지만. 정무에 대한 그의 탁월한 감각은, 크레벨 공작이 슬슬 원로원 행정의 실질적인 권한을 제 후계자에게 넘겨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하아…….”
그의 한숨은 제가 갈 수 없는 곳을 상상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5월 첫째 주 물의 날. 고티유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살롱인 마담 에투알의 살롱이 열리는 날.
이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원로원 의장의 보좌관에게는 귀족들의 동향과 관련된 정말 별의별 제보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거기에는 스칸다르의 왕자가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행차하셨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근 몇 년간 스칸다르의 왕자의 사교계 활동이 극히 드문 것은 고티유 사교계의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살롱은 하필……’
그가 모를 리 있겠는가. 친애하는 라크루아 영애께서 매번 마스코트처럼 행사를 도우며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오는 곳인데.
‘그 영식이, 내가 리도테 다닐 때 신입생이라 얼굴은 알았지만 피아노 실력은 처음 들었거든. 스체르바뇰 무곡을 연주할 땐 정말 신들린 줄 알았다니까.’
저와 책에서 읽은 정치사에 대해 토론할 때와 전혀 다른 낯으로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서 얻은 고전이나 예술에 대한 지식을 재잘대던 클로에가 떠오르니, 아, 한숨이 또 나온다.
클로에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마담 에투알의 살롱을 선망하는 이들 중에는 분명 라크루아의 영애와 연을 쌓고 싶어 안달인 이들도 있었다.
‘그 피아노를 전공한다는 자도 로이가 제게 그리 찬사를 쏟아낸 걸 알았다면……’
다시금 한숨. 아무리 클로에가 황제가 정략혼의 장기말로 눈독 들이고 있는 영애라 하더라도 라크루아와 사돈을 맺거나 라크루아의 사위가 되고 싶어 하는 귀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 익명의 치들이 저도 못 보는 클로에의 그 반짝반짝한 낯을 보고 있을 걸 생각하면……
“하아…….”
“안건만 정리하면 되는 걸 왜 자꾸 한숨이에요?”
그와 집무실을 나눠 쓰고 있는 퓌잘리 누스가 타박하고픈 본심을 꾹꾹 눌러 담은 채 내뱉었다.
일이 터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척척 대책을 궁리해내기에 요 얼마간 그에 대한 친의가 경의의 단계로까지 승격했었는데. 얼른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퇴근하려는 와중에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자꾸만 전의가 하락하는 것이었다.
‘아니, 구휼 기금을 제가 빼돌리기라도 한 거야, 뭐야?’
퓌잘리가 안경 너머로 데메트리안의 낯을 흘겼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크레벨 소공작 흑막설’이 생성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데메트리안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빨리 끝내면 뭐하나 싶어서요.”
마음 같아서는 그 살롱으로 달려가 왕자고 영식들이고 뚜쟁이들이고 눈도 제대로 못 맞추게 해 주고 싶은데.
데메트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만무한 퓌잘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일을 끝내면 뭘 하긴? 퇴근하지.
요즘 들어 데메트리안의 가장 큰 고민은, 클로에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로원 의장의 보좌관에게 들어오는 사교계 동향 덕에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가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지 또한 알 수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셀 수는 없어도 클로에가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는 빈도가 떨어진 것만은 확실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주에 두어 번은 다과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그레이스 후작가의 다과회에 뭘 하느라 안 갔는지, 지난주 철의 날에는 왜 한들룽 지구에서 목격됐는지…… 물어보면 싫어할 테니 물어볼 수도 없고.’
게다가 물으러 갈 수도 없고. 그 확인할 수 없는 찝찝함이 어쩌면 불쾌함을 돋우는 것일까.
클로에에게 제가 알 수 없는 것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단코, 그래, 불쾌했다. 그에게는 그 궁금함을 해소해 달라 요구할 권리도 없었던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