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7)
‘그 어떤 화려한 드레스로 감싼 이들보다 부인만이 빛나더군요.’
‘그래 그래, 괜찮아.’
뷔욘의 미소가 왠지 굳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클로에는 위안을 얻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랴, 어차피 이 시간의 끝에 언젠가 부군이 마음을 줄 것은 저인데.
“오늘도 살롱을 찾아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손님들이 얼추 다 도착했을 때, 살롱을 위해 1층을 통째로 하나의 홀로 개조한 저택 응접실에 마담 에투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단한 핑거푸드와 스파클링 와인을 즐기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사중주를 연주하던 리도테의 음악 전공생들의 악기 소리도 그치고 온 공기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고아하게 틀어 올린 다갈색 머리칼 위로 청남색 작은 모자를 맵시 있게 얹고서 같은 색깔의 투피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귀부인이라기보다 아카데미의 교원 쪽에 가까워 보였다.
클로에는 마담 에투알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프래즈 부인으로서도 그녀는 근사한 어른이었지만, 마담 에투알의 이름을 칭하고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그녀의 모습을 늘 동경했다.
‘너도 그 산간벽지에서 몇 년 살고 나면 남편을 암살해서라도 뛰쳐나오고 싶어지지 않겠니?’
그렇다고 그녀가 프래즈 자작을 죽인 건 아니었지만.
거의 십 년을 품고 가르쳤던 클로에를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에 마담 에투알이 농담이랍시고 내뱉었던 그 말은 클로에의 뇌리에서 한 시도 잊힌 적이 없었다.
그 말에 긍정하는 때보다 부정하는 때가 더 많았지만, 오늘 하루 대화다운 대화를 입에 올린 적이 없구나 싶어지는 때에, 유능한 시녀들의 선 긋기가 서운할 때에, 왕성에서 열린 연회에 저를 못 본 체하고 부군에게 달려들던 스칸다르의 영애들을 볼 때에 여지없이 그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 때면 눈치 좋게도 부군이 제 처소를 찾아와, 함께 긴 밤을 보내고서 주먹만 한 보석이며 금사를 섞은 비단이며 하는 것들을 안겨 주시곤 하는 것이었는데.
‘서대륙의 극독을 구해 보낼 수 있으니 편지에 당근을 그려 보내라고 하셨던가. 내 편지에 무슨 그리 엄중한 보안을 해야 한다고……’
언젠가 들었던 그녀의 재치 있는 말이 떠올라, 웃음을 삼키며 청중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모두가 마담 에투알의 입만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그때, 특유의 고운 미소를 지워낸 뷔욘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것인지, 그 표정은 자못 심각하기까지 해 보였다.
마주친 시선에 클로에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을 때였다. 뷔욘의 입꼬리가 그린 듯한 호선을 지어 내었다.
그런 것을 보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아마 당근을 그려 보낼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마.
“그간 잘 지내셨지요?”
창가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이고 있던 클로에에게로 뷔욘이 다가왔다. 그녀의 곁이 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가 먼저 다가왔던 그때를 떠올리며 자리하고 있던 참이니, 클로에로서는 기다리던 일이었다.
“예, 왕자님께서도 잘 지내셨죠?”
그를 향해 약식으로 인사해 보이며, 클로에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사람은 부군이 아니야. 비슷하게 생겼고 목소리도 비슷하지만……’
긴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제국의 신사복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제국의 여느 귀족 같았다. 제국에서 보기 힘든 밝은 색의 금발과 타이 대신 묶은 스칸다르식 패턴의 트윌리 스카프 같은 게 그가 온전한 제국인은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있기는 했지만.
“영애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유익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별말씀을요. 마담 에투알도 왕자님께서 관심을 보여 주셔서 흐뭇해했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담 에투알이 뷔욘의 관심을 마뜩찮아 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오고 싶다는 청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듣던 대로 박식하시고 재담가시더군요.”
“당연한 말씀을요. 마르쿠스의 그림들은 마음에 드셨나요?”
이제는 그가 이 질문을 기꺼워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내뱉었다. 그때 그렇게 물었었으니까.
“네, 뭐…… 요즘 미술계의 큰 흐름이 상징주의라더니 흥미롭군요. 그 도상학적 패턴이라는 것들요.”
거짓말. 클로에는 그가 훗날 ‘그림이란 그저 보기에 아름다우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고집할 것을 알았다.
셰비크 왕궁의 갤러리를 채울 아름다운 풍경과 일상의 정겨움을 담아낸 그림들. 회화에 있어 이렇다 할 관점이 없는 그의 선택이란 보통 그러했다. 그래서 궁정에 드나드는 미술상들도 제국에서 유행하는 도상화는 일절 취급을 안 했었지.
‘그럼에도 오신 건 역시…… 나를 보시려고?’
괜스레 얼굴이 빨개져 오는 걸 감추기 위해 클로에가 와인 잔을 입가로 갖다 대었다. 아, 벌써 잔이 비었네.
“그날 알레지오에서 마주친 건 참 의외였습니다.”
‘아, 또!’
다시금 시작되는 기억과 다른 대화.
“예에, 저도요.”
클로에는 우선 싱긋 웃어 보였다.
지난번 제국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그랬지만, 아무리 그와의 관계를 기억하는 그대로 쌓으려 노력한대도 제 행동이 바뀐 바가 있으니 예기치 못한 것들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더 자주 봐서 미리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클로에는 부러 밝은 목소리를 울렸다.
“저야말로요. 왕자님 덕분에 그 유명한 알레지오 후작님 얼굴도 알게 되었고요.”
“그분 신비주의가 좀 심하죠. 한데 라크루아와도 교류가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라크루아가 곧 고티유 아니던가요.”
“다 같은 녹을 먹고 사는 처지에요.”
그 어떤 귀족이 라크루아를 추켜세울 때면 라크루아들이 외운 듯이 대꾸하는 말.
그가 제 가문에 대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게 새삼스러웠다.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와의 추억에서 그는 늘 스칸다르의 정점이었으니까. 아마 고티유에 있을 때에야 이런 식의 대화를 곧잘 했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많은 책무를 짊어지신 가문 아닙니까.”
“알레지오 후작님은 아무래도 관심사가 좀 다른…… 곳에 있으시잖아요?”
“그분이 제 사업 이익과 연관된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으시죠.”
클로에의 에두른 표현에 흥미롭다는 듯이 제 턱을 쓸던 뷔욘이, 지나가던 사용인을 불러 그의 쟁반에서 와인 두 잔을 집어 들었다. 클로에의 손을 쥐며 빈 잔을 넘겨받고 새 잔을 쥐여 주는 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매번 이렇게 불쑥 다가오셔서 놀랐었지, 그래. 손등에 키스하셨을 때도 그렇고…… 누굴 대하건 늘 여유로운 분이셔서, 그때엔 별 의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클로에의 얼굴이 누구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데메트리안의 여유가 무엇에도 특별한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거라면, 뷔욘의 여유는 자신이 누구에게서도 호감을 취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아서 오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클로에가 명확히 인식하기는 힘들었지만, 묻지도 않고 제 잔을 바꾸어 주는 그의 행동에서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무례할 수 있는 그 행동에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으니 제게 새 잔을 쥐여 줬을 거였다. 제 기억 속의 이야기가 얼마간의 겉치레 인사에서 그쳤던 것을 기억하는 클로에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짜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스칸다르 이야기가 아무래도 만만하겠지…….’
알뫼 정원 이야기에 당황하셨어도, 제 나라에 관심 있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으리라. 클로에는 재빨리 제 최근의 관심사를 건져내었다.
“혹시 스칸다르산 모피를 따로 취급하는 곳도 알고 계실까요? 스칸다르의 야생 동물들은 털 빛깔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클로에는 알뫼 정원을 언급한 것을 둘러댔을 때처럼,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언급하듯 말을 지어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뷔욘은……
“……영애께선 늘 저를 감탄케 하시는군요.”
한동안 놀란 듯이 클로에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가, 이윽고 눈초리를 접으며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늘 보던 그 미소였지만, 어딘가 좀 더 해사했다.
‘아차.’
반응이야 나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제가 스칸다르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아는 티를 내었음을 깨닫고 클로에는 제 혀를 살포시 깨물었다.
스칸다르는 대륙의 동북쪽 한 구석에 곰베르 산맥과 얼지 않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그에 대해 알려지는 바가 많지 않았다. 제국 연방에 속한 제후국임에도 말이다. 스칸다르와 캄포령이 국경을 맞대고야 있었지만, 캄포가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인 데다 왕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보니 교류가 없어 더 멀리 떨어진 고티유에서 스칸다르에 대해 뭘 알기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스칸다르의 풍토에 대해서, 제국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것도 아닌 일개 귀족 영애가 박식하게 알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데……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시니 괜찮을까? 오히려 반가워하시는 듯도 하고…….’
그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보니, 이상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가 스칸다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들이었으니까.
“제 어머니께서 다른 나라 문화에 관심이 많으세요. 아무래도 라쥐르 출신이시다 보니…… 스칸다르 모피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몇 년 뒤에 그렇게 될 거라는 말만 빼고. 진실에 거짓을 살짝 섞어서 말을 만들어 낸 클로에는, 뷔욘의 마음에 아주 자그마한 의심의 싹도 자라지 않길 바랐다.
그의 낯을 살피니 그의 입매가 평소와 다른 양의 호선을 띠고 있었다. 클로에가 짐작하는 한, 이는 진심이 섞인 미소였다.
“제 고국의 특산품을, 말씀이십니까.”
“네, 어디서 들으셨는데 담비나 여우의 털 빛깔이 다르다고 하시면서…… 오늘 오셨다면 직접 여쭈셨을 텐데 편찮으셔서 못 오셨거든요. 대신 여쭤봐 달라고 하셔서요.”
어머니가 편찮으신 것 빼고는 거짓말투성이인 말을 지어 내니 괜히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아, 클로에는 뷔욘이 쥐여 준 와인 잔으로 입을 축였다.
‘잘 넘어갔겠지……?’
다시금 일말의 불쾌한 기색이라도 있을지 살펴보았지만, 그러고 보면 클로에는 그가 제 앞에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고티유 시절에도, 셰비크에서도 워낙에 다정하셔서.’
클로에의 걱정과 달리 계속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던 뷔욘이 웃음기를 담아 말을 받았다.
“글쎄요, 제국과 유행이 달라서 정식으로 유통하는 상단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가요…….”
역시 루시엔의 조언을 들어야 하는 걸까. 저의 이 야심찬 행보에 자꾸만 루시엔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찝찝하던 차였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느낌이랄까. 괜스레 오기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전하와 친분도 쌓을 겸 새로운 정보도 얻으려던 건데.’
쩝,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소득이 없으니 괜히 아쉬웠다.
그런 마음을 숨기며 쳐다본 뷔욘의 얼굴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기색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마치 클로에가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기다려진다는 듯이.
클로에는 그 얼굴을 잘 알았다. 뷔욘은 후일에도 제게 무슨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성향은 못 되었으니까. 늘 말을 거는 것은, 그녀였던 것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전하께 재미있게 들리는 것 같아서 다행일까.’
제 얼굴을 상냥한 낯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그 시선에,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머리를 다시 굴릴 때였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