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6)
클로에가 노엘과 주고받는 말을 듣던 루시엔은, 슬그머니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입을 열었다.
“그럼 아가씨, 저흰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시죠, 단주님.”
그러고는 미라벨과 노엘을 향해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마르티노와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노엘 웬즐리의 시선이 조금 오래 그쪽을 향해 머물렀다.
“아시는 상인들입니까?”
“아, 네. 캄포 대공령의 상단이라네요.”
“아, 캄포…….”
루시엔의 포부를 기꺼이 여긴 캄포 대공이 차명으로 상단을 하나 꾸려 주었고, 저 호위 기사에게 단주 행세를 시키고 있는 거랬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캄포, 캄포라…….”
노엘이 그 이름을 입속에서 다시금 울렸다.
그러는 양을 보는 클로에의 마음에 또 다시 루시엔을 대할 때의 거북함이 스며들었다. 캄포에서 자연스레 연상될 크레벨, 그리고 그 소공작과 저의 애매한 사이가 괜히 노엘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진 것이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겠지……. 요즘 들어 데미가 자꾸 수상하게 구니까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쏠려서 그래.’
옅은 자괴감을 느끼던 클로에는, 이를 털어내려는 듯이 애써 발랄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경께서는 시찰을 나오신 건가요?”
“아, 저는.”
노엘이 저와 함께 나온 경비대원 둘을 흘깃 바라보자, 그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확인한 노엘이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제도에 오는 상단들에 좀 이상한 낌새가 있어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아직 공론화 단계는 아니지만 라크루아에는 고티유의 비밀이 없으니까요. 조만간 에티, 에티엔 경 통해서 들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노엘 웬즐리가 처음 본 그날처럼 입꼬리를 재빠르게 들어 올려 보였다. 상단이라. 클로에는 재빨리 이즈음에 고티유의 모든 관료들을 괴롭혔던 사건을 떠올렸다.
“혹시 그 상단들이 여송연을 취급하나요?”
“네? 여송연은 왜……”
“아닌가요? 담배 냄새가 배어 있으셔서 혹시 그런 쪽 상단에 들르셨던 건 줄 알았어요.”
“아, 여송연 냄새가 독하다고는 저도 들었습니다. 그건 아니고, 요즘 경시청 관료들이 다들 담배가 늘었다 보니 제게도 뱄나 보네요.”
그러고 보면 대축일 주간이 지나 좀 한가해지나 싶었던 에티엔의 퇴궁 시간이 슬금 늦춰지고 있었더랬다. ‘그 사건’이 경시청에 특히 고생스럽기는 했지…….
이를 떠올린 클로에가 장난스레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오빠도 담배 좀 줄이라고 전해 주세요. 통 보기가 힘들어서요.”
노엘 웬즐리가 싱긋 웃었다. 눈매도 가느스름하게 호선을 그리는 것이, 경시청 관료의 업무용 미소가 아니라 웬즐리 자작 영애 본연의 미소 같았다.
* * *
5월의 첫째 주 물의 날. 두 달에 한 번 있는 마담 에투알의 살롱이 열리는 날이었다.
백년가약을 맺었던 제 남편이 10년도 못 채우고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혼자가 된 마담 에투알은, 결혼 생활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며 재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었다.
학식이 뛰어나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는 두 달에 한 번 고티유 한갓진 곳에 자리한 자신의 저택에서 살롱을 열었다. 고전을 다함께 읽거나 신진 예술가를 소개하는 그 자리는 수준도 높고 대중적인 재미도 있어서 사교계에서 인기 만발이었다.
저택의 규모 때문에 한정된 인원만을 초대하여 여는 것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살롱이 열리는 날마다 고티유와 그 근교에 머무르는 모든 귀족 가문의 마차가 그녀의 저택에 다녀갔으리라.
클로에는, 그런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초대장 없이 참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부인!”
디의 도움을 받아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가 저택 앞에 마중 나와 있던 중년의 여성, 마담 에투알에게 달려가 손을 맞잡았다.
“잘 지내셨죠? 살롱이 아니었어도 찾아왔어야 했는데.”
“마담이잖아, 오늘은.”
“헤헤, 아직 아무도 없잖아요.”
클로에가 마담 에투알의 팔짱을 끼면서 아이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스칸다르의 왕자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말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그냥 초대장만 부탁하신 거였어요. 우연히 마주쳤는데 여쭤보시더라고요.”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고? 속으로는 고티유 인사들 비웃는 게 뻔히 보이던데, 나 원.”
“부인.”
그러지 마시라는 듯 클로에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난처한 목소리를 내었다.
까도 내가 깐다고, 남이 부군을 험담하는 소리를 듣는 게 괜히 싫었다. 아직 제 부군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누구와도 척지는 일 없는 클로에의 애교로 받아들인 마담 에투알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뭐, 이따가 보면 알겠지.”
“어머니께서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신다고, 모쪼록 오늘 살롱 성황리에 마무리하시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또 편두통인 게지? 내가 다음 주에 한번 간다고 전해 주련? 서대륙 상인에게서 구한 게 있어.”
“네, 요즘 저희 주방에 마카롱이 끝내 주니까 기대하세요.”
“너는 성년식도 치른 애가 끝내 준다는 게 뭐니?”
헤헤, 클로에가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크레벨 공작부인이나 제 유모인 누아제트 남작부인을 대하면서도 느꼈지만, 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마담 에투알은 클로에가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방식을 만들어 준 이였으니까.
마담 에투알의 부모님은 라쥐르 공작가의 가신이었고, 그래서 훗날 라크루아 궁정백부인이 될 소녀 아녜스와 훗날 마담 에투알이 될 소녀 마고는 자연스레 막역한 사이로 자라났다. 아녜스가 고티유로 올라올 때에 마고도 함께 올라와 리도테에서 수학했지만 각자 결혼하면서 떨어졌다가, 마고에게 프래즈라는 성을 준 남편이 작고하자 궁정백부인이 그녀를 고티유의 궁정백저로 초빙한 것이었다.
에티엔과 클로에의 가정교사로서.
라쥐르의 뜨거운 태양과 태곳적 이야기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리워하던 궁정백부인에게는 제 친우가 절실했고, 그 친우는 마침 학식이 뛰어나 라크루아에 기거할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에티엔과 클로에가 각각 제국 아카데미와 리도테로 진학하게 될 때쯤 궁정백저에서 독립해, 지금의 이름으로 고티유 사교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혹시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가시나요?’
‘그럼요, 당연히요. 왕자님께서 혹시 초대장이 필요하신 걸까요?’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구하기 힘들다는 마담 에투알의 살롱 초대장을 얻기 위해 사교계 인사들이 라크루아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마담 에투알이 저를 ‘무슨무슨 부인’으로 만들어 줄 남편 없이 고티유의 사교계에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라크루아의 덕이었으니까. 살롱 초창기부터 라크루아 모녀가 꼬박꼬박 참석해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다만……
‘왕자님께서도 살롱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워낙 유명하니까요. 그리고 이번 살롱에 재밌는 작품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글쎄, 정말로 그가 살롱에 관심이 있어서 초대장을 부탁한 걸까?
이후에 그와 생활을 함께하는 사이가 될 클로에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품었다.
이번 살롱에서 소개될 화가는 성화나 역사 기록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징주의자 마르쿠스였다. 그런데 스칸다르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에르드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에다, 제국의 역사화란 스칸다르에게는 피지배의 역사인데 스칸다르의 왕자가 그걸 기대할까?
‘더군다나 동시대 회화에는 별 관심도 없으신데.’
그런 의문과 별개로 클로에는 그때도 지금도 큰 고민 없이 이를 승낙하였다. 사교계에서 ‘예쁜 왕자님’으로 인기 높은 뷔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교계 모임의 흥행을 좌우하는 유명인사 중 하나였으니까.
볼모로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소년 시절에나 불러 주는 곳에 꼬박꼬박 참석했었지, 성인이 되고서는 황실 행사에나 간신히 얼굴 비출 뿐 웬만한 사교계 모임에는 두문불출이었다. 십여 년의 고티유 생활 동안 초대장을 걸러내는 요령과 그럴 만한 권력을 획득한 덕이었다.
성인이 되어 원숙해진 미모를 좀처럼 뵙기 힘들어졌으니 그의 주가는 끝없이 상승했는데, 덕분에 고티유 사교계에서는 연회를 흥행시키기 위해서 섭외할 인물 일순위에 늘 스칸다르의 왕자가 꼽혔다. 실제로 그게 성사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오늘도 왕자님은 안 오시려나요?’
‘왕자님요? 황자님 아니고요?’
갓 리도테에 입학한 열다섯의 클로에가 연회에 참석할 때면, 리도테의 선배들이 한숨과도 같은 말로 ‘왕자님’을 찾는 것이었다.
‘영애는 아직 뵌 적이 없으신가요? 스칸다르의 왕자님요.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랍니다.’
‘분명 황실 연회에서도 돋보이셨을 텐데, 아직 모르시는군요?’
‘연회에도 곧잘 참석하셨는데, 요즘엔 통 안 보이시네요.’
‘룩소르 후작가의 살롱 정도면 꽤 볼거리가 많아서 오실 줄 알았는데.’
‘룩소르 영애가 아쉬워하겠어요.’
‘사교클럽에는 가끔 걸음 하신다는데, 우리가 갈 수도 없고요.’
‘그러고 보니 다음 달 그레이스 후작가의 살롱엔 오신다고 들었어요.’
‘어머! 그럼 거긴 정말 꼭 가야겠네요.’
데메트리안이 아닌 다른 남성의 미모가 물이 오르건 말건 알 바가 아니었던 클로에는 그해 연말 라크루아의 이름으로 열린 자선 경매에서야 그와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아, 그 탄신연 때마다 계시던 하얀 분.’
부모님을 따라 황궁의 연회에 참석할 때면 고위 귀족가 자제들과 어울려 있던 색소 옅은 미소년이, 제가 새로 사귀게 된 영애들이 ‘왕자님’이라며 찾아대던 바로 그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주변의 또래의 남성들이라 봐야 데메트리안이며 두 황자님들이며 모두 진한 인상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그의 첫 인상은 이색 그 자체였다.
‘말로만 듣던 궁정백 영애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래서 눈초리를 접으며 예쁘게 웃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던 기억.
만날 때면 그리도 곱게 웃으시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붙여 주시는 덕에, 이즈음 클로에에게 뷔욘은 ‘마주치면 웃어 주시는 다정한 왕자님’이었더랬다.
‘그럼, 살롱에서 뵐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때 뵈어요.’
오늘 살롱에 참석한 클로에의 마음은 이전과 달리 결의에 차 있었다. 이 살롱에 방문할 뷔욘과의 대화를 제가 기억하는 대로 이끌어서, 그와 저의 관계를 이전처럼 이루리라. 제 평온한 미래의 셰비크 생활을 위해.
‘예쁜 왕자님’께서 참석한다는 소문에,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쥔 가문의 영애들은 모두 황궁 연회에라도 가는 것처럼 열심히 치장하고 몰려들었다. 마담 에투알의 살롱의 수준이 부담스러워서 평소에 걸음 않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땐 그냥 이 영애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지금의 클로에는……
‘아무리 그래도 좀 차려입고 올 걸 그랬나.’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제 기억과 동일하게 ‘그때’에 입었던 단정하기 그지없는 드레스를 입고 온 것이었다.
마담 에투알의 조수 역할을 자처하는 제 역할에 걸맞은 차림새였지만, 아무래도 미래에 제 부군이 되실 분이 한껏 치장한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걸 보는 마음은 괜히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