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5)
클로에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에티엔을 흘끗 쳐다보았다. 에일이나 한 잔 마셨을 텐데 눈가가 새빨개져서는 담배를 태우는 양이 아주 사교클럽 단골 나셨다.
‘저도 어른이라고, 부모님 속 썩이는 짓은 다 하고 다니면서 스물여섯 될 때까지 결혼도 못하고.’
스물한 살의 제 오라비도, 제가 봤던 몇 년 뒤의 오라비도, 어쨌든 한심해 보이는 어머니의 아들에 불과했다. 성년 됐다고 쏠랑 담배나 배운 애송이.
“어휴, 옷에 냄새 다 밴 것 봐. 작작 좀 태워.”
“아, 이거?”
에티엔이 제 옷깃에 코를 박고 조금 킁킁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사교클럽에 여송연이 인기인데, 그 냄새가 뱄나 보네.”
“여송연?”
“이파리째로 말아서 만든 거 있어. 서대륙 상인들이 요즘 유행시켜서 말야.”
클로에는 손을 뻗어 에티엔의 옷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냄새가 좀 다르네…… 스칸다르에도 말아서 태우는 담배가 있었는데.’
제 부군이 즐긴다는 것이었는데, 제 앞에서 태우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가끔 손끝에서 무슨 매캐한 향이 나서 물어보면 손님이 다녀갔다고 했었지.
손님?
그때를 떠올리니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제 부군을 만나러 오던 손님. 비쩍 말라 낯빛은 추레했지만 의복만은 화려했던 남자.
어디가 아픈 건지 민머리여서 몰라봤는데……
대축일 때 대신전에서 본 그 신관이 낯에 익었던 이유가, 아무래도 그 손님과 닮아서였던 것 같았다.
* * *
“모피도 취급하시나 봐요?”
“엄마야!”
한들룽 지구의 구제 의복점들을 헤매던 클로에는 제 뒤에서 갑작스레 난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린 소녀의 기척이라 미라벨이 따로 주의를 주지 않은 탓이었다.
“또 뵈어요.”
루시엔이 로브 자락을 마치 치맛자락처럼 잡고 약식으로 인사해 보였다.
“옷 새로 맞추셨나 봐요.”
루시엔의 까만 눈동자가 클로에와 미라벨을 날카롭게 훑었다.
“네, 뭐…… 영애께서 조언해 주신 덕에요.”
지난번 갑작스러운 만남 이후로, 이쪽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루시엔의 말을 무시할 건 없겠다 싶었던 클로에는 바로 라이언을 찾았다. 사실 서민풍 치마라면 클로에에게도 낯선 것은 아니었다. 분리 독립파 아지트에서의 일로 상한 것을 하녀들에게 둘러댈 변명거리가 없어 그대로 버렸었을 것뿐.
‘나는, 그럼 이렇게 된 김에 바지를 맞춰 봐도 될까?’
게다가 미라벨의 경우에는, 잔뜩 경계한 와중에도 루시엔의 복색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유서 깊은 정장집 후계자인 라이언은 여성복을 지어볼 수 있게 되었다며 정말로 좋아했다. 클로에의 옷은 제 어머니의 것을 참고한 반면, 미라벨의 것들은 숫제 남성용의 축소판이었다. 여성용 바지며 드레스셔츠가 시판되는 것이 없어 당연한 일이었다. 셔츠에는 절개선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바지 역시 벙벙하게 떨어졌는데, 재질이 튼튼하고 신축성이 좋아서 활동하기에 편했다.
‘열일곱 명이 한 번에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평소 클로에의 호위로 다니면서도 평민 무사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드레스를 입고 다녀야 했던 미라벨은, 완성된 바지가 도착하자마자 다리를 이리 찢어 보고 저리 찢어 보느라 아주 신이 났었다. 클로에로서도 라이언의 솜씨나 눈썰미에 허술함이 없어 그에 대한 신뢰도를 상향 조정했다.
“지난번엔 원석 액세서리를 보시던 것 같았는데요.”
“네? 아……”
그러고 보니 미라벨이 루시엔과 그 호위의 기척이 한들룽 지구에 들어선 때부터 내내 거슬렸다고 했었지. 계속 지켜봤던 거였나……
“보석을 유통하시는 거죠?”
“네?”
클로에는 아직까지 제가 떨떠름한 되묻기밖에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알았다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제 당황함을 표현했을 텐데.
그 기색을 읽은 루시엔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제가 너무 관심이 많았죠, 죄송해요. 저와 비슷한 분을 만난 게 처음이라.”
루시엔의 말에, 클로에는 지난번 그녀의 마차에서 차를 대접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 사이에는 침묵이 종종 내려앉았었다. 루시엔을 어찌 대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클로에가 제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공녀가 혹시 나와 친해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묘하게도 그녀에게서 순전한 호감이 잔뜩 배어 나왔던 것이다. 그 기색이 부담스러워 클로에는 마차 안의 이런저런 것들에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다……”
“아, 제 상품 견본들이에요. 캄포산 제품들이고요. 캄포에는 농산물만 풍부한 게 아니거든요. 농업이 그토록 번성하려면 주변에 풍부한 자원이 있어야 하니까요.”
물어 주기를 기다린 양, 루시엔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어조에는 대공녀의 기품도, 열다섯 살 소녀의 앳된 수줍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리도테에 다닐 적에 수준 높은 발표를 하는 영애들을 많이 봤지만, 뭔가 달라.’
일말의 겸손도 없이 자신만만한 루시엔의 어조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작은 경탄을 입에 머금었다.
‘이런 사람이 데미의 짝이란 거지…….’
그리고 그 말투에는, 클로에를 주눅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상업이 발달한 오리포네의 분위기를 익히며 자란 루시엔의 눈에, 천혜의 캄포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도시로 가면 상품으로 팔릴 가치가 충분했다. 농가에서 기르는 가축, 그 가축들이 꼴을 먹는 평원, 그 평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생동물이나 몬스터, 그들이 서식하는 만년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가죽이며 질 좋은 목재 같은 것들은, 캄포에서야 흔해도 다른 영지에서는 고급품으로 팔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사서 그 이상으로 팔면 다 사업 아니겠어요?”
루시엔과의 만남은 어리둥절함과 불편함 투성이였지만, 그 말 한마디만큼은 클로에의 마음에 진하게 남았다. 제 번민과 별개로 그녀에 대한 고마움만은 잊지 않기로 다짐했을 정도로.
그날의 기억들을 되새긴 클로에는, 당황스러운 낯을 순식간에 지우고 자신감을 북돋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제 가치보다 한참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보석이나 모피들을 찾고 있어요.”
루시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번에도 명백한 호감의 표현이었다.
“구제 모피를 찾으시려는 거면 주일에 열리는 중고품 시장이 더 나으실 거예요. 여긴 대량 유통 가능한 품목들 위주로만 다뤄서요.”
“중고품 시장이라뇨?”
“리비에라 강변에 주일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것, 모르셨어요?”
“리비에라 강변요?”
고티유에서 평생을 살았대도 귀족 영애들이 고티유 변두리의 벼룩시장에 대해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클로에의 떨떠름한 반응에, 루시엔은 알겠다는 듯 작게 웃었다.
“한들룽 지구는 기본적으로 도매시장에 가까워서요. 구제 모피는 대량으로 수급하기가 어려운 품목이라 여기서는 찾기가 어려우실 거예요. 주일마다 열리는 리비에라 강변 벼룩시장에는 다양한 중고품들이 거래돼서, 수집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답니다.”
“그렇군요…….”
머릿속에서 생각이 바삐 돌아가는 듯 가라앉는 클로에의 낯에, 루시엔은 제 지식이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음을 알았다.
루시엔의 짐작은 기실 정확했다. 루시엔이 가죽을 유통하는 것을 본 클로에가, 스칸다르의 겨울 복식에 은회색 담비 털이며 금빛 여우 털이며 하는 것들이 장식되는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스칸다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곰베르 산맥에 야생하는 동물들은 그 털의 빛깔이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은회색 담비 털을 처음 보고서 어찌나 신기했던지. 아르투젠에서 담비 털은 모두 검은 색이나 갈색이니까.’
스칸다르가 폐쇄적인 만큼 잘 알려지지 않아서 지금껏 수요도 없었으나, 그 이국적이고도 신비로운 매력을 살리면 활용할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번 찾아보려던 차였다.
“대공녀께선 정말 이쪽 일에 밝으시네요.”
“네에, 저야 이곳에 다닌 지가 다섯 해를 넘으니……”
루시엔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끝을 흐리며 후드의 앞섶을 여몄다. 소녀인 티를 내지 않으려는지 머리를 낮게 묶어서 로브 속으로 넣은 모양이었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소년으로 보긴 어려울 거였다.
“혹시 이름으로 불러 주시라고 하면 좀 불편하시겠죠?”
거북함을 감추지 못하던 클로에의 눈빛에 경계의 기색마저 떠올랐다. 거기에 의구심과 당황스러움마저 섞이는 것을 지켜보던 루시엔이 난처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서로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며 공대하는 건 저희밖에 없을 거예요.”
“아, 그런가요.”
또 제가 잘 몰랐던 거였나. 클로에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혹여 숨겨진 의도가 있을까 싶어 루시엔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만났을 때에는 막연히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새까만 눈동자에는 묘한 호감이 단 한 순간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사교계뿐 아니라 제국 내에 변변한 친구도 없고, 대륙에서 최고로 번화한 이 도시에 와서도 일이나 하다 간다는 이 아가씨에게 제가 무슨 신선한 매력이라도 느끼게 했던 걸까? 하지만……
‘나랑 데미랑 그리 가까운 것 정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가? 어차피 정혼자는 자신이라는 건가?’
제가 그녀를 불편해하는 만큼 응당 자신을 불편해해야 할 루시엔이 오히려 친근하게 구는 건, 두 사람 사이의 불공평함을 배가할 뿐이었다.
‘나이차도 좀 나고, 통성명하고서 고작 두 번 본 것뿐이고, 앞으로도 별로 안 볼 것 같고……’
그 억울한 마음에 수많은 이유로 저의 껄끄러움을 합리화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그리고 데메트리안의 정혼 상대인데.’
이유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를 생각하는 클로에는 제 옹졸함에 마음이 콕콕 찔려 오는 것만 같았다.
“혹시 이름이 불편하시다면……”
답을 기다리는 눈동자를 떳떳이 받아낼 수 없었던 클로에가 데로록 눈동자를 굴렸을 때였다.
“어머!”
골목 저편에서 낯익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웬즐리 경, 안녕하세요?”
“앗, 안녕하세요?”
은회색 머리칼을 턱 근처에서 자르고 경시청의 제복을 입고 있는 여성, 분리 독립파의 체포 건으로 궁정백저에 방문했던 노엘 웬즐리였다.
‘이렇게까지 반가울 사이는 아니지만…….’
그녀가 구명줄처럼 느껴진 마음에, 너무도 친근하게 목소리를 울려 버린 것이었다. 제 마음에 뭔가 부담을 주는 사람과 아무런 감정적인 교류가 없었던 사람 중에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 아니겠는가.
루시엔을 대하던 양과는 다른 것이 제게도 느껴질 지경이어서, 클로에는 다시 한 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한들룽 지구에서 뵐 줄은 몰랐는데요.”
“재밌는 게 많다고 들어서 한번 놀러와 봤답니다.”
“그런 소문이 있긴 하더군요.”
그리 대꾸하는 노엘 웬즐리의 시선이, 클로에의 얼굴에서 비껴 그 뒤쪽의 루시엔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