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4)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어떨까.
하지만 요즘 들어 제가 자꾸 클로에를 실망시키기만 하는 걸 생각하면,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꺼내 봤자 저를 기만한다며 더 화낼 것만 같았다.
전에는 몰랐던 방식으로 저를 보는 클로에의 눈빛은, 너무나 아팠다.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대서 딱히 도움 되는 건 없는데.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너는 정말 어리둥절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게 다 준비되면 내가 다 설명할게.”
너는 그냥, 당분간만 그대로 있어 줘. 그 말을 데메트리안은 제 마음속으로 삼켰다.
‘몇 달. 정말 몇 달이면 될 거니까.’
그러고 나면 어떤 기미도 일어나기 전에 모든 게 다 정리될 거였다.
‘그땐 마음 놓고 곁에 있어 달라 애원해도 되겠지.’
뒤늦게나마 최선을 다해 볼 수 있게 되는 거겠지. 보고 싶은 때 보러 가고, 주고 싶은 게 생기면 서대륙까지 다 뒤져서라도 주고…… 제 마음속의 열망이야 수많고도 깊었지만, 우선은……
‘우선은, 그때까지 로이가 나를 미워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클로에는 모를 거여도 저는 잘못한 게 있어, 애초에 둘의 관계는 그때부터 평등할 수가 없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초조한 열망을 담아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는 클로에의 시선은 여전히 비낀 채였지만, 그 마음은 저도 모르게 철렁이고 있었다.
‘그대가 나의 나라에서 어떤 것이라도 고됨을 짊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런 때 언젠가 들었던 부군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데미가 부군처럼 고민을 혼자서 다 떠안는 것 같아서일까.’
부군이 저를 은애했다면, 비슷한 말을 하는 데메트리안의 마음도 어쩌면 같은 맥락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두근거리는 제 마음이 부군과의 기억 때문인지, 데메트리안의 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에서 우러나오는 불편함도 마음에 내려앉았다.
데메트리안이 제게 왜? 저들이 서로에게 뭘 바랄 사이인가?
‘우리는 어차피……’
그렇게 초연하려 애써보았지만, 마음에 인 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쎄.”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려 아무리 모진 생각을 해도, 쉬울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한순간도 그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뭐가 됐든 너무 늦지만 않길 바라.”
궁정백저로 돌아가는 라크루아의 마차에는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크레벨의 온실에서 받아 온 봄꽃들이 한구석에서 싱그러움을 뽐내는 가운데에 말이다. 이는 라크루아의 모녀가 그날 치 사교력을 다 썼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궁정백부인이 어떤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정백부인은 제 딸이 자리를 비켰을 때, 아니 자리를 비켜 주도록 강요당했을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두 귀부인 간의 대화는 사교계의 불문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돌려 말할 것 없이 아주 직설적이었다. 스체르바뇰의 왕녀가 고티유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아직 혼인하기 전이었던 라쥐르의 셋째 공녀가 앞으로 자주 보겠다며 맺은 인연이 벌써 스무 해를 훌쩍 넘겼다.
“오늘 참 궁금한 게 많네요. 도대체 크레벨의 모자께서 무엇을 벌이시는 건지. 그래서 라크루아만 초대하신 건지.”
“벌이다뇨,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이세요.”
공작부인이 눈을 접어 웃어 보이며, 들었던 찻잔을 컵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창밖으로 던지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느새 조금 전의 웃음기는 지워진 채였다.
“부인께선, 애들 연애 이야기…… 좋아하시나요?”
“글쎄요.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죠.”
궁정백부인은 뭔가 의도가 있는 말에 경계심을 느껴, 일부러 뾰족하게 대꾸했다.
병약했던 어린 날 때문인지 타인과 친분을 맺는 데에 소극적인 큰아들과, 정해진 혼처를 거부할 배짱도 없는 애를 평생 따라다니고 있는 제 딸을 생각하면 알아서 하게 둘 일은 아니었지만…….
“제가 모국에 있을 때 가장 설렜던 순간이 언제인 줄 아세요?”
궁정백부인은 뜬금없는 질문에 별 대꾸 없이 눈만 깜빡였다. 애초에 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공작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왕궁에 손님이 올 때였어요. 곰베르 산맥의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온 중립기사단의 단장일 때도 있었고, 부유한 상단을 이끄는 서대륙의 귀족일 때도 있었고, 마탑의 후계자일 때도 있었죠. 혹시 저들과 로망스에 나오는 사랑이라도 하게 되면 왕궁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 말하는 입가에, 철 지난 추억에 어울릴 법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는 양을 들으며 궁정백부인은 고티유로 갓 상경한 소녀 시절의 저를,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부인이 되고서 그의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의 저를 생각했다. 그 마음 누가 모를까.
“마지막으로 맞이한 손님은 공작님과의 혼약을 전하러 온 황실의 전령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전…… 그 전령이 가져온 소식보다 그와 도망이라도 치는 게 더 기대됐어요. 제국에 온 뒤에 다시 마주친 적이 없으니 사교계와 거리가 먼, 그냥 무슨무슨 경이었을 텐데.”
공작부인의 하늘색 눈동자가 만지면 시릴 듯이 빛나며 궁정백부인에게로 향했다. 알아 온 세월이 길다지만, 이런 속내를 나눌 만큼 가깝지는 않았는데.
“부인께서야 연애결혼을 하셔서 잘 모르겠지만…… 정략혼이 막 그렇게 행복하기가 힘든 거랍니다?”
호호호, 공작부인의 웃음 같지 않은 웃음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그걸 제가 어찌 모르겠어요.”
선대 라쥐르 공작의 장녀, 그러니까 궁정백부인의 큰언니는 라쥐르와 국경을 맞댄 사막 국가 에티아로 시집갔지만, 제 아들을 어엿한 왕세자로 길러내고 나서는 기후가 안 맞는다는 핑계로 두 달 중 한 달은 라쥐르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뿐일까, 작은 형부인 조르주 후작은 고티유의 타운하우스에 머무르지만, 작은 언니는 후작령에서 소일하며 지내고 있었고.
궁정백부인의 낯이 자조적으로 물들 때였다.
“저와 공작님이 좋은 부모이긴 했나 봐요. 제 큰아들은 의무만 지키면 무슨 회한도 없을 애처럼 구니까요.”
“그래서 제 아이를 정혼자 있는 영식과 어울리게 권하시나요?
“저는 데미가 가문보다도…… 저 스스로 욕심내는 것이 있다면 한 번쯤은 도와줄 수 있어요.”
“그게 맹세 아니던가요?”
“그건 크레벨의 일이지, 제 아들의 일은 아니랍니다.”
“……그럼 우리 로이는 거기에 껴서 뭐가 되나요.”
궁정백부인을 바라보는 공작부인의 눈빛에 아스라한 웃음이 걸렸다.
“그건 데미가 알아서 설득할 일이죠. 어미가 해 줄 게 이렇게 가끔 눈치 좋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정도밖에 더 있을까요. 제가 데미에게 기회를 줄 거고, 데미가 그 기회를 잡는다면 저는 지지해 줄 거란 말이에요.”
“…….”
궁정백부인의 낯이 떨떠름하게 굳었다. 요즘 그 아이들 사이에 뭔가 다른 바람이 부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부인이 클로에를 아끼는 것도 그간 데메트리안에게 정혼자가 있는 것을 아쉬워했을 정도로 잘 알았고. 다만……
“그 애가 이런 면에 서투르니, 혹시 클로에에게 혼담이 오갈 만한 곳이 있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냥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다만, 저만 자식 아끼는 어미처럼 굴던 것을 생각하니, 궁정백부인은 괜스레 머리가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로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걸 몰라서 내가 가만히 있었던 줄 아나.’
궁정백부인은 팔을 제 딸의 어깨에 둘렀다. 어느새 성년이 되어, 이제 제 품을 떠날 날이 머지않은 딸이었다.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아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랑으로 미래를 정해도 저처럼 괴로움이 있을진대 하물며 정략혼이라면…… 황자들과의 혼약을 기대한다는 건 허울 좋은 핑계였을 뿐, 궁정백부부는 제 딸이 자유롭게 마음 가는 사람과 마음 가는 곳에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 지금껏 어떤 혼약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영 이상한 데에 코가 꿰여서는, 거의 스무 해째 버둥대고 있으니…….’
궁정백부인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저를 바라보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년이라지만, 제 눈에는 아직 아이같이 말갛기만 했다. 궁정백부인의 손이 다정하게 클로에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엄마에게는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한 거 알지?”
“그럼요.”
헤헤, 클로에가 웃으며 제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시다가 던지시는 말에, 클로에는 그것이 분명 아까 공작부인과의 이야기와 연관돼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야길 나누셨었을까.
‘요즘 들어 다들 나더러 행복하라고 하네.’
다들 이런 마음이었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저를 스칸다르에 보냈던 걸까.
제 어깨를 끌어안은 채 다시 생각에 잠긴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클로에는 지난주 어느 날 밤을 떠올렸다.
매주 철의 날마다 그러하듯 사교클럽에 다녀온 에티엔은, 웬일로 곧바로 제 방에 가지 않고 같은 층 반대편에 자리한 클로에의 침실을 찾았다. 저는 취했으니 제 누이라도 마시라는 건지 와인 한 병을 들고서.
미라벨과 앞으로의 사업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얼마나 놀랐던지.
“며칠 전에 소공작이랑 외출했었다며?”
“아, 음. 그러게.”
그게 다 소문이 나나. 클로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떨었다. 에티엔이 담배를 태우고 싶다기에 발코니로 나온 바람에 조금 쌀쌀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러는 양을 보던 에티엔은 설핏 웃더니 담배를 한 모금 머금었다.
“가문 간의 약속이나, 사교계에서의 체면…… 그런 건 다 한순간이야.”
“경시청에서 천태만상을 접하다 보니 뭘 깨닫기라도 하셨나요, 소궁정백 나리?”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냥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아마 부모님도 그러실 거야.”
“취했으면 가서 자지, 웬 잔소리야? 오빠처럼.”
괜한 어색함에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클로에는 에티엔이 스스로 듣고 싶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제 오라비도, 클로에가 아는 한은 어떤 가문의 영애와 혼담이 오간다는 적은 없었는데. 스물여섯이 될 그때까지 말이다.
‘그때의 에티엔도 제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