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3)
그러니 공작부인의 소장품이 되는 편이 이 그림에게도 낫지 않을까. 제 어머니는 대륙의 현대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으시기에, 제집에 놔두고 가는 건 이 그림의 미래에 미안한 일일 터였다.
그런 마음에 답례랍시고 그림을 좋은 액자에 넣어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도, 공작부인이 제 선물이라면 무엇이건 좋아할 것을 클로에는 알았다.
“어머, 참 실험적인 화풍이구나. 우리 클로에가 점찍은 화가라니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봐야겠네.”
하인에게 제 컬렉션 방에 갖다 두라 이른 공작부인은 저택의 서편에 자리한 제 개인 응접실로 라크루아의 모녀를 안내했다.
건물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공작부인의 응접실은 유리창이 크게 나 있어 저택 정면의 정원과 서편의 숲으로 이어지는 후원, 그리고 경계에 자리한 온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풍경도 정말 오랜만이네. 알뫼 정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역시 사계절을 볼 수 있는 크레벨의 정원이 더 ‘정원’스럽지.’
저도 모르게 창가에 다가간 클로에는 한동안 넋을 빼고 그 조경을 구경했다. 제가 공들여 관리한 정원에 애정 담뿍 담긴 시선을 보내는 클로에를, 공작부인이 따뜻한 눈동자로 살폈다.
“좀 더 따뜻해지면 정원에서 다과회를 열어도 좋을 테니, 다음 달에 또 오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벌써 다음의 초대로 이어진다.
그러는 공작부인의 살가운 태도에 궁정백부인은 애매한 미소를 보냈다. 제가 요즘 느끼고 있는 딸애와 데메트리안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떠올리자면, 아무것도 확답하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데메트리안이 어슬렁 나타난 것은 세 여인들 사이에서 크레벨 주방의 티푸드와 라크루아 주방의 마카롱에 대한 칭찬이 오갈 때쯤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다가 바람 쐬러 나가던 이 집 아들 1’ 정도의 콘셉트인 모양이었는데, 몰랐다는 듯 들르는 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서재가 위층 서편에 자리한 걸 생각하면 동선부터가 맞지 않았고.
라크루아의 마차가 들어올 때부터 평소처럼 바로 튀어나가지 못하고 제 서재에서 초조하게 창밖만 힐끔댄 걸 알았던 공작부인이 보기엔 더 그랬다.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공작부인의 하늘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데미, 클로에에게 먼저 온실 구경 좀 시켜 주지 않겠니? 이 어미는 궁정백부인과 어머니들끼리의 얘기를 좀 하고 싶구나.”
“그럴까요?”
속 보이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는 녀석이 냉큼 제 말을 무는 모습에 공작부인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동시에 클로에의 표정에 일순 뾰로통함이 비치는 것이, 분명 뭔가 일이 있었던 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는 부인께서 소개해주시는 걸 기대하고 왔는데요.”
“그럼 우선 내 서재로 갈래? 책 빌려 가야 하긴 하잖아.”
어떻게든 클로에와 따로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아들의 모습에, 공작부인은 자꾸만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다잡아야만 했다.
“그래, 클로에. 그래 주련?”
클로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감돌았다. 단둘이 대화할 마음이 아닌데, 공작부인이 저리 나오니 면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양을 살펴보던 궁정백부인의 마음에 불쾌함이 깃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 딸아이가 크레벨의 모자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황……
“그래, 로이, 다녀오렴. 공작부인께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기대되는구나.”
남부의 태양이 작열하는 바닷가에서 자라난 여인은 참지 않는다. 궁정백부인의 눈에서 산호빛 바다가 일렁였다.
데메트리안의 익숙한 에스코트와 함께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데메트리안의 팔에 손을 올린 채 말없이 걸어가는데, 가벼운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살갗이 왠지 모르게 뜨거운 것 같았다.
‘어디 아픈가? 아니면 수련이라도 하고 왔나?’
여느 때였으면 거리낌 없이 바로 물었을 것이지만, 클로에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직도 그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고 그것을 단단히 드러내고 싶었다.
‘데미가 자꾸 변한 듯이 구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지금껏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부딪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야 사소한 걸로 투덕거리고 싸우고 울고 달래 주고 했었다지만,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난 두 친구는 의좋은 의남매 정도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의남매 사이에 감정 상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사심도 없는데.
실제로 사심이 있었고, 이제는 서로 감정 상할 일들도 있었고, 가까운 이들 눈에는 의남매의 ‘의’로도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클로에의 그런 마음을 짐작하는 데메트리안은 역시 딱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묵묵히 제 서재 쪽으로 향할 뿐이었다. 제가 클로에와 거닐 만한 길목에는 사용인들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해 놓은 상태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클로에의 눈에 데메트리안의 서재가 들어왔다. 공작저에 도착할 때에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둘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에서의 감회는 또 새로웠다.
‘여기 다시 오게 되다니…….’
데메트리안의 서재에 오는 때면 조금이라도 천천히 떠나고 싶어서 갖은 핑계를 대곤 했던 추억들. 바쁘다며 서류에 눈을 두려는 그에게 괜한 말을 걸거나, 이미 알고 있는 책장의 책 목록을 살펴보거나, 너른 책상에 놓인 서류들에 참견하거나 하면서.
그런 추억이 퐁퐁 샘솟는 탓에 일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클로에는 그 마음을 꾸욱 누르고 애써 표정을 감췄다.
데메트리안도 같은 것을 추억하고 있었다. 제가 바쁘다며 무뚝뚝하게 굴어도 옆에서 조잘거리던 그 목소리와 그 시간이 그리워질 줄은, 전혀 몰랐더랬다.
‘……정말로 몰랐지.’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가 이렇게 와 있다.
클로에가 소파에 앉은 뒤에도 한참을 앉지 못한 채 서성이던 데메트리안은, 언제나처럼 반대편 소파가 아닌 클로에 바로 앞으로 와서 응접탁자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맞붙을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 그답잖은 위치 선정을 의아하게 여긴 클로에가 고개를 들어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데메트리안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무엇을 고민이라도 하는지, 허벅지 위에 올려둔 제 손가락만 한참을 만지작댈 뿐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입을 연 것은 클로에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한껏 물들었을 때였다.
“미안해.”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
클로에는 그로부터 ‘사과’라 칭할 수 있는 무언가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늘 옳았고, 뭔가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치는 건 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라움은 놀라움이고, 마음 상한 건 상한 거였다. 대꾸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한 문장인 ‘뭘 잘못했는데’를 내뱉는 대신, 클로에는 침묵을 택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비껴 슬그머니 탁자 모서리 어딘가로 향했다.
무엇도 그에게 순순히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용서를 구할 타이밍일지라도.
클로에의 침묵이 길어지자,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이토록 누구를 대함에 있어서 안절부절못했던 적이 있었던가.
살면서 그에게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부도, 검술도, 인망도, 그 무엇이라도 제게로 흘러오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다. 날 때부터 공작가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특정한 무엇을 꿈으로 삼고 흥미를 가질 기회가 없었지만, 제가 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건 그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가 되었을 것이었다.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의 루카를 제외하면 그를 적대시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구나 그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 무엇에 있어서도 데메트리안은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어려운 것임을 알았다면 오만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걸 모르는 것이 그의 인기를 돋우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가 제 마음을 깨닫기 전까지.
데메트리안은 제가 클로에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 클로에와 주기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던 때에는, 그녀와의 관계 또한 그에게 수월한 무언가에 불과했다. 마음 잘 맞는 소꿉친구와 보내는 예외적으로 평온한 시간.
클로에와 시간을 보낼 때의 그 사소한 행복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서, 또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서, 그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게 생기고야 만 것이었다.
어떤 말이 가닿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클로에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동시에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을까. 데메트리안은 괴롭게 머리를 굴려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마른 침을 삼킨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어렵게.
“……네게 피해가 가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나만 괜찮으면 너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
클로에의 시선은 여전히 비껴 있었지만, 눈동자가 다른 빛을 띠는 걸 보니 제 말을 온전히 흘려듣는 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반 정도는 그러길 바라는 희망에서 우러난 판단이었고…….
내색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클로에는 제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데메트리안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조르는 건 나였으니까.’
클로에는 무릎 위에 모아 쥔 손에 힘을 꾸욱 쥐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졸라 봐야 어차피 편지 한 통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사이가 될 건데.
클로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 것에 데메트리안이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괜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제 턱을 매만졌다. 그런다고 해서 묘수가 생각나는 건 아님에도.
클로에를 대하기가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었을까.
‘다 털어놓으면 이해해 줄까?’
데메트리안은 최근 제게 일어난 일에 대해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아니 제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말이었다.
‘로이가 황자궁에서 빌려 나온 책들이 다소 초현실적인 면이 있던 걸 생각하면 도박해 볼 법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