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2)
“사교계에는 얼굴을 안 비추셔도 잘 아시네요.”
클로에의 목소리가 아까의 날카로움을 물리지 못한 채로 울렸다. 호의인지 적의인지, 루시엔의 입매가 묘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분께서 영애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하셔서요. 어떤 분인지 꽤 궁금했답니다. 족히 여덟아홉 해는 더 전의 일이지만요.”
지금껏 똑바른 호선을 그리던 루시엔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건, 무슨 의도일까. 클로에는 제가 그럴싸한 표정을 지어냈길 바랄 뿐이었다.
* * *
진이 다 빠져서 저택으로 돌아온 클로에를 반긴 것은 크레벨 공작부인의 초대장이었다.
「라크루아의 여성분들께.」
지난번 대축일 예식에서 조만간 초대하마고 말했던 공작부인이었지만 이렇게 바로 초대할 줄은 몰랐다.
클로에만 기억하는 그때에도 공작부인은 같은 말을 꺼냈었고, 실제로 초대를 해 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냥 크레벨 공작저에서 열리는 다과회 중 하나였지, 클로에나 라크루아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초대장에는 오랜만에 라크루아와 크레벨의 여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자고 써 있었다.
‘갑자기?’
라크루아와 크레벨이 제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명문가로서 친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자식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돈독함이 오래 유지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두 가문끼리만 만나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자식들이 나이를 먹어서 저들끼리 밖에서 만나게 되고, 그 부모들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식들과 무관한 사교계 인맥을 꾸려 만나는 일이 더 많아졌으니까.
클로에는 크레벨 공작부인의 초대가, 데메트리안의 기행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사람들 앞에서 자꾸 다가오고,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너 요즘 좀 많이 이상해. 알지?’
데메트리안과 외출했던 날, 데메트리안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는 준비했던 말을 쏟아내고선 곧바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서.
그런 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글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그리 예의 없이 자리를 떠난 적도 없었고, 제가 말하는 양을 묵묵히 듣고 있을 그도 아니었으니까.
둘의 담백하던 우정에 없던 감정의 파동들이 맞물리니,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만들어졌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저는 내후년이면 스칸다르로 갈 건데. 떠나야 할 때에 후련하게 떠나야 하는데, 어떤 미련도 후회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 * *
크레벨 공작부인은 뭔가 변한 듯한 제 첫째 아들의 분위기가 기꺼우면서도 어리둥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첫째 아들 데메트리안은, 딱히 엄하게 키운 것도 아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늘 의젓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했으며 책임감도 뛰어났다. 물론 어린아이가 구현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난 아이에게 어른들이 건네는 덕담이 일종의 주문처럼 영향을 끼치기야 했겠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크레벨 공작 부부가 아이를 다그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렸을 때엔 자그마한 아이가 의젓하게 구는 것이 마냥 귀엽기만 했는데, 아차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낸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게 된 아이는 언젠가부터 ‘엄마’ 대신 ‘어머니’를, ‘아빠’ 대신 ‘아버지’를, ‘루이폴트’ 대신 ‘아우’를 입에 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후국 스체르바뇰의 왕녀로서 일국의 후계자와 함께 자라나고, 지금은 제국 최고 명문가 가문의 수장과 결혼생활을 이어 오고 있는 그녀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이 아이의 성정이 원래 이런 거구나.’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인정하고 나니 납득은 쉬웠다.
남편에게서도, 제게서도, 제 오라비나 시누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저 딱딱한 아이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어미로서 당연히 서운했다. 심지어 나머지 한 아들은 부모님께 ‘왜?’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해야 할 나이에 모든 답을 스스로 찾는 아이이기까지 했다. 다른 아이들이 예법 선생님 무섭다며 흙 파 먹고 놀려고 할 때, 큰아들은 예법 선생의 뮤즈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흙 대신 수백 년 전통의 크레벨 서재의 고서들을 파 먹을 기세였으니.
그런 모든 서운함을 얼버무려 크레벨 공작부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들은 키우는 재미가 없어요.’
아들도 아들 나름일 것인데 말이다.
그 재미를 대신해 준 것은 큰아들이 유달리 좋아했던 다른 집 딸내미였다. 연한 금귤색 머리카락을 나풀대는 그 아이가 초록색 눈을 데굴대며 공부방을 기웃거리면, 그 책임감 넘치는 큰아들이 숙제도 미루고는 두 손 꼭 잡고 정원으로 놀러 가곤 하는 것이었다.
아비들끼리의 약속이야 저는 모르는 일이라며 편들어 줄 수 있으니 그 애들이 자라는 양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건만, 고지식한 아드님께서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버지들끼리의 태중 혼약을 제 천형으로 받아들였다. 연애 감정에까지 고지식한 남자애는 인기 없는데.
‘저 애는 호감이란 것은 부질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지.’
공작부인은 소싯적부터 남들의 연애사를 좋아했다.
그 어느 계절보다 겨울이 긴 스체르바뇰의 궁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누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해서 어떤 일을 벌였다는 종류의 가십들이었다. 그 수위가 전 연령 가일 때도 있고 미성년자 청취 불가일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 다른 나라의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야만 하는 왕녀님에게 그만한 대리만족이 없었다.
그래서 저 재미없는 아들이 연애사로라도 제게 키우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길 바랐건만.
누구를 원망할 것 없이 아들 키우는 재미를 하나 또 잃어버린 공작부인은, 언젠가부터 저와 취미 맞는 귀부인들과만 교류하며 사교계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애들이 좀 융통성 있었더라면 사교계 다니는 재미도 있었을 텐데. 애들이 연분 맺는 것들 모른 체도 하고, 영애들 저울질도 하면서…….’
그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는데, 요 며칠 전부터 그 냉정하던 큰아들에게서 훈풍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시작은, 그랬다.
‘온실에 프리지아가 펴서 좋으시겠어요.’
어느 주말 점심 식사를 함께하던 큰아들이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이 얼마나 기꺼웠던지.
대륙 최북방의 스체르바뇰 출신인 크레벨 공작부인이 고티유로 시집 와 가장 좋아한 것은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온화한 기후였다. 다만 그녀가 가꾸는 정원과 온실은 공작가의 위신이나 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기에 지금껏 큰아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더랬다.
‘내게 용무가 있거나 클로에가 방문하지 않는 이상 제가 온실에 발걸음한 적이 없는 것도 모르겠지, 저 무정한 아이는.’
둘째는 차라리 꽃잎 개수의 규칙적인 수열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나 뭐라나 하면서 자주 머물곤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큰아들이 제 온실에 관심을 갖는 척을 하다니. 며칠 뒤 라크루아에 방문 선물로 꽃을 좀 가져가도 되겠느냐는 말을 듣고서 그 곡절을 눈치챘을 때, 공작부인은 지금껏 느낀 적 없던 아들 키우는 재미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겨우내 애써 키운 프리지아와 아네모네가 아주 아깝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제 아들에게서 처음으로 수줍은 기색을 본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래서 눈치 빠르게 이런 자리를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궁정백부인께서 정말 감사하시다며, 다음에 꼭 보답하고 싶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어요. 클로에도요.’
라크루아의 모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공작부인이 알아 무엇했으랴. 그녀는 그저, 그런 말을 전함으로써 제 아들이 어떤 것을 바라는지만 대번에 알아맞혔을 뿐이었다.
‘어머, 그러면 언제 한번 저택으로 초대해야겠구나. 이번 주말이 어떠실까.’
‘괜찮을 것 같네요.’
호호, 요 녀석. 공작부인은 제 아들을 키운 지 스물세 해 만에 아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봄바람에 찬 기운이 빠져나간 날 좋은 주말 오후, 라크루아의 마차가 고티유 교외의 크레벨 공작저를 찾았다.
“공작저에서 오붓하게 뵙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부인.”
“애들이 친하니 이런 일도 있는 거죠. 앞으로도 종종 놀러 와 주세요. 클로에는 오늘 드레스가 아주 화사하구나?”
“부인께서 온실을 새로 단장하셨다기에 저도 봄 느낌을 좀 내 보았답니다. 온실하고 좀 어울릴 것 같나요?”
온실을 새로 단장했다니, 저 멋없는 큰아들이 또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였구나. 제 아들이 어떤 사고를 거쳐서 말을 내뱉는지를 잘 아는 공작부인이 속으로 웃었다.
“여기, 부족하지만 보내 주신 꽃에 대한 답례랍니다.”
미라벨 대신 오늘의 호위로 따라온 디가 꾸러미를 하나 내밀었다.
“저희 주방에 마카롱을 잘하는 아이가 이번에 들어와서 좀 가져와 봤어요. 그리고 이건……”
무명천으로 싸인 중간 사이즈의 액자가 디에게서 공작가의 하인에게로 건네졌다. 제 마님이 그 내용물을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하인이 천을 살짝 벗겨내었다.
“제이크 콜린스라는 신인인데, 살롱에서 장래가 촉망된다고들 하길래요. 한번 지켜보시는 재미가 어떠실까 싶더라고요.”
그 상징주의의 유화는 클로에가 요 며칠 아티장 지구를 바삐 오가며 찾아낸 것이었다.
‘살롱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제이크 콜린스는 클로에가 아르투젠을 떠나게 될 때쯤에 슬슬 입소문이 타기 시작할 화가였다. 클로에는 회화에 큰 취미는 없었지만, 귀부인들의 살롱에서 어떤 게 입소문을 타는지는 기억했다. 저만 아는 때에 갓 알려지게 될 화가들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 어찌나 발품을 팔았던지.
‘아르투젠 여성들도 투자를 하기는 한다고.’
루시엔의 편견과 달리, 아르투젠의 귀족가 아녀자들 사이에서도 아주 한정적이나마 투자가 이루어지기는 했다. 이런 예술품이나 보석이나 수석壽石 같은 것에 그칠 뿐. 루시엔은 그런 ‘수집’은 투자로 안 치는 것이었지만, 괜한 오기가 생긴 클로에에게는 알 바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팔릴 만한 가격이 될 때쯤에 나는 여기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