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와 그녀의 호감(이었던 것) (1)
“저는 캄포의 루시엔이라고 합니다.”
저를 소개하는 소녀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캄포의 대공녀.’
캄포의 대공녀는 정말로 비밀에 싸인 인물이었다.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떠나갈 2년 뒤까지도 고티유의 사교계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리포네의 왕녀였던 제 어머니를 따라 오리포네의 사교계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고티유에 나타나는 법이 없어서, 그 외양에 대해서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다. 황실에서 자란 메리앤 역시 어렸을 때에 한 번 본 게 다라고 했다.
‘데미야 본 적 있었겠지만…….’
그렇게 처음으로 마주하고야 만 캄포 대공녀의 얼굴을, 클로에는 천천히 뜯어보았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서 한때 제국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었던 그녀의 오라비, 캄포의 대공자 올리비에가 자연히 겹쳐졌다.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칼에 까만 눈동자. 외탁을 했는지, 캄포 대공을 닮아 선한 인상을 지닌 올리비에보다 더 자신감 넘치는 인상이었다.
그 존안을 뵙고야 말았다는 신기한 마음과 별개로, 클로에는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대하는 것에는 생리적인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소녀가 바로 그 데미의 정혼자라는 거지…….’
제가 평생을 마음에 품어 온 첫사랑, 그 또한 자기를 특별히 아끼고 있는 그 첫사랑.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우정을 주장하며 평생 담백하게 유지되어야만 했던 단 하나의 이유.
데메트리안에게 정혼자가 있는 것은 마치 그의 머리칼이 까맣고 눈동자가 파랗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클로에는 단 한 번도 두 가문 간의 태중 혼약이나 루시엔에 대해 어떤 원망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 구체적인 얼굴이 생겨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 긴장감을 공유한 미라벨이 클로에를 흘끗 돌아보았다. 경계 태세를 풀어도 될지, 말지.
기실 제 정혼자의 친우라는 이유만으로 위협받을 일은 없겠으나, 둘의 우정이 순도 100퍼센트짜리는 아닌 것이 클로에를 지레 겁먹게 만들었던 것이다.
“괜찮아.”
클로에가 고개를 까닥여 보이자, 미라벨이 긴장을 풀었다. 그러는 양을 지켜보던 루시엔의 얼굴에 반색이 차올랐다.
클로에는 미라벨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 친우가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
아주 잠깐 사이에 일고 만, 제 이름을 곧이곧대로 읊어도 될까 싶은 망설임.
“저는 라크루아 궁정백의 여식 클로에라 합니다.”
“어머.”
루시엔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그 기색에서 뭔가 불쾌함 같은 게 떠오르는 건 아닐지, 클로에는 루시엔의 낯을 꼼꼼히 살폈다. 루시엔이 아무리 귀족 사회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들리는 게 없지는 않을 테니……
“말로만 듣던……”
역시. 클로에는 낭패감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음,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차 한 잔 대접해도 괜찮을까요?”
루시엔이 안내한 곳은 한들룽 지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던 마차였다. 보통 귀족들이 외출할 때 쓰는 4인용 마차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그 마차는, 아무런 문장이나 표식도 없이 새까맣게 옻칠이 되어 고급스러운 위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지저분하지만 잠깐 들어오세요. 고티유에서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요. 영애께서 고티유의 유명인사시기도 하고요.”
마차 안에는 서류 같은 것이 의자 한구석에 잔뜩 어질러져 있었고, 마부석 쪽의 의자에는 목재나 가죽의 견본으로 보이는 것들이 쌓여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루시엔은 능숙한 손길로 지저분한 것들을 대강 정리하여 엉덩이 붙일 곳을 마련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될 것 같아요. 누구를 초대한 적이 없어서……”
클로에가 마차에 올라앉자 루시엔의 호위가 밖에서 마차 문을 닫았고, 뒤이어 루시엔이 제 좌석 구석에 달린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양옆 차창 밑으로 접혀 있던 상판들이 천천히 올라와 수평으로 맞물리면서 탁자가 되었다.
클로에는 신기함에 탄성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마차에 기능이 많네요.”
“네, 제가 밖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곤란하니 아버지께서 맞춰 주셨어요. 물론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루시엔이 후후 웃었다.
뒤이어 루시엔은 좌석 아래의 라탄 상자에서 다구들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마정석 보온병에 들어 있던 뜨거운 물을 찻주전자에 따르고 차를 우려내는 그 모든 손길이 매우 능숙해서, 매일 이곳에서 일하며 지내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며 루시엔이 어떤 사람일지 가늠해 보았다.
“고티유에서 만나 뵙게 될 줄 몰랐어요.”
“네, 저는 허약해서 대공령에 머무르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요.”
루시엔이 야무진 입매로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허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티유에는 사실 굉장히 자주 온답니다. 아버지께서 등청하실 때는 늘 따라오고, 혼자 와 있을 때도 있어요.”
“입궁도 안 하시고요?”
“하하, 별로요.”
여태 호의로 반짝이던 그 눈동자 어딘가에서, 조소 같은 빛이 떠올랐다.
“가 봤자 황족으로서의 몸가짐 같은 설교나 들을 게 빤한데요.”
“하긴…….”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아서 클로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천년 제국의 황실이 보수적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일 거였으니까.
‘내가 받았던 신부수업을 생각해 봐도 그렇고…… 미아가 괜히 그리 진저리를 치는 것도 아닐 테고 말야.’
그리고 루시엔은…… 그녀를 본 것은 아까 골목에서부터 시작하여 30분도 안 되었지만, 적어도 황실이 원하는 여인상과 루시엔이 다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차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무엇보다 한들룽 지구에서 사업 이야기를 떠벌렸다.
그러고서 옷차림을 살펴보니, 귀족인 것을 굳이 감추려는 것도 아닌 듯 로브도 모자도 모두 고급이었다. 다만 아래로 받쳐 입은 게 드레스가 아니라 바지일 뿐.
클로에는 그녀를 본 순간부터 떠올린 수많은 궁금증 중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저희가 귀족 영애인 게 티가 나던가요? 로브를 좀…… 신경 썼는데.”
클로에의 조심스런 질문에 루시엔이 살포시 웃었다.
“일단 이곳에 젊은 여성들끼리 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돌아다니실 때에 상인들이 말을 너무 많이 붙여서 불편하진 않으시던가요?”
“아, 그러고 보니.”
클로에가 무언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본 루시엔은 야무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입으신 드레스 자락이 평민들 치마보다 조금 더 길기도 하고요, 신으신 신발도…… 착용감이 있긴 하지만, 가죽 자체가 너무 고급이어서요.”
다시금 이어진 루시엔의 미소에는, 나름 노력한 것을 단번에 간파하여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루시엔을 마주치고서부터 제게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게 점점 벅차지는 참이었다.
루시엔을 마주친 것부터가 부담인데, 이동하면서 업무를 볼 수 있게 개조된 마차 하며 그녀가 내뱉는 말들까지…… 사교계 모임에만 다니다가 스칸다르에 가게 된 클로에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세계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소개해 주는 것이 저보다 한참 어린 소녀인 것은, 차라리 라이언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긴장감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얼굴에 어떤 열의가 떠오르는 것을 본 루시엔이 눈을 빛냈다.
“여기는 귀족 여성들이 온대도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나 오시는 곳인걸요. 아무래도 젊은 영애들이 다니면 눈에 띌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도 마르티노, 제 호위의 종자인 척을 하고요.”
“대공녀께선 여기 생리에 굉장히 밝으시네요.”
“음……”
클로에의 의중을 가늠하는 듯 뜸을 들이던 루시엔이, 대답 대신 처음의 질문을 다시금 입에 올렸다.
“영애께서도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
“네에, 뭐……”
갓 시작한 제 작은 사업도 사업은 사업이니까. 클로에가 자신 없이 우물거렸다. 관청 신고도 아직이지만…… 그런 어설픈 답에 루시엔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티유의 영애들 중에도 사업에 관심 있으신 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어떤 사업 하세요? 광산업? 임업? 유통업?”
“음, 일종의 유통업…… 일까요?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요. 규모도 작고요.”
“시작하셨다는 게 중요하죠. 아무래도 아르투젠은…… 좀 그렇잖아요?”
“네?”
루시엔이 작게 웃더니, 조심스레 상체를 클로에 쪽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차 안에는 둘밖에 없는데도, 더 비밀스레 말한다는 듯이.
“여성 귀족들의 사회 진출이 적으니까요.”
“사회 진출이 적다뇨……?”
“오리포네에서는 벌이를 하는 것에 있어서 남녀를 가리지 않아요. 제 또래의 영애들도 크고 작은 투자는 다 하고요. 저는 아버지의 영지 덕에 스케일이 좀 크지만. 그런데 아르투젠 영애들은 다들 정략혼을 노리며 신부수업만 받는다죠?”
마치 남의 나라 얘기하는 듯한 그 말을 들으며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제가 이제 막 관심을 가진 수준이 루시엔의 식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일까,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루시엔이어서일까.
어쩌면 그 ‘정략혼을 노리고 신부수업만 받는’ 게 제 모습이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가서 관료로 진출한 여성들도 많은데요.”
“뭐가 더 낫다고 따지려는 건 아니랍니다.”
클로에의 목소리에서 뾰족한 기색을 읽어냈는지, 루시엔이 난처한 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만 안타까워서 그래요. 그나마도 명문가 영애들은 다들 관료가 될 꿈도 못 꾸고 정략혼으로만……”
처음 보는 사이에 별소릴 다 한다 싶을 만큼 말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던 루시엔의 눈빛이 일순 가느스름해졌다.
“영애께서 그분, 크레벨 소공작과 절친하시다고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