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3)
“우선, 이번에도 몇 가지 부탁하지.”
알레지오의 상담실에서 라구를 만난 클로에는, 그의 실용적인 거두절미를 본받아 예법 차릴 것 없이 용건을 꺼냈다.
미라벨이 손지갑에서 마력에 오염된 앰버 브로치와 자수정 펜던트를 꺼내자, 라구는 언제나처럼 별말 없이 바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이번에는 다 제대로 작업되었어요. 신전 들르실 필요 없게요.”
과연 모두 육안상 깔끔하게 정화되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클로에는 라이언이 벌어 온 은화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냈다. 뭔가 생색내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여상한 표정으로, 지난번에 정산하지 않은 것까지 42실버를 밀어 주면서.
“건당 7실버로 쳤네.”
“5실버로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경의 작업이 이 일의 핵심인데 더 쳐 드려야지.”
라이언에게 떼어 준 금액을 생각하니 라구에게도 섭섭잖게 챙겨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상 들어온 것을 나눠줘야 그나마 유하게 굴던 셰비크 시녀들 덕에 좋은 거 배웠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받아 든 라구가 일순 기쁜 기색을 내비치다가, 길드장에게 고스란히 뜯길 수수료 때문에 곧바로 표정을 지웠다. 2실버 더 벌었는데 남는 건 1실버라니……
“그대에게도 짭짤한 부수입은 되겠지? 길드 수수료가 꽤 높다고 들었는데.”
“네에, 강제 징수니 어쩔 수 없죠. 제가 고티유 길드에 복무하는 기간이 3년쯤 남았는데, 그동안 영애님의 사업이 아주 번창하시길 바라야겠어요.”
“3년이라…… 걱정 말게.”
라구보다 제가 먼저 고티유를 떠날 걸 아는 클로에는 적당히 웃어 보였다. 사업이 잘되면 더 챙겨주겠다면서.
“그럼 다음번부터는 여기 있는 라이언이 나 대신 올 걸세. 대금도 이 아이가 바로 지급할 거고.”
“헤헤, 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문가에 서서 라구가 작업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던 라이언이 납죽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혹시 상의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아주 급한 일이면 모를까, 웬만하면 이 아이를 통해 전하는 것이 좋겠네.”
“고티유 사교계에서는 영애님들이 마법사와 얽히는 게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맙네.”
예법 같은 건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 마법사들이 온갖 지식에 해박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규범을 존중할 생각이 없는 것뿐일까.’
그렇게 앞으로의 일들을 잘 부탁하고서, 이동 마법으로 숙소로 돌아간 라구와 헤어져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상담용 객실이 잔뜩 이어진 긴 복도의 맞은편 끝 방에서도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두 명의 신사였는데, 먼저 나오는 이는 붉은 머리의 중년인이었고, 그 뒤로 나오는 이는……
‘전하!’
뷔욘이었다. 순간 일었던 반가움은 곧 당혹으로 이어졌다.
‘예정에 없는 만남인데, 괜찮을까……?’
우왕좌왕하는 마음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도 잊었다. 서로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뷔욘과 중년인의 모습.
‘고티유에 저리 가까운 이도 있으셨구나. 누구지?’
당혹감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그 시선을 느낀 두 남성이 곧 고개를 들어 이편을 보았다.
클로에는 일단 방긋 웃으며 인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아, 영애. 이렇게 또 뵙는군요.”
클로에가 약식으로 하는 인사에, 뷔욘이 놀란 듯이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네, 이런 곳에서 말이에요.”
클로에는 그에게 뭔가 잘못된 말을 건네지 않길 바라며, 뷔욘에게 대화를 이끌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늘 발랄하게 말을 걸어 주던 영애가 오늘따라 왜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뷔욘은 이내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아, 두 분 초면이신가 보군요? 정작 외국인은 저인데요.”
제가 알아야 할 사람일까? 클로에는 재빨리 뷔욘 옆의 중년인을 훑어보았다. 차림새는 귀족, 뷔욘과 단둘이 나오며 불을 끈 것을 보니 이 알레지오와 관련 있는 사람, 그렇다면……
“처음 뵙겠습니다, 알레지오 후작님. 라크루아의 클로에입니다.”
“아아, 라크루아 영애셨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알레지오의 디에고입니다.”
다시금 약식 인사를 올리는 클로에에게, 알레지오 후작이 가슴에 손을 얹어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레지오 상단을 운영하는 알레지오 후작은 영지도 북부에 있는 데다가 사교계나 정치보다는 제 사업에 열중했기에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알레지오의 영애가 나보다 몇 년 전에 리도테를 졸업했댔나?’
그뿐 아니라 가문 전체가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아, 후작가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사업으로 얽히지 않는 이상 얼굴조차 알 수 없다는 그 알레지오 후작을, 이렇게 마주치게 되다니. 스무 살로 돌아와 새로이 겪게 된 것이 또 있었다.
“영애께서 마도구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뷔욘이 고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떨떠름한 기색이었던 알레지오 후작도 바로 낯을 고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상인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저희 고객이셨군요. 영애들께서 매장으로 직접 방문하시는 일은 흔치 않은데.”
“네, 제가 마정석에 관심이 좀 많아서요.”
훗날에 말이에요. 클로에는 그런 말을 삼키고는, 적당히 이 자리를 흘려 넘길 질문 거리를 생각해 냈다.
“알레지오 후작님과 전하께서 친분이 있으셨군요?”
“저희 나라의 특산품들을 제국에 소개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하하, 전하께서 살펴 주시는 덕에 제 사업이 더 날개를 달았죠.”
서로 덕담을 해 주는 양을 보며 클로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가 고티유에 계실 때에 알레지오 상단과 친분이 있으셨구나.’
고티유 시내에 마정석을 독점 공급하는 알레지오 상단이 스칸다르와 거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클로에가 셰비크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알레지오 상단이 왕궁에 다녀가는 일이 없었기에 뷔욘과 특별한 연이 있으리란 짐작을 못했던 것이었다.
‘하긴, 전하께서 아르투젠에 와 계신 게 십수 년인데 당연한 일인가.’
독립한 이후에 볼모 시절의 연을 살뜰히 챙기는 것도 물색없는 일이겠다는 생각도 들어, 클로에는 일견 납득하고 말았다.
‘두 분의 관계는 어차피 앞으로도 알 일이 없을 테니, 고민해 봤자 뭐하겠어.’
그리 간단하게 생각을 털어낸 클로에는 적당히 말을 보탰다.
“좋은 인연이시네요. 그럼 두 분 계속 이야기 나누셔요. 저는 이만.”
부디 이다음에 만나는 것은 다음 달의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서이길 바라며, 클로에는 살포시 인사를 올린 뒤 나가는 통로로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황급히 떠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제 등 뒤로 뷔욘의 시선이 달라붙은 것은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 * *
라이언과 라구를 영입하며 그 소소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다음으로 클로에가 한 일은 새로운 매입처들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마르코네에서 장신구를 곁다리로 취급하다 보니 새로 들어오는 매물이 떨어진 탓이었다.
해서, 전당포나 골동품점 등 마력에 오염된 보석이 제 가치도 모르고 있을 만한 곳들을 새로이 발굴해야 했던 것이다.
보석상이 아닌 일반인 중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클로에처럼 감식안이 뛰어난 경우는 없었다. 오염되지 않은 상태면 모르겠으나, 오염된 상태에서 언뜻 비치는 반사광이나 광택 같은 걸 기민하게 감지해야 하는 거니까.
보석을 많이 사들이는 귀족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클로에가 찾는 곳들은 보석이 보석인 줄도 모르고 버려진 곳들, 그러니까 귀족들이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어디엘 가 봐야 할까……’
고민하던 클로에에게 마침 조언을 얻을 만한 가장 가까운 이가 떠올랐다.
“어머니, 혹시 한들룽 지구의 골동품상도 좀 아는 데가 있으세요?”
궁정백부인에게 마침 골동품이나 타국의 진기한 물건들을 모으는 유별난 취미가 있었던 것이다. 군소 왕국 연합체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라쥐르 출신인 그녀가 이국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덕분이었다.
실제로 궁정백부인은 클로에가 스칸다르에 간 미래에서, 여름휴가차 셰비크의 별궁을 방문할 때마다 상인들을 불러들여 특산품인 모피며 특급 마정석이 사용된 전통 장신구 같은 것들을 사들이곤 했었다.
“어디 보자, 작은 소품류는 장피에르네가 좋고, 서대륙의 골동품들은……”
최근 들어 외출이 잦은 제 딸을 보며,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꾸미는가 보다고 짐작하고 있던 궁정백부인은 쓸 만한 정보를 추려 주었다. 무슨 작당인지 궁금한 어미의 마음을 숨기고서는.
‘뭔가 보여 줄 만한 게 되면 이야기해 주겠지.’
그렇게 찾아간 한들룽 지구는 아티장 지구와는 달리 정말로 ‘업자’들을 위한 곳이었다. 때문에 첫발을 내딛는 클로에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한껏 담겼다. 이질적으로 보일 게 뻔한 자신들의 외양이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일단 지난번 라이언이 지적한 바를 반영하여 평민들이 입는 로브를 구해서 걸치기는 했다. 오래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여러 번 빨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다녀 보니……
“아가씨들, 이거 귀한 거야.”
“손거울은 안 봐?”
“사막의 피리 관심 없어?”
걸림돌이 있기는 있었는데, 여자애 둘이 다니니 다들 말을 못 붙여서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궁정백부인이 알려준 목록들 덕에 헛걸음할 일은 없었다. 다른 나라의 구제 전통 의상을 파는 가게나, 취미로 공예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잡화점 같은 곳에서 소득이 있었던 것이다.
“아까 루비 반지가 4실버였나?”
“응. 그리고 여기 귀걸이.”
“응, 그거 6실버였고……”
상점 안에서는 그냥 신기한 것 사러 온 소녀들인 척했던 클로에와 미라벨이 인적 드문 골목에 들어가 매입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라비?”
“쉿.”
제가 들어 올린 손에 미라벨이 쥐여 주는 것이 없자 의아한 낯을 들어 올린 클로에의 눈에,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댄 채 모퉁이 너머를 주시하고 있는 미라벨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재빠르게 미라벨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미라벨의 손을 떠났던 단도가 멀지 않은 곳에 푹 박혔다. 어딘가에 부딪혀 방향을 잃은 모양새였다.
‘뭐지?’
미라벨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어서 클로에를 막아섰다. 클로에도 제 손에 쥐고 있던 장부며 장신구며 하는 것들을 가방 안에 쑤셔 박았다.
‘이럴 줄 알고 암기를 챙겨 왔지.’
클로에가 로브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모퉁이 뒤에서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미라벨의 단도를 쳐낸 듯한 검이 그의 손끝에 쥐여 있었다. 로브 밑으로 갑옷을 받쳐 입은 태가, 단순한 뒷골목 잡배는 아닌 것 같았다.
미라벨 또한 남자와 본격적으로 대치하기 위해 제 짧은 검을 꺼내 들었다.
“뭐냐.”
“저……”
응?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영애가 당황한 마음을 긴장감으로 누르려 노력할 때, 남자의 뒤에서 체구 작은 소녀가 슬그머니 등장했다. 가지런히 자른 청남색의 앞머리 밑으로 까만색 눈동자에 호기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영애들도 사업을 하시는 분들인가요?”
“네?”
“고티유에선 처음 봐서요. 무엇을 다루세요?”
소녀를 보자마자 긴장이 슬금 풀려 버린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원하는 대답을 해 줄 뻔했을 때, 미라벨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우리가 거기에 왜 답해야 하죠?”
“아.”
소녀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제 품에 손을 넣었다. 미라벨이 한껏 더 긴장해 자세를 낮췄다.
“그러니까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한참을 뒤적이던 소녀가 무언가를 꺼내 휙 던졌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미라벨이 돌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찰나, 그녀의 발치로 날아든 것은 어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였다.
저 문장은, 그러니까…… 미라벨의 어깨너머로 그 문장을 확인한 클로에의 눈이 경악으로 빛났다.
소녀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는 캄포의 루시엔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