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40화 (40/189)

40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2)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라이언이 맨 처음 판매한 금액이 모두 145실버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놀라 있었던 것이다. 애써 태연한 척한 것뿐.

‘내가 다이아몬드를 50실버에 팔았는데, 아무리 알 크기가 제각각이고 페리도트 팔찌는 보석이 세 개 박혀 있었다지만…… 확실히 글로만 배운 나보단 평민들이 세상 물정에 더 밝구나.’

라이언이 다녀왔다는 한들룽 지구의 경우 지방이나 타국에서 오가는 상단들이 몰려드는 곳이라, 들어 본 바야 있지만 지금껏 클로에의 인생과는 전혀 무관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사업을 한다고 혼자 뿌듯해하고 있으면서도 상인들에겐 상식일 이야기를 낯설어하는 제 모습에, 클로에는 약간의 민망함과 뿌듯함을 함께 느꼈다.

‘대리인을 내세우길 잘했고, 라이언을 구한 것도 참 운이 좋았지.’

무표정을 고수하시고 계신 제 주인님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라이언은, 조심스럽게 제가 왜 그 금액을 벌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평판이 좋은 곳들 위주로 먼저 방문해서 견적을 냈는데요, 그때 저를 뜨내기나 어린애로 보고 무시하는 곳이나, 유행 디자인만 파는 귀금속점은 피했어요. 주신 물건이 다 오래된 것들이어서요. 그러고서 상점에 다시 방문해서 다른 데서 제시한 가격들을 갖고 한 번 더 협상했어요. 예를 들어서 루비 반지는 저희가 처음에 만났던 테오 아저씨네 가게에 팔았는데 아저씨는 처음에 무조건 낮은 가격을 제시하거든요.”

거기서 클로에는 제가 판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왜 다른 보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격에 거래되었는지 알 것 같아서 속이 조금 쓰렸다.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라이언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일부러 세 가지를 각기 다른 곳에서 팔았는데요, 거래처를 다양하게 뚫어 두고 싶었고, 팔 상품이 많은 걸 보여줬으니 더 많이 거래하고 싶다면 조건을 좋게 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어요.”

“그랬구나.”

클로에는 무표정을 고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크 별궁의 주인으로 지냈던 세월이 아주 덧없는 건 아니어서, 세상 물정은 다소 몰라도 라이언이 팔아 온 내역이나 그로 인한 예산의 변동쯤은 머릿속에서 재빨리 계산할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의복에 안목이 있는 만큼 눈썰미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일처리도 꼼꼼하고 감각이 좋다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마침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이언이 그걸 봤다면 안심했을 텐데. 클로에와 미라벨의 딱딱한 기색에 눈을 둘 곳을 몰라 탁자 이곳저곳으로 시선만 방황하던 것이었다.

“부모님 일 도와드려야 해서 바빴을 텐데. 고생했어.”

“대축일 주간이 끝나서 요즘은 일이 좀 한가해요. 저희 집이 사실…… 아, 아카데미 제복을 취급해서…….”

그리 말하는 라이언의 귀가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수선해 달라고 맡겨 온 제복을 입고 그 짓을 벌였던 것이렷다.

옆에서 미라벨이 풉,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클로에는 그 웃음소리도, 라이언의 수치스러운 고백도 못 들은 척하고 제 품에 있던 것을 꺼내 라이언의 앞에 밀어주었다.

“이, 이건 혹시……?”

보석으로 라크루아의 문장을 장식한 배지였다. 신분을 증명할 일이 있을 때나 구두 거래를 할 때에 쓰는 것으로, 클로에에게도 쓸모는 없었지만 몇 개 지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라이언은 그 비싸 보이는 물건이 신기하다는 듯이 뚫어져라 살필 뿐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라크루아의 클로에야.”

“네에?” 라이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라, 라크루아요?”

평민들이 귀족들의 가문명을 일일이 알지는 못한대도 고티유에 터를 잡고 살면서 라크루아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클로에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히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왜 신분을 숨겨야 하는지 알겠지?”

“네, 네에, 라크루아라뇨…….”

라이언이 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대답 비슷한 소리를 흘려내었다. 그러고는 클로에와 일하면 함부로 못된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되겠다고도 다짐했다.

“다음 주부턴 저택으로 와. 그걸 보여 주면 들어올 수 있을 거야. 앞으로 다니면서 경비대랑 곤란한 일이 생길 땐 그걸 써도 좋고. 내 오라비가 경시청에 있으니 마음껏 팔아도 좋아.”

라이언은 클로에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황송한 듯이 눈동자를 한껏 떨었다.

배지를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소중하게 제 조끼 안주머니에 넣는 라이언의 모습에, 클로에는 속으로 슬며시 웃고는 라이언이 냈던 주머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냈다.

“일단 순수익의 20퍼센트야. 앞으로 하는 거 봐서 더 올려 줄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

처음 장신구들을 샀던 금액과 라구에게 지불해야 할 15실버를 빼고 순수익 105실버. 그 20퍼센트인 21실버를 받아 든 라이언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주, 주인님!”

아마 열심히 일한 값이어서 더 뿌듯하리라. 부모님께 받은 용돈도 아니고, 귀족 영애들에게 장난쳐서 만든 돈도 아니니까. 평민과 귀족 간에 돈벌이에 대한 관념이 같지는 않겠지만, 제가 느꼈던 뿌듯함과 비슷한 걸 라이언도 느끼고 있으리라고 클로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기분 좋겠지.’

클로에는 씨익 웃으며 지난번처럼 마정석 호출 벨을 울렸다.

“일단 주문한 거 다 먹고 움직이자. 라구 경하고 약속 잡아 놨어.”

퇴궁하는 마차 안에서 데메트리안은 클로에를 제 집무실로 초대하려던 차에 ‘선약’ 운운으로 거절당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굴까…….’

서로가 서로의 교우 관계를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 다과회면 다과회, 연회면 연회, 누구 영애면 누구 영애라고 말할 것 같은데, ‘선약’이라는 그 애매모호한 단어 선택이라니.

‘혹시……’

데메트리안의 생각의 끝엔 늘, 한 남자의 상이 떠오르곤 했다. 얼마 전 프레더릭의 응접실 앞에서 마주쳤던, 마주치게 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게 되는 그 남자.

‘아냐, 지금은 그런 사이가 아닐 거니까…….’

그런 우울한 생각과,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당혹감을 안고서 데메트리안은 그저 차창에 머리통만 기댈 뿐이었다.

그때였다. 하릴없이 밖으로 던진 시선에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걸린 것은.

‘누구지?’

에티엔이 지금 시간에 퇴청하진 못했을 거였으니 클로에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궁정백부인이나 아쉴일 수도 있지만…… 고민은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잠깐 섰다가 가지.”

또 돌발행동을 하는 제 공자님에게 슬며시 불충한 시선을 던진 파이겐은, 쪽창을 열어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제도의 모든 대로가 모여드는 프란츠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분수 주변으로 주인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마부에게 라크루아의 마차가 잘 보이는 방향에 마차를 대게끔 지시한 데메트리안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서 그 길가에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제 공자님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파이겐이 라크루아의 마차를 알아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건 말건.

‘지난번에 뭔가 분위기가 나쁜 것 같더라니, 계속 나사 몇 개 빠진 것처럼 구시는구먼.’

그러고서 15분쯤 지났을 때일까, 데메트리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그 근방의 카페에서 클로에와 미라벨이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사교계의 영애들 사이에서 밀회의 장소로 종종 이용된다는 곳이었다.

‘저런 곳엔 왜……’

제가 아는 한 클로에는 카페에 드나든 적도, 커피를 즐긴 적도 없는데. 데메트리안이 이맛살을 살포시 찌푸리던 그때, 마침 그녀들 옆에 붙어 나오는 웬 사내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행색이 아무리 봐도 라크루아의 사용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데메트리안은 이미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저 카페의 풋맨들이 저런 허접한 옷차림을 콘셉트로 삼는 건지도……’

그리 긍정적으로 짜맞추며 그들을 지켜보며 다가가는데, 클로에와 미라벨이 그 사내와 말을 섞는 모양새가 일행일 수밖에 없으리만치 친근하지 않은가. 게다가 마차 앞에 선 클로에는 팁을 주지도 않은 데다가, 심지어는 마부가 아닌 그 사내의 손을 잡고서……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뛰고 있었다.

클로에가 라이언의 어설픈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막 올라타려던 때였다. 갑작스레 누가 달려오는 낌새에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선약이 그자를 만나는 거였어?”

가쁜 숨과 함께 데메트리안의 질문이 날카롭게 울렸다. 제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던 게 민망하단 것도, 클로에를 만나면 사과를 하리라고 다짐했던 것도 모두 잊고서.

“데미?”

갑자기 튀어나온 데메트리안을 보고서 클로에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어디서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것도 아닐 거면서…… 정말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임을 꿈에도 몰랐던 클로에는 제 망상에 자조하며 쏘아붙였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로이.”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데미가 저런 얼굴도 지을 줄 알았나?’

화가 났다는 표정인데, 클로에는 살면서 데메트리안이 제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화를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크레벨 소공작은 그 어떤 것에도 초연할 수 있었으니까. 알아서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고, 그런 일이 생겨도 자연히 수습되기 마련.

그런 데메트리안의 흉흉한 시선이 바로 옆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키에 비해 어깨가 좁은 것이 얼핏 어린 소년인 듯도 한데, 얼굴로 보아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평민이었고…… 그와 클로에의 관계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클로에에 대해 제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아, 저, 저는……”

데메트리안의 이글이글한 시선에 라이언이 저도 모르게 신상명세를 줄줄 읊을 뻔했을 때였다.

“됐어. 가자.”

“아, 아니, 주인님…….”

라이언의 손에 의지해 마차에 올라탄 클로에는, 어서 오라는 듯이 그대로 라이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라이언이 마차에 탔고, 미라벨도 어색하게 묵례하고는 쏠랑 들어가 버렸다.

“어서 출발해.”

얼떨결에 주인님의 손을 쥐고 마차에 올라탄 라이언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제 주인님과 창밖에서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 나리의 모습을 한참 번갈아 보다가 생각했다.

‘아, 이거 그거구나. 사랑싸움.’

알레지오로 향하는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 안에는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데미 공자가 웬일이냐며 호들갑을 떨었을 미라벨은 라이언 앞이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고, 주인님의 사생활을 엿본 것만 같은 느낌에 마음의 거리를 대폭 좁힌 라이언도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 데서 나타나서는…… 게다가 내가 누굴 만나건 말건.’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입술 안쪽의 살을 꾸욱 씹었다.

‘아까 예가체프에서 라이언이 일을 잘해 온 걸 봤을 때까진 기뻤었는데.’

그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을 마주치면, 그것도 낯설게 구는 그를 마주하면, 클로에는 자꾸만 제 마음에 망상의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다정한 것은, 정말로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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