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2)
“너 영애 소개받을 생각 없냐.”
“심지어 취하신 거예요?”
마지막 주도 아닌 때에 웬일로 사교클럽에 찾아오는가 했더니 하는 말도 엉뚱했다. 해가 뜨는 방향이 두 번 바뀌면 원래대로 동쪽에서 뜨려나.
어느 사교계 연회에서건 술 약한 저 대신 늦게까지 남아 제 누이를 챙겨 주던 구원자가 바로 그였는데, 술이 세서 버텼던 건 줄 알았더니 애써 절제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대단한 애정이시네. 아니, 오늘 유독 많이 마신 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데메트리안을 한참 살피던 에티엔은 제 손에 들린 에일 맥주를 한 모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를 볼 때마다 제 여동생과 연관 짓게 되는 심사에 지레 꽁해져서는.
“정혼자에게 저를 붙여서 혼약에서 벗어나시려는 셈은 아니시죠?”
“무슨 소리야?”
아닌 밤중에 날벼락처럼 다가온 에티엔의 말에, 취기에 스며들던 데메트리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녀석도 나를 보면 정혼부터 떠올렸던 거야?’
데메트리안이 늘 오던 달의 마지막 주가 아님에도 사교클럽을 찾은 것은 동료 퓌잘리 누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만 그 약속이 클로에와 마주치기 위한 비행 때문이라 민망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 타인에게 부탁이랄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제 장점도 못 살리고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을 뿐이었다.
그의 장점은 소공작이라는 신분이었고, 그 이능으로는 권하는 술잔 거절하기와 취하더라도 안 취한 대우 받기 등등이 있었는데 말이다.
소공작이 주선하는 선 자리라면야 처자식이 줄줄이 딸린 사내라도 자원할 만한 것이건만, 요령도 부려 본 사람이 부리는 법이었다.
그 이능이 잘 먹혀들지 않는 에티엔이 저를 취한 사람 취급하며 빈정대는 것에 데메트리안은 목덜미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 너는.”
“그럼 왜 제게 그런 걸 물으시나요.”
영식을 소개받고 싶다는 이가 있어서, 라고 거의 다 말할 뻔했던 데메트리안은 목구멍이 막혀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에티엔의 기색에서 왠지 모르게 며칠 전의 ‘데이트’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고 보면 에티엔은 제 누이와 인상도 성격도 달랐지만, 그 녹색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날 때만은 너무나도 닮아 보이곤 했던 것이다.
……그래, 그런 때의 눈빛에는 무엇도 어물쩍 넘길 수 없음을 데메트리안은 너무도 잘 알았다. 술기운을 뱉으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고는, 순순히 자백했다.
“내 동료 중에 건실한 영식을 소개받고자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지.”
“제가 그 건실한 영식인가요?”
“뭐, 너 정도면 차고도 넘치지……?”
데메트리안은 칵테일 잔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에티엔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의 옆모습에서 클로에의 어떤 순간이 비친 것 같았다. 그것은 씁쓸함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제가 제 짝을 정할 수나 있나요. 공녀들은 모두 진즉에 짝을 찾았는데요.”
아니면 너무 어리거나요. 한숨 같은 목소리.
에티엔은 라쥐르의 공녀와 연애결혼을 한 제 아버지에 대한 모종의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철모르던 때엔 그냥 연회 때마다 파트너를 새로이 정할 필요가 없는 게 부러웠고, 이제 와서는 아버지의 눈에 차지도 않고 제 마음에도 어긋나는 혼약을 맺게 될까 봐 두려웠다.
고티유 그 자체인 라크루아의 후계자는 대대로 제국 내의 귀족과 혼약해 왔고, 개중에 공작가의 여식과 혼인하는 경우가 이상적이었다. 후작가나 그 미만의 가문과 혼약을 맺자면 정치 지형에 따라 황제의 승인을 보장할 수가 없었으니까. 제도와 황실의 별장지를 관리하는 라크루아의 안주인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출신 성분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장단에 당사자의 마음까지 맞추는 것은, 결단코 어려운 일이었다.
라크루아 궁정백 부부의 혼인은 그 ‘이상적’인 경우였다. 궁정백부인이 선대 라쥐르 공작의 셋째 딸이었으니. 소녀 아녜스 라쥐르는 리도테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데뷔탕트를 치르기 위해 상경했다가, 고티유의 사교계에서 만난 청년 위고 라크루아와 사랑에 빠졌다. 양가 어느 쪽도 빠지지 않는 혼인이었고, 갓 즉위한 현 황제 에드워드 3세도 기꺼이 승인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세대에는 크레벨 공작가에 아들만 둘인 것처럼 공작가들에 여식의 수가 너무 적었고, 그 적은 공녀들은 진즉에 어디의 세자비나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중앙에서 활동하는 가문들을 살펴야 하는데…… 귀족들이 1황자파와 2황자파로 갈려 알력 다툼이 심한 요즘, 에티엔은 제 마음에 든 여인이 아버지나 황제의 마음에도 들리란 것을 보장할 수 없었다.
“가끔은 정혼자가 있으신 경이 부럽기도 해요. 분명 기꺼운 의무는 아니시겠지만.”
에티엔이 쓰게 웃으며 에일을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는 양을 지켜보며 데메트리안도 덩달아 제 손에 쥔 칵테일 잔을 입에 묻었다.
‘……이 녀석도 그런 고민이 있을 줄은.’
음울하게 가라앉는 에티엔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자꾸만 떠오르는 클로에를 지울 수가 없었다. 에티엔의 말들은 어쩌면, 제가 오래간 의식적으로 살피려고 하지 않았던 클로에의 고민일 거였다.
저조차 제 마음을 모르고서 간편하게 우정이라 포장하고 있을 때, 그들의 우정 놀음이 현실로 끌어내려지기 전까지 그녀가 떠안고 있었을 고민. 제 마음도 살피지 않았던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라고 짐작해 보려 한 적이 있었을까.
‘제 마음을 살필 용기도 없는 놈이 어떻게 공작가를 책임지겠다는 거냐?’
언젠가 저를 비난하던 대니얼의 말들이 새삼 가슴에 꽂혔다.
그래, 어쩌면 책임은 이성만으로 지는 것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책임을 ‘느낀다’라고 하지 않으리라.
그 씁쓸함은 충동적인 말을 한마디 빚어냈다. 실은 여기에 들어서는 에티엔을 봤을 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말. 취한 것으로 보인 김에 내뱉을 수 있는 말.
“내가 얼마 전에 로이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너 들어가는 길에 같이 가서 사과하면…… 더 싫어하겠지?”
그 말에 데메트리안을 빤히 쳐다보면서, 에티엔은 며칠 전 어수선했던 저택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준휴일인 물의 날이었음에도 일이 많아 오후까지 근무하고 귀택했던 그날 저녁. 사용인들 사이에 뭔가 들뜬 듯한 기색이 있어 알아봤더니 데메트리안이 꽃다발을 갖고 클로에를 만나러 와서는 외식하자고 데리고 나갔다나 뭐라나.
에티엔은 속에서 뭔가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잔에 남아 있던 에일을 대번에 다 마시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안 태워드릴 거예요.”
급히 마신 에일에 취기가 오른 에티엔은 담배를 태우러 테라스로 나갔다.
이제는 남들 못지않게 건강해진 청년 에티엔은, 건강에 해롭다 싶은 것들은 죄 금지되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들 하는 건 다 조금씩 하고 살았다. 술은 몸에 안 받았지만 담배는 다행히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담배를 태울 때면 클로에가 놀러 나간 빈집에서 혼자 글공부하던 어린 시절의 저를 보듬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저라고 해서 마음에 담은 여인 하나 없겠는가. 한숨에 섞여 담배 연기가 하늘로 날았다.
본인들이 연애결혼을 하셔서인지 후계자의 혼사에 다소 방임적으로 구는 부모님이라도,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닐 거였다. 부모님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그로서는 부모님이 제가 언젠가 소개할 반려에 대해 ‘그만하면 됐다’가 아니라 흡족히 여기시길 바랐다.
연모하는 여인에게 무작정 구애하여 마음을 얻은 다음에 부모님의 흔쾌한 인정을 바랄 배짱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께 먼저 허락을 구하고 구애를 시작하는 것 또한 바보 같은 일임을 잘 알았다.
‘그러니 나만 마음을 잘 다잡으면…….’
담뱃불 끄듯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담배를 비벼 끄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열어 둔 테라스의 창 안쪽에서 독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바로 안쪽의 방문이 열리면서였다.
고티유의 업장들은 기본적으로 실내 금연이었지만 그것이 귀족 나리들의 사교클럽에까지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웃돈을 주고 방을 잡은 경우라면야.
‘요즘 서대륙에서 온 여송연이 인기라더니.’
제가 태우는 담배보다 훨씬 매운 연기에 에티엔은 그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고티유에 갓 소개되어 구하기 어렵다는 이 여송연은 상인들이 귀족 나리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눌 때에 뇌물 겸 선보인다거나, 몇몇 친한 무리들끼리 어렵게 구한 거라며 사교클럽 방에 둘러앉아 돌아가며 태워 보곤 한다는 것이었다.
연기가 좀 가시면 지나가려고 방문이 닫히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 방에서 나온 것이 데메트리안의 등장 다음으로 깜짝 놀랄 일의 주인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루카미……’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초저녁에 사교클럽으로 들어서려 했을 때, 바로 문 앞에 사제 로브를 입은 자가 있어서 제 누이와 친한 루카미오노인 줄 알았더랬다. 사교클럽에 드나드는 사제라면 대번에 떠오르는 게 그였으니까. 그래서 악수하려고 손을 건넸는데 다른 이여서 민망하게도 손을 물리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에르드의 교리가 사제들에게 딱히 금욕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지만, 주말을 앞둔 철의 날에는 확실히 특이한 일이었다. 그들에겐 주말이 근무일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통성명을 못했네. 다음에 신전서 만나면 사과해야겠는데.’
보조개가 한쪽에만 있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 다음에 보면 알아볼 수 있겠지. 술도 함께했는지 살짝 모로 걷는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중에 여송연이 시중에 좀 더 풀리면 저도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에티엔은 생각했다.
* * *
“모두 145실버예요. 루비 귀걸이는 35실버, 에메랄드 반지는 40실버, 페리도트 팔찌는 70실버에 팔았어요.”
약속한 날에 예가체프의 4층으로 온 라이언은 제가 벌어 온 은화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 여기 영수증도 있고요……”
맞은편의 영애님 두 분께서 표정을 굳히고 있는 모습에 라이언은 슬며시 눈치를 보았다.
라이언은 제가 처리한 일에 대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미동도 없는 주인님의 표정을 보니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였다.
“아티장 지구에서는 그때 제가 주인님을 마주친 곳 말고도 세 군데 정도 더 가봤고요, 부모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시내랑 한들룽 지구에 있는 곳들도 수소문해서 다녀와 봤고요…….”
제가 말을 이어나가도 아무 기색도 떠오르지 않는 주인님의 낯에, 라이언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