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1)
기실 고아원의 거친 분위기에서 자라 온 루카의 눈에 바르고 고운 데메트리안 어린이는 뭔가 고리타분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너 같은 ×신도 꼴에 ×× 달렸다고 계집애랑 노냐?”
“뭐라고? 이 똘추야?”
그런 루카를 혼쭐낸 것은 다름 아닌 다섯 살 클로에였다.
여느 때처럼 어머니를 따라 공작저에 놀러 온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의 손을 잡고 온실 구경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날 궁정백부인이 참석한 다과회가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성력의 보유자’로서 루카를 소개하는 자리였던 만큼, 루카도 정원에 나와 있었던 탓에 그 사달이 난 것이었다.
때와 장소는 아주 조금 가릴 줄 알았던 어린 루카는 귀부인들 면전에서 예의 바른 척 굴다가 좀이 쑤실 때쯤 풀려났고, 곧바로 마주친 것이 손을 꼭 잡고 온실에서 나오던 데메트리안과 클로에였다. 그즈음의 언제나처럼 시비를 걸어오는 루카를 보고서 데메트리안은 대충 웃는 낯으로 무시하려 했지만, 클로에는 그럴 수 없었고……
예로부터 애들이 가장 빨리 배우는 것이 욕이어서, 경호조나 사병 아저씨들과 친하게 지내던 미라벨에게서 주워들은 나쁜 말이 제 미래의 낭군님께로 향하는 것에 클로에는 분노에 차올랐던 것이니.
“다시 말해 봐, 이 븅딱아!”
“뭐, 이 ××아. ×만한 게 까불고 지×이야. 대시 맬해배, 이 뱅땍애~”
“우씨……!”
또래에 비해 왜소한 편인 저보다도 한참 자그마한 귀족 여자애가 짱알대는 게 같잖았던 루카가 얄밉게 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는 양에 클로에의 기분이 더 상하는 걸 느낀 데메트리안이 무시하고 다른 데로 가자는 듯이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너 죽었어!”
주먹을 앞으로 내질러 버렸다. 비록 다섯 살배기의 것이긴 하지만 얼결에 명치에 바로 박힌 주먹은 효과가 컸고, 루카는 아직 고아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허약한 아이였으니 결과는……
“우욱, ×…….”
주먹을 쓴 클로에도 놀라고, 이 난관을 어떻게 공작가의 후계자답게 돌파할지 고민하던 데메트리안도 놀라고, 쪼끄마한 귀족 계집애의 주먹에 고꾸라지는 루카도 놀랐다.
루카가 딸꾹질하며 엎어지자 의기양양해진 클로에는 제 조막만 한 손이며 부드러운 양가죽 밑창을 댄 신발 따위로 그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너 한 번만 더 데미한테 못된 말 했다간 죽어?”
“××, 넌 또 뭐야…….”
“난 나중에 데미랑 결혼할 사람이야!”
이는 아직 캄포 대공녀 루시엔이 태어나기 전의 추억.
루카는 알았을까. 그날 클로에의 주먹이 제 명치에 꽂히지 않았더라면, 제가 클로에를 ‘×만한 거’라고 칭한 순간 데메트리안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를 신전 고아원으로 보낼 결심을 세웠었음을. 크레벨이 차기 고티유 대신관을 홀대했다는 오명을 얻을지라도 말이다.
그날을 계기로 데메트리안과 루카는 서로 말을 트게 되었고, 클로에와도 아옹다옹하면서도 이내 정이 들고 말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오기로 제 말본새를 고치지 않았던 루카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식을 떨게 되었고, 그러고서 어엿이 비속어 없이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난 것인데, 아무래도 죽마고우들 앞에서만은 제 본연의 말버릇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사교계에서 하는 짓을 보면 좀 소름이 돋지…….’
오랜만에 듣는 루카의 욕지거리에 잠시 옛 추억을 빠르게 회상한 클로에가 성소 밖에서 그가 하던 양을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이젠 차기 대신관이신 루카미오노라 이건가.
“너 혹시 보석이 마력에 오염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글쎄, 모르겠는데.”
클로에는 미라벨에게서 손가방을 건네받아 라피스라줄리 팔찌를 꺼냈다.
“얼마 전에 얻게 된 건데, 여기 뿌옇게 보이는 게 마력에 오염돼서 그런 거래. 아는 마법사가 정화해 주다가 마법으로는 이게 한계라고 신전에 가 보래서.”
그렇게 말하면서 클로에는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는 마법사’라니. 마법사 길드에 자주 무언가를 의뢰하는 사업가들이나 용병을 쓸 일이 있는 한 가문의 수장들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 너 방금 ‘아는 마법사’라고 할 때 조금 재수 없었어.”
하지만 이 응접실 안의 친구들은 모두 그것을 느낄 만큼 친밀한 사이인 게 문제였을 뿐.
“아, 암튼, 보기나 해 봐.”
팔찌를 받아 든 루카가 곰곰 생각하는 눈초리로 팔찌를 조금 들여다보는 척하더니,
“오, ××. 신기하네. 여기.”
감탄사 대신 욕설을 내뱉으며 곧바로 다시 팔찌를 건넸다.
“어떤 것 같아? 알겠어? 신성력으로 정화할 수 있다던데. 할 수 있겠어?”
“벌써 했는데?”
태연히 말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는 기색에, 클로에와 미라벨은 그냥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쟤가 뭐 했어? 아니? 그러고서 팔찌를 봤더니, 정말 뿌옇게 되어 있던 것이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신성력으로 대신관 자리 따낼 정도면 손만 대도 신성력이 운용되는 건가…….’
제 맞은편의 친구들이 얼떨떨해하거나 말거나, 루카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서 클로에의 손에 들린 팔찌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력에 노출되면 그렇게 된다고? 마법사가 한 말이니 맞겠지만 신기하네. 성국에 마나님들이 주렁주렁 뭘 달고 와도 무슨 소리 한번 들은 적 없는데.”
“성국엔 왜?”
“왜, 성지순례니 신년 축복이니 해서 돈 좀 있다 하는 인간들 성국에 몰려오는 철 있잖아. 그때 다들 포털 타고 오거든.”
주신인 에르드가 대지의 신으로서 풍요를 관장했기에, 사업가나 대지주들은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축복을 받으러 성국에 가곤 했다. 라크루아는 신실함과 거리가 멀었고 가주인 궁정백이 고티유를 비우기 힘드니 남의 일이었지만.
“아아, 신전에 승인받은 포털들에는 그런 현상이 없대. 신성력 가호가 있으면 마력 간섭이 방지돼서.”
클로에는 제 ‘아는 마법사’로부터 들은 지식을 뽐내며 조금 의기양양한 마음이 들었다. 마법이고 마력 간섭이고 신성력이고, 스무 살로 돌아오기 전의 클로에와는 아무런 연이 없었던 이야기인데 말이다.
“재밌는 거 알았네. 쓸모는 없지만.”
루카는 저들이 알고 지낸 근 20년간 괘씸하리만치 솔직한 말투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이게 뭔데 그렇게 급해서 전령까지 보내서 약속을 잡았어?”
“아냐, 대축일 때 너 생각났었는데 데미가 너 돌아왔는지 모른다길래 궁금해서 물어보고 온 거지.”
“그래?”
루카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에 그런가 보다 싶은 눈치였다.
사제 루카미오노는 대신전의 엄숙함 아래서 내숭 떠는 일이 지겹기만 해서 제 오랜 친구들이 자주 들러주길 바랐으니 어쨌든 반가울 따름일 거였다. 욕지거리도 제멋대로 갈길 수 있고.
‘미안, 루카. 다음번엔 정말 너 보러 올게.’
하지만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 소꿉친구들이 서로를 용건 없이 보고 싶어 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였다. 제 사업에 관한 일 또한, 아직은 알리기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어 말할 수 없었고……
‘아무래도 미혼의 귀족 영애가 돈놀이를 하는 건 자랑은 못 되니까.’
여러모로 루카에게 미안해지려 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클로에는 애써 발랄하게 다른 용건을 꺼냈다.
“아, 맞다. 나 또 궁금한 거 하나 있어.”
말하라는 듯이 루카가 고개를 까딱였다.
“대축일 예식 때 성배 갖고 나온 신관이 누구셔? 따로 뵐 수 있어?”
“아, 안톤미오노? 그건 왜?”
“사람더러 그거라니……. 아니, 그 내가 아는 마법사랑 너무 닮으셔서. 그 마법사가 출생의 비밀이 있다지 뭐야?”
그때 그 신관과 라구는 눈썹이 연하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었지만, 클로에는 일단 그렇게 우겨 보았다. 미라벨이 그랬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클로에는 애써 모른 체했다.
“가까이서 뵐 일이 없을까?”
“흠, 나도 개인적으론 교류할 일이 없어서 장담은 못하겠는데……”
입꼬리를 양옆으로 늘이던 루카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보물고 담당이니까 견학 신청을 하면 되지 않을까?”
* * *
에티엔 라크루아는 오늘 올해 겪을 진귀한 경험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티유를 총괄하는 궁정백 가문의 후계자로서 사교계 동향을 살피기 위해 매주 마지막 날인 철의 날마다 프란츠 광장 뒤편에 위치한 사교클럽에 가곤 했는데, 아무리 철의 날이라도 한 달의 마지막 주가 아니어서 평온했을 이 날에 깜짝 놀랄 일들을 여럿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래…… 크레벨 소공작의 방문이었다.
제 누이와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사이로 평생을 지내 온 데메트리안 크레벨은, 사교계의 유명인사이되 사교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어렸을 땐 그게 공작가 후계자로서의 일종의 무게 잡기라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들어 보면 그는 애초에 사교 행위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인물인 것이었다.
‘넌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것도 몰라? 데미가 그런 델 가겠냐?’
……제 누이동생은 당연히 그리 생각하던 바였는데.
어려서 병약했던 그는 클로에가 공작저로 놀러 다닐 때 집에서만 머물렀기에, 열 살도 넘어 교류하기 시작한 데메트리안이 아무래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르투젠의 모든 귀족은 원로원에서 만나게 돼 있는데 내가 왜?’
아마 같은 명문가의 후계자인 제 앞에서라 아무렇지 않게 보였을 속내. 언젠가 듣게 된 그 말에서는 일말의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저는 단 걸 싫어하니 초코케이크는 사양하겠다는 것과도 같은 말투.
그런 데메트리안이, 귀족들이 인맥을 쌓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 따위론 타고난 혈통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듯이 굴던 그 크레벨 소공작께서, 늘 오던 날도 아닌 때에 사교클럽에서 발견되었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대축일 주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20시도 넘어서 비척비척 사교클럽에 들어선 그의 눈에, 당구대 근처에 몰려 있는 무리의 중심에 그 낯짝 비싼 소공작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주도 아닌데 무슨 일이세요?”
“응, 일이 있어서. 오랜만이다.”
어울리던 무리의 열기가 수그러들었을 무렵, 데메트리안은 마치 원래부터 목적했던 듯 바 쪽에 앉아 있는 에티엔에게로 다가왔다. 마침 에티엔에게 알은체를 하던 행정청의 관료들이 떠나가고서였다.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하나 주문한 그는 피곤한 듯이 에티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단추를 몇 개 푼 셔츠 바람의 그에게서 왠지 소년 같은 느낌이 난다고 에티엔은 생각했다. 제 누이와 친근히 웃고 떠들 때와 같은……
“아, 마시고 떠들자니 지친다. 이런 게 뭐 재밌다고…….”
에티엔이 제 옆에 있던 얼음 바구니를 밀어 주자 데메트리안이 거기에 관자놀이를 갖다 대며 웅얼거렸다. 에티엔은 그 허물없는 양에 피식 웃었다.
잠시 뒤 바텐더가 건네주는 칵테일과 함께 나온 물을 한번 들이켜고서,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데메트리안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