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0)
“그나저나, 영애와는 도서관에서 인연이 있나 봅니다.”
“네?”
하지만, 뷔욘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기억과 다른 흐름에 당황한 목소리가 한참 높은 톤으로 튀어나왔다.
“지난번에도 도서관에 다녀오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아, 네, 그랬죠. 황자궁 서고에…….”
갑작스런 질문에 클로에는 말을 늘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즈음 뷔욘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클로에는 늘 별 생각 없이 그를 대하곤 했는데, 그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바빠지니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이 사라졌다.
‘괜한 말을 했다가 심기를 불편하시게 하면 어쩌지?’
“고티유의 영애들이 풍류에 일가견 있는 건 알았지만…… 영애는 사뭇 다르시군요.”
“과찬이세요.”
뷔욘이 다시금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장난스레 치맛단을 양손으로 잡고 인사를 해 보이면서도, 클로에의 머릿속은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아 클로에가 입 안쪽 살을 살짝 깨물 때였다.
“그런데 일전에 제 고국의 후원…… 알뫼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셨었지요.”
“예? 네, 아…… 그랬죠.”
마담 에투알의 살롱은 왜 안 물어보냐구, 뭘 기억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와 예기치 못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마음이 외줄을 타듯 조마조마했다.
“그에 대해서도 그럼 책에서 읽으셨겠습니다.”
“네에, 그럼요.”
클로에는 스칸다르 건축 양식에 대한 책을 읽은 바가 없어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라이언에게 강조했듯이, 뻔뻔하게.
“대륙의 정원들을 꼽는 책들에서 종종 언급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런 양을 바라보는 뷔욘의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너머에서 헤이즐넛 빛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살피듯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이 바라는 게 없는 눈빛.’
그는 제국의 많은 것을 혐오했다. 저를 연모하는 영애들의 눈빛은 그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저를 무슨 로망스 세계로 데려가 줄 엘프처럼 보는 선망의 눈빛, 또는 자신을 유혹할 타락 사도처럼 바라보는 정염이 일렁이는 눈빛.
그런 그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할 때 불쾌하지 않은 극소수의 여성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였다.
제게 담백한 낯으로 이야기하는 만큼, 그래서 저와 마주치려 노력하지 않는 만큼, 부딪힐 일이 잦지 않은 어린 여성. 때문인지 기계적으로 사교 모임에 참석했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되면 저도 모르게 반가움이 일곤 했던 그 영애.
‘그래서 그때 이 얼굴이 떠올랐던 걸까…….’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뷔욘이 뜸을 들이는 것에, 클로에의 낯에 물음표가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혹시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가시나요?”
아, 드디어!
초조하고 답답하던 클로에의 마음이 마치 소화제를 먹은 양 시원해졌다.
“기억했던 대로였어?”
뷔욘이 떠나는 양을 지켜보던 미라벨이 재빨리 물었다.
뷔욘과 통성명이나 제대로 했을까 싶은 사이인 미라벨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의 기색을 꼼꼼히 살필 수 있었다.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왕자님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게 로이가 리도테에 들어가고서였으니까 벌써 4년 전인데…… 아직은 아닌 건가?’
그러면서 미라벨이 느낀 것은,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미라벨은 사교모임을 즐기지 않았다. 클로에의 시녀 겸 호위이니 대부분 따라가기야 했지만, 이따금 클로에의 배려로 경호조의 선배들에게 미루기도 했다.
그래서 예쁜 왕자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때문에 그를 유심히 살핀 적도 없었지만, 오히려 한 발 떨어져 있을 때라야 보이는 것들을 볼 수는 있었다.
그 예쁜 왕자님은 늘 가면 같은 미소를 띄우고 다닌다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가끔 피로한 듯한 눈빛을 띤다는 것, 그리고……
‘로이를 대할 땐 좀 사람같이 웃긴 하지.’
클로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느낄 아가씨니까.
콩깍지 살짝 낀 마음으로 미라벨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의 눈빛이나 표정에서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느껴지느냐면…… 글쎄, 그 ‘뺀질한 애송이’가 클로에를 어찌 바라보는지 아는 미라벨은 선뜻 긍정할 수 없었다.
‘그 공자님은 어쩌다 마음을 바꿔 먹었는지, 이젠 뭘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미라벨의 생각이 그리 이어질 때쯤, 뷔욘의 뒷모습을 살피던 클로에가 긴장이 풀린 얼굴로 대꾸했다.
“응, 거의.”
예전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대했어야 했는데, 잘 되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아마 잘 했겠지…….
아르투젠을 떠날 때까지 데메트리안 외의 영식들에게 딱히 어떤 감정을 느낀 적도 없었거니와 그에게조차 마음을 숨기는 것쯤은 숨 쉬듯 해 온 것이었으니, 유별난 짓을 하진 않았으리라.
‘머리도 묶으시고 제국식으로 입으셔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도움이 됐어.’
갑작스레 제 마음속에 피어난 친분을 표현하면 역효과일 게 뻔해, 어찌나 자기 최면을 걸었던지.
그가 저를 대하는 양이 사뭇 다른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말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긋나긋했지만 한껏 더 정중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제가 기억하는 그의 다정한 말투나 열기가 비치는 눈빛 같은 것이 일말이라도 보였다면,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셰비크 별궁의 태피스트리나 왕성 뒤편 숲속 오두막 같은 것에 대해 읊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손등에 키스해주셨을 때엔…….’
그래, 이전의 오늘에도 깜짝 놀랐더랬다. 그 누구에게도 거리를 두고 대하는 듯하던 그가, 다짜고짜 다음을 기약하며 제 손등에 처음으로 입술을 묻은 날.
‘영애의 손등에 이 감사함을 표할 수 있을까요.’
‘네? 네, 얼마든지요.’
클로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놀랐고, 한결같이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럼 부디 그날 뵙지요.’
어쨌든 오늘치 그와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대화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한 것일지,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에티엔의 책을 반납한 클로에는 그의 학생증으로 황자궁 도서관에서 빌린 것과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몇 권 더 빌렸다. 학생증 도용은 안 될 일이었지만 라크루아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를 함께 보이니 무사 통과였다.
지난번 메리앤의 도움을 받아 읽은 이야기가 모두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던 탓에, 이번에는 종교학 서가에서 외전에 기록된 비사들 위주로 살펴 몇 권 골라낼 수 있었다.
‘황자궁 서고에서 빌린 책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지만, 어떤 방향으로 알아볼지 도움은 됐으니까.’
무사히 뷔욘과의 만남도 수행하고, 책도 추가로 빌리고. 미라벨에게 제 ‘기억’을 증명해 보이기까지, 한 번의 방문으로 목표한 과업을 모두 달성한 클로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사제이자 친우인 루카를 만나러 대신전으로.
지난번에 라구가 미처 다 정화하지 못한 라피스라줄리 팔찌를 봐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데메트리안에게서 아마 돌아와 있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만날 수 있는지 전령을 보냈더니, 진즉에 돌아와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기에 약속을 잡았던 것이었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오랜만입니다, 자매님.”
“지평선의 평균율을. 잘 지내셨죠, 루카미오노 사제님?”
라크루아의 마차가 대신전에 다다랐을 때, 예배당 뒤편 사제들의 성소 앞에 루카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색에 잠긴 양 성소 입구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대신전을 방문한 사람들이 그런 사제님의 자태를 흘끔대었다.
요즘 고티유에서 인기 있는 젊은 남성을 꼽을 때면, 에르드의 사제 루카미오노가 꼭 포함되었다.
신성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 위해 성국으로 떠났던 루카는 루카미오노라는 이름으로 서품을 받은 뒤, 엘리트만이 올 수 있다는 고티유의 대신전으로 배속되면서 고티유 사교계의 인기 손님으로 급부상했다.
이에는 크레벨 소공작의 친구라는 간판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미모가 결정적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붉은 입술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진한 금발…… 마치 생명의 사도 피레사를 연상시키는 그의 아름다움에 감색 사제복이 덧붙으면, 뭔가 퇴폐적인 느낌마저 주는 것이었으니.
‘그 루카미오노 님’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신도들의 시선에 화답하듯 루카가 손을 합장한 그대로 공손하게 말했다.
“자매님, 보는 눈이 많으니 부디 안으로 드시겠어요?”
공손은 공손인데 눈웃음을 치며 말하는 그 낯에, 클로에는 약간의 떨떠름함을 느끼며 그를 따라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서품을 받은 지 3년도 안 된 사제 루카미오노가 신관들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개인 응접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타고난 막대한 신성력 덕분이었다. 그 덕에 이미 고티유 대신전의 차기 대신관으로 점쳐지고 있었으니까.
“그냥 오지, 새삼스레 뭘 전령을 보내고 그래?”
“데미한테 물어봤더니 아직 성국에서 돌아왔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 새끼가? 하…….”
응접실에 들어선 이후 루카의 목소리에는 밖에서 들리던 나긋나긋한 양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진짜 성국 ×같아서 대축일 때 술이나 먹자고 했는데. 어쩐지 답장도 한 새끼가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니.”
사교계에서 루카의 인기나 평판이 어떠하건 간에…… 클로에는 그를 만날 때면 귀를 씻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살면서 들어 온 비속어의 8할은 루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를 후견해 주는 공작가에 의탁하게 된 평민 고아의 본분은 있는 듯 없는 듯 늘 황송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일진대, 거대한 신성력이 감지되자마자 공작저로 거처를 옮긴 일곱 살의 루카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며 소개받은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내뱉은 첫인사부터 싹수가 남달랐다.
‘뭘 봐, ×신아.’
어린 나이부터 공작가의 후계자다운 품행을 선보였던 데메트리안은 태어나고서 처음 듣는 양식의 말에 동공을 파르르 떨었고, 루카는 당시에 대해 늘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무슨 ×밥 같은 새끼가 다 있나 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