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9)
제 연심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체면 상한 것처럼 눈빛을 쏘아대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또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놀라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대니얼은 허허 웃었다.
“나라고 뭘 알겠어? 그저 네가 네 마음을 조금 더 잘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거지. 네가 나보다 네 마음을 더 잘 알아야 하지 않겠냐.”
대니얼은 피식 웃으며 메인 디시를 내 오는 시종들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데메트리안은 뭔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그의 미끈한 낯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그러한 데메트리안의 번민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오찬의 메인 디시는 연어 스테이크였다. 북해에서 직송받아 바로 황궁의 실력 좋은 요리사들이 완벽하게 만들어 낸 요리였음에도 그에게는 진정한 해산물 요리가 아닌, 그런 것이었다.
* * *
클로에가 다음으로 찾은 도서관은, 처음에 고민하던 리도테의 도서관이나 황궁 도서관이 아닌 제국 아카데미의 도서관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에티엔의 심부름 때문이었고, 실제로는 오늘 제국 아카데미의 도서관 앞에서 뷔욘을 마주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기억하는 그날에 그랬으니까.
저의 ‘꿈’에 대해 털어놓은 날, 미라벨이 물어본 수많은 것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그래서 그 ‘예쁜 왕자님’과 어떻게 발전했냐는 것이었다. 그들 또래 아가씨들의 제일가는 관심사가 연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왕자님이 그랬어? 널 계속 연모해 왔다고?”
“으응, 그래서 협상에서 혼약을 제시하신 거라고.”
보상금을 추가로 받거나, 마정석과 모피 등 특산품 교역에서 큰 이득을 볼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제 첫사랑을 이룰 기회를 놓치지 않은 거라고 부군은 고백해 왔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랬었어? 언제 너한테 반하신 거래?”
“글쎄, 그거야 나는 모르지……?”
그 엄숙한 스칸다르의 궁중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저를 오래간 연모해 왔다는 부군뿐이었고, 그래서 없던 사랑도 생겼다…… 라는 사연은 갓 성년이 된 아가씨들에게 충분히 낭만적으로 울렸던 것이다.
“아, 저번에 마주쳤을 때 자세히 좀 볼걸.”
그 호위를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라 정신 팔렸었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미라벨의 말에 클로에의 머릿속에 갑작스레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전하께서 내게 아직 감정이 없으신 거라면, 고티유를 떠나시기 전까지 나를 좋아하시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제가 알뫼 정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묘하게 얼어붙은 그의 낯이, 늘 눈을 접어 웃으시던 다정한 얼굴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스칸다르에 공비로 가게 될 것은 저밖에 없는데, 외로웠던 셰비크의 생활을 생각하면…… 다정한 부군의 총애가 없으면 슬플 일이었다.
‘지난번엔 갑자기 마주쳐서 바보같이 굴었지만…… 원래 만났던 때에 제대로 처신하면 되겠지.’
클로에는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뷔욘이 귀국할 때까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와의 관계를 쌓아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대축일 주간 내내 바빴던 에티엔이 책을 대신 반납해 달라 부탁해 오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애걔, 5실버? 심부름 값도 안 남겠다.’
‘연체료 몇십 브론즈도 안 돼. 좀 부탁하자, 응?’
제가 기억하는 그때처럼 에티엔이 5실버를 쥐여 주었을 때, 일부러 시간을 비워 두었던 클로에는 기꺼이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때와 같은 시간에 다다르도록 신경 쓰면서.
‘그땐 이 돈이 푼돈으로 보였었는데. 이번엔 사업 자금에 넣어야지.’
4실버 몇십 브론즈쯤 하는 차액은 귀족 영애의 씀씀이에 비하면 별 의미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클로에는 이 푼돈이 마르코네서 마력에 오염된 장신구 하나쯤 구할 수 있는 금액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따 도서관 들어가기 전에 왕자님을 마주칠 거야.”
고티유 외곽에 위치한 제국 아카데미로 가는 마차 안에서,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미라벨이 제가 말하는 것을 허황스럽다며 안 믿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말 증명해 보인다면 더 좋은 일이었으니까.
‘전하도 뵙고, 돈도 벌고, 미라벨에게 증거도 보여 줄 수 있고. 일석삼조네.’
정문에 마차를 세우고 미라벨과 단둘이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의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데메트리안이나 에티엔을 만나러 올 때면 늘 그랬듯이. 자유롭게 제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는 리도테와 달리 제국 아카데미는 제복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어서, 일반 외출복을 입고 아카데미에 들어선 귀족 영애들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낯설어하는 눈길을 느끼던 미라벨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주인님, 수업 안 들어가시나요? 라이언이 궁금해하지 않겠어요?”
“큽…… 하지 마, 정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꾸며서 라이언과 비슷한 말투를 내는 것에 클로에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지난번 라이언과 헤어질 때에 있었던 일은, 미라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그날 밤부터 둘만의 비밀스런 농담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주인님, 그런데 빛의 날이면 평일인데…… 아카데미 안 가시나요?’
애초에 제가 아카데미 생도인 척을 했다는 것이 찔릴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갑작스레 물어오는 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별로 말이 없던 미라벨은 갑작스레 터진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지, 학학대며 제가 대신 답하고 말았다. 클로에가 어떻게 주인님의 위엄을 살릴까 고민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얘 아카데미 안 다녀. 너 속은 거야, 으하핫.”
“예에……?”
아무 생각 없이 물었던 것에 충격적인 사실이 답으로 돌아오자, 라이언은 눈만 끔벅였다.
‘아, 얘는 왜 제가 말하고 난리야?’
클로에는 창피한 기색을 지우고 태연히 말했다.
“교훈 하나 얻었지? 앞으로 네가 거래를 트러 다니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 지금을 기억해.”
클로에는 당황한 낯을 숨기고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선공이 필승이고, 허풍이라도 그럴싸하게 떨기만 하면 남들은 다 믿어. 뻔뻔하게 밀고 나가.”
네가 속았듯이 말야. 지금도 클로에는 뻔뻔하게 밀고 나가고 있었다. 네가 전과 생길 뻔한 걸 잊지 말라는 듯이, 손목을 교차하여 슬며시 들어 보이면서. 그 모습에 미라벨은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새침 떠는 건 많이 봤었지만, 요즘 진짜.’
5년 더 살고 돌아오신 덕분인지, 제 젖자매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는 요즘이었다. 더 재밌는 건 당연히 이편이었다.
뷔욘 스칸다르는, 그러니까 제국 아카데미의 최장기 재학생이었다.
다들 열다섯 살 즈음에 입학하곤 하는 5년제 제국 아카데미에 그 역시 비슷한 나이에 들어갔지만, 스물일곱 살인 지금까지 적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딱히 졸업할 필요를 못 느끼는지 전공도 선택하지 않고 한 학기에 한두 과목만 수강하면서 졸업을 미루고 있었다.
관료가 될 것도 아니고 볼모 생활을 유학 생활로 포장하기 위해 강제된 입학이었으니 꼭 졸업할 이유는 없었지만, 기행임은 확실했다.
수업도 한두 개밖에 듣지 않으니 그가 아카데미에 오는 날도 일주일에 단 하루였다. 그것이 마침 에티엔이 책 반납을 부탁한 오늘, 한 주의 마지막 날인 철의 날.
그러고 보면 스칸다르에 가서 클로에가 받게 될 총애에는 에티엔의 지분이 조금 있었다.
‘요즘 들어 쓸모가 많네.’
덕분에 분리 독립파의 테러도 막고, 학생 수첩을 본 덕분에 라이언도 얻어 일도 꾸릴 수 있었고, 에티엔의 출입증이 있으니 제국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책도 빌릴 수 있을 거였다. 어렸을 때 병약했던 에티엔은 늘 뭔가 비실비실하고 맹해 보여서, 오라비라기보다 어딘가 만만하여 낮잡아 보게 되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부모님 앞에서야 혼나니까 오빠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라벨이 클로에의 팔을 툭 치며 고갯짓을 했다.
“진짜네.”
미라벨이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저들이 걸어가고 있는 맞은편, 도서관 입구에 뷔욘이 서 있었던 것이다.
최장기 재학생이라는 기인답게 풀어 헤친 제복 재킷 안으로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겉에는 자수가 화려하게 놓인 로브를 걸친 모습이었다. 호위에게 제가 빌려 나온 책들을 건네고 있던 그가, 제게로 다가오는 인영에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 안녕하세요?”
클로에는 제가 이날 건넸던 그대로 인사말을 만들어 건넸다.
“아, 영애. 또 뵙습니다.”
뷔욘이 낯을 밝히며 클로에를 맞았다. 지난번에 미라벨의 관심을 끌었던 호위가 눈치 좋게 몇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네, 날씨가 정말 좋네요. 잘 지내셨죠?”
그러는데 눈치 없이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실제로 날이 화창하기는 해서 그때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던 건데, 미묘하게 시간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네, 그러네요.”
클로에가 보닛을 부여잡으며 민망해하는 양에 뷔욘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가 이곳 사교계에서 지금껏 지어 보이던 고운 미소와 사뭇 달랐다.
“아카데미까지 무슨 일이신지요?”
“제 오라버니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왔어요. 왕자님께서는 아카데미에 오시는 날이 드물다던데, 좋은 우연이네요.”
클로에는 이날 제가 건넸던 말을 기억하는 그대로 뱉었다.
‘토씨 하나까지 같은 말은 아니겠지만, 적당히 비슷하게 들리면 되겠지.’
미라벨의 손에 들린 책을 흘끗 바라본 뷔욘은 알겠다는 듯 주억거렸다.
“오라버님과 우애가 돈독하신가 봅니다.”
“아, 그,”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스칸다르에 가서야 알게 될 뷔욘의 누이에 대해 언급할 뻔하고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하하, 그런 셈이랄까요.”
“지금 경시청에 계시지요?”
“네. 알고 계시네요?”
“아카데미 다니실 때에도 뵌 적이 있고, 경시청에는 종종 가게 되는 걸요.”
그의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번졌다. 일종의 쓴웃음이었을까.
고티유나 그 근방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경시청에 구금된 스칸다르인들을 구명하는 건 볼모로서 고티유에 머무르는 스칸다르 후계자들의 책무 중 하나였다. 제국을 기본적으로 싫어하는 스칸다르인들은 제 잘못으로 잡히고도 제 나라의 왕자님께서 배석하지 않으시면 무슨 부조리라도 당할까 심문에 비협조적으로 응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때가 아니면 우리가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나 있겠느냐.’
그 의무가 제게는 너무나도 한심하고 굴욕적이건만, 그 비위 좋은 부왕은 이마저도 마냥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뷔욘의 주먹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그의 그런 심정을 알 수는 없어도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을 짐작하는 클로에는, 제가 기억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대해 물어보시겠지.’
“그나저나, 영애와는 도서관에서 인연이 있나 봅니다.”
“네?”